237화 후회할 세월
옷에 묻은 얼룩덜룩한 물감이 보였다. 그리고 어찌 되었는지 모를 오라버니를 떠올렸다. 소함연은 하는 수 없이 모든 불만을 참아야만 했다. 바로 보이는 궁녀 하나를 불러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소 낭자, 이쪽으로 오세요.”
궁녀는 소함연을 맞이하며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소함연이 보지 않을 때, 궁녀는 최일이 있는 쪽으로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최일은 이미 물감을 새것으로 바꾸고, 긴 서탁 앞에 서 있었다. 그가 의도한 대로 소함연이 소여방을 찾기 전에 먼저 옷을 갈아입으러 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의 부드러운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가씨들은 소중히 대해야 하는 법. 그런 지저분한 일로 낭자의 눈을 더럽힐 수는 없지.”
최일은 말을 마치더니, 고개를 숙이고 계속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는 월령안이 배나무 숲 위에서 검무를 추는 장면을 그리고 있었다. 그의 붓끝에서 그려진 월령안은 꽃이 만발한 치마를 입고, 손에는 장검을 들고 있었다. 마치 선녀가 내려온 듯, 발끝을 살짝 디디기만 하면 꽃들이 만발했다. 그녀는 흐드러진 꽃 속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의 붓끝 아래 그려진 월령안은 꽃보다 더 아름다웠다. 주변에 온갖 꽃이 활짝 피어 있었지만, 그래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그녀였다. 특히 그녀의 눈은 살아있는 듯, 마치 종이를 뚫고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의 종이에는 월령안 한 사람뿐, 육장봉은 없었다.
농담이 아니라, 그는 이 그림으로 조 대인을 매수할 셈이었다. 조 대인이 육장봉, 이 늑대가 월령안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그에게 따지지 않도록 말이다.
만약 육장봉까지 그려 넣었다가는, 조계안이 노발대발하면서 황궁을 다 뒤집어엎을 게 뻔했다.
* * *
이 무렵, 육장봉과 월령안은 공중에서 끊임없이 피어나는 꽃송이들을 밟고서 화원 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날아왔다.
이번에 두 사람은 더는 멈추지 않고, 배나무 숲 위쪽에서 단숨에 날아내려 왔다.
두 사람이 착지했다. 그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원래 평범했던 푸른 풀밭 위로 갑자기 화려한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둘은 꽃을 밟으며 모두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왔다.
이 장면은 어제저녁 월령안이 장치를 시험해 볼 때는 완성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지금 육장봉이 그녀와 함께 완성해 가고 있었다.
“미인이 걸을 때는 발걸음마다 연꽃이 피는 것 같다더니!”
“걸음마다 꽃이 피네!”
“우와와! 정말 아름다워……. 월 언니, 너무 예뻐요.”
정원에 있던 공자와 아가씨들은 월령안과 육장봉이 내려오는 모습을 보자, 너도나도 몰려갔다.
아가씨 몇몇이 월령안에게 바싹 다가가려던 순간이었다. 그녀들은 육 대장군이 소유욕 가득한 얼굴로 경고의 눈빛을 보내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녀들은 하하 호호 웃더니, 바로 고분고분해져 감히 앞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녀들의 흥분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그녀들은 재잘거리며 물었다.
“월 낭자, 어떻게 이런 걸 생각해 낸 건가요? 공중에서 육 장군과 검무를 추는 광경이 정말 환상적이었어요.”
월령안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아가씨 하나가 흥분하여 소리쳤다.
“월 낭자……. 어머, 여기 봐봐. 내가 밟아도 꽃이 피잖아. 나도 꽃이 만발하게 할 수 있어.”
“어머, 어머. 어떻게 한 거야? 나도 해 보고 싶어!”
나머지 아가씨들도 그 광경을 보고 너도나도 나서더니, 미처 피지 못한 꽃을 찾아다녔다.
순식간에 월령안의 주변을 둘러싼 사람이 반은 줄었다.
“어머나, 비단 조화였다니. 이건 어떻게 만든 거야? 진짜랑 똑같잖아? 봐요……. 이 꽃들 진짜 신기해요. 꽃잎을 살짝 건드리면 오므라들어서 옆에 풀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여요. 그런데 발을 디디면 꽃이 펴요. 색깔도 정말 곱고 예뻐요.”
