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남원대왕도 그저 그렇군
소갑은 곧 정신을 차렸다.
“사부도 괜찮다고 했어요. 월 낭자도 걱정하지 마세요. 사부는 며칠 쉬시면 나을 거예요. 월 낭자, 오늘 아침 일찍 모든 장치를 다시 한번 시험해 보았어요.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장담해요. 보호구는 방 안에 있어요. 일단 겉옷을 벗고 보호구를 입으세요. 장치의 고리를 보호구에 끼운 다음, 다시 겉옷을 입으면 밧줄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거예요.”
“좋아요.”
월령안은 대답하고서 고개를 들었다.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아무도 없는 작은 뜰을 휙 둘러보았다.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녀는 대충 핑계를 찾아 소갑을 내보냈다.
“소갑, 목이 좀 마르네요. 물 좀 가져다줄래요?”
큰 물고기를 잡으려면 큰 미끼를 던져야 한다. 실내로 가서 옷을 갈아입는 때만이 그녀의 곁에 아무도 없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야율제가 이 기회를 잡지 못하면, 더는 그녀에게 손을 쓸 기회를 찾지 못할 것이다.
월령안은 야율제가 오늘 나타나리라고 굳게 믿었다.
야율제는 오만방자하고 자부심이 넘치며 독선적이었다. 그런 사람은 실패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는 전쟁에서 육장봉에게 졌다. 이제는 두 나라가 회담을 시작했다. 단시일 내로는, 어쩌면 더는 전장에서 육장봉을 이길 기회가 평생 없을지도 모른다.
야율제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의 실패를, 특히 육장봉에게 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선택했다.
육장봉의 전처로서, 육장봉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번 전쟁에 주나라를 위해 공헌까지 한 여인이었다.
야율제는 자신이 육장봉보다 못해서 패했음을 인정하기 싫었다. 그래서 모든 책임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그녀 때문에 육장봉이 자신을 이길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야율제는 월령안을 죽이는 것을 자신과 육장봉의 새로운 접전으로 여기고 있었다.
겹겹이 쌓인 보호를 뚫고, 육장봉의 눈앞에서 그녀를 죽인다. 그러면 자신이 육장봉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뒷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청희 장공주와의 관계가 드러날 것까지 감수했다. 갖은 수단을 써서 수도에 잠입하여 그녀를 죽이려 했다. 그것만 보아도 그가 가진 호승심을 알 수 있었다.
사실 그는 북요의 남원대왕이니만큼, 그녀를 은밀하게 죽일 기회는 수두룩했다. 그 많은 첩자를 희생하면서 자신을 드러낼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보란 듯이 요란하게 입성하여 그녀를 죽이려 한 것은 순전히 주나라와 육장봉을 도발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기회는 단 한 번뿐. 야율제는 저번에 그녀를 죽이지 못했다. 이제 성안으로 잠입해 그녀를 죽일 기회가 더는 없었다.
오늘은 육장봉도 명월산장에 있었다. 야율제의 오만방자하고 자부심이 넘치는 성격상, 그가 나타날 가능성이 대단히 컸다. 자신이 육장봉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어찌 인정할 수 있겠는가.
월령안은 작은 방에 들어가 겉에 입은 긴 치마를 벗었다. 그리고 소갑이 준비한 보호구를 입었다.
그녀는 건성건성 옷을 갈아입었다. 그 동작은 약간 해이하면서도 무심해 보였다. 보호구를 착용하고, 다시 한쪽에 있는 치마를 주워 들었다. 그러나 서둘러 입지는 않고 그냥 팔에 걸쳤다.
그녀 말고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방이었다. 월령안은 그 안을 둘러보며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정말로 무서워서 못 오는 건 아니겠지?”
어쩌면 그녀가 야율제를 잘못 파악했는지도 모른다.
“됐어. 안 온 거면 안 온 거지, 뭐.”
야율제는 어둠 속에 숨어 있고, 그녀는 밝은 곳에 드러나 있다. 그녀로서는 야율제가 모습을 드러내도록 유인만 할 수 있을 뿐, 그가 나타나지 않으면 손을 쓸 방도가 없었다.
어쨌든 주나라의 국서가 북요에 전달되면, 그도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될 것이다. 그녀도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빨 빠진 호랑이를 잡으면 된다.
월령안은 치마를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야율제가 서생처럼 두루마기를 입고서 손에 쥘부채를 들고 나무 밑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웃음을 머금고 그녀를 보고 있는 깊은 눈에는 그녀의 모습이 작게 비치고 있었다. 마치 연모하는 아가씨를 기다리는, 사랑에 빠진 사내 같은 모습이었다.
월령안은 잠깐 멈췄다가 곧 웃으며 말했다.
“대왕께서 오셨군요.”
드디어 기다리던 때가 왔다.
“네가 육장봉을 따돌린 건 내가 오기를 기다린 게 아니냐? 이렇게 성심껏 맞이하는데 어찌 미인의 호의를 저버릴 수가 있겠느냐?”
야율제는 손목을 움직였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수중의 쥘부채를 펼치더니 가볍게 부쳤다. 풍류스럽고 품위 있는 모습이었다.
“나도 이만하면 변경 풍류가들의 풍류를 어지간히 따라가지 않느냐?”
“인제 보니 대왕께서는 떳떳하게 걸어 들어오셨군요. 그러니 육 대장군이 찾을 수가 없었겠죠.”
야율제는 서생 모습으로 변장하고, 손에는 초대장까지 들고 있었다. 그러니 언제든 떳떳하게 걸어 들어올 수 있었다.
춘일연의 주최자는 등요 공주였다. 야율제가 초대장을 얻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야율제는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것이다. 그래서 육장봉이 아직 그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리라.
“네가 육장봉보다 영리하구나.”
야율제는 부인하지 않았다.
“이렇게 영리한데 어떻게 육장봉에게 일편단심일 수 있지?”
“대왕의 그 말은 앞부분만 맞네요.”
상인은 이익을 중시하고 이별은 가벼이 여긴다. 그녀의 일편단심도 현실 