아가씨 한 명이 땅에 주저앉아 비단 조화를 살짝 만졌다. 곧 이 ‘신기한’ 비밀을 발견하고, 친구들을 불렀다.
나머지 아가씨들도 이 신기한 광경을 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표정을 짓고 월령안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눈빛으로 경고하는 육 대장군을 보았다. 바로 이해득실을 따져 본 다음, 모두 꽃을 보러 달려갔다.
육 대장군은 보기 좋게 잘생기긴 했지만, 표정이 굳은 그는 전혀 ‘보기 좋지’ 않았다. 그 잘생긴 얼굴을 보려다 깜짝 놀라 죽을 판이었다.
그녀들은 그냥 꽃이나 보기로 했다. 육 대장군의 굳은 얼굴보다는 꽃이 훨씬 보기 좋았으니까.
육 대장군의 굳은 얼굴은 앞으로 다가오려던 아가씨들을 물리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열정이 넘쳐나는 어린 공자들은 물리치지 못했다.
“월 낭자!”
진중한 이들은 담담하게 인사만 했다. 그러나 반짝이는 눈빛과 빨갛게 달아오른 귀 끝이 그들의 심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말았다.
“월 낭자, 올해의 화신으로 월 낭자를 뽑을 겁니다.”
담대한 이는 인사하는 동시에 호의를 드러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음이 앞선 한 소년은 장소를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입을 열어 자신을 소개했다.
“월 낭자, 저는 올해 열일곱이고 아직 미혼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제연(齊延), 여기는 춘일연일세. 부친을 비교하는 자리가 아닐세.”
“우리 모두 자네 부친이 제국공(齊國公)이고, 모친이 청하(淸河) 군주인 걸 알고 있다네. 하지만 지금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자네가 그걸 다 말하면, 우리가 어떻게 자네하고 겨루겠나?”
소년들의 감정은 간단하고 솔직했다. 다행히 모두 적정선을 지킬 줄 알았다.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멀리서 월령안에게 인사만 할 뿐이었다.
간혹 제연처럼 장소를 따지지 않고 무모하게 입을 여는 소년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우스개 몇 마디로 무마해 그냥 넘어갔다. 그래서 월령안은 입을 열어 말할 기회조차 없었다.
소년들도 월령안이 입을 열어 말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냥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사랑에 눈뜨기 시작한 소년들은 아름다운 여성을 동경하는 법. 그들도 어쩌려는 것은 아니었다. 갑작스레 마음에 봄바람이 들어 미인의 마음속에 좋은 인상을 남기려는 것뿐이었다.
월령안은 열여덟 살로, 비록 그들과 나이가 크게 차이 나지 않았지만 스스로 나이가 많다고 여겼다. 순진한 소년들을 보면 꼭 남동생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의 직설적인 말을 듣고도 불만으로 여기지 않았다. 가끔 실례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그냥 옅은 미소를 지을 뿐 화내지 않았다.
다 큰 어른으로서 어린애들과 실랑이하는 것은 너무 품위 없는 행동이었다.
“월 낭자, 정말 상냥하시군요.”
소년 몇몇은 월령안이 그들에게 미소를 짓자, 저도 모르게 하나같이 수줍게 낯을 붉혔다.
“그림 같은 미모에, 아름답지만 요염하지는 않군. 월 낭자가 경국지색은 아니지만, 기질이 독특하고 매력적인 풍격의 소유자일세.”
일부 고상한 재자들은 멀리서 바라볼 뿐,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저 눈에는 감탄이 적지 않게 서렸다.
월령안의 옅은 웃음과 가벼운 말투와는 달리, 육장봉은 처음부터 끝까지 차가운 얼굴이었다. 일언반구도 없이 그녀의 곁에 서서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다.
바로 그 때문에 몇몇 소년만 용감하게 앞으로 다가왔다. 조금 나이 든 이들은 한쪽에 묵묵히 물러서서 섣불리 다가서지 못했다. 심지어 월령안을 감히 바라보지도 못했다.
육장봉은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행동으로 분명하게 나타낸 셈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육 부인의 자리는 여전히 월 낭자의 것이었다.
그들로서는 감히 예비 육 부인에게 연모의 정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경장, 자네가 월 낭자와 알고 지내는 거로 기억하는데, 왜 가서 인사하지 않는가?”
유경장의 친구는 조금 전까지의 열광과 흥분은 온데간데없고 의기소침해진 유경장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보니 어렴풋이 짐작이 가서, 저도 모르게 한마디 일깨워 주었다.
월령안과 어깨를 나란히 한 육장봉을 흘끔 보자, 유경장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가지 않겠네.”
그가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행복을 부술 자격은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게 모두 진실은 아닐세. 가서 묻지 않으면 어떻게 진실을 알겠는가?”
친구는 유경장의 의기소침한 모습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를 한 번 떠밀어 주기로 했다.
“경장, 여인들은 우리와 달라. 자네는 삼 년 하고도 또 삼 년을 기다릴 수 있지만, 여인들은 기다리지 못한다네. 그러면 자네한테 다음 삼 년은 없는 걸세.”
삼 년 전, 월령안이 혼인하던 그날, 바로 그가 유경장과 함께했었다. 그래서 유경장이 술에 흠뻑 취해 술 단지를 끌어안고서 통곡하는 모습과 술에 취해 혼절하면서도 월령안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까지 보았다. 유경장이 그녀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옆에서 직접 지켜보았다.
유경장은 삼 년 전에 쟁취하지 않은 일을 삼 년 동안 후회했다.
지난 삼 년 동안 유경장은 온종일 술에 취해 흐리멍덩하게 기루를 집으로, 기녀를 벗으로 삼았다. 남들은 그를 바람둥이라고 하지만, 진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실 매일 밤 그는 독수공방하며 술을 벗으로 삼았다.
오늘 다시 도전하지 않는다면, 그가 후회할 세월은 삼 년만이 아니었다.
월령안은 이미 열여덟 살이었다. 그녀에게는 다음 삼 년이 없었다. 게다가 오늘 그녀가 이렇게 이목을 끌었으니, 육장봉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녀에게 구애할 것이다.
월령안의 출중함은 감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눈이 달렸으면 모두 볼 수 있었다.
“나는…….”
유경장은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발에서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좀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마디만 물으면 될 일일세. 확실하게 대답을 듣고 나면 자네도 후회 없이 마음을 접을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녀에 대한 마음만 접고 나면, 유경장은 벼슬길에 나가든, 가정을 이루든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유경장도 이제 젊은 나이가 아니었다.
“좋네. 내가 가서 물어보겠네.”
유경장은 중대한 결정이라도 내린 듯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옷자락을 정리한 뒤, 월령안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유 공자!”
“유 상공(相公 – 과거 선비에 대한 존칭)!”
유경장은 벼슬길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비범한 재능 덕에 변경에서는 명성이 자자했다. 세도가들 사이에서도 꽤 존중받는 터였다.
몇몇 어린 공자는 유경장을 보자, 먼저 인사했다.
유경장은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걸음을 멈추지 않고 월령안에게 곧장 걸어갔다.
그는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추는 순간,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잃을까 두려웠다.
월령안을 에워쌌던 소년들은 그녀의 말솜씨로 모두 흩어져 가고 없었다.
아가씨들도 월령안에게서 저절로 피는 꽃을 한 바구니씩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녀들도 더는 땅 위의 꽃을 연구하지 않았다. 월령안의 인도 아래 미처 끝내지 못했던 장기 자랑을 재개했다.
그러나 유경장이 나타나자, 또다시 모든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령안!”
유경장은 월령안의 앞으로 다가와 나지막하게 불렀다.
단 한마디였지만, 많은 이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온종일 기껏해야 ‘월 낭자’라고 불렀다. 아가씨들이 월령안과 친해졌다고 해도, 역시 ‘월 언니’라고 부르는 게 고작이었다. 자리에 있는 이 많은 사람 가운데서 이처럼 살갑게 ‘령안’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두 사람은 무슨 사이지?’
모두는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하나같이 귀를 쫑긋 세우더니, 조금도 놓치지 않고 들으려 했다.
“유 공자.”
월령안은 순간 멍해졌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유경장에게 예를 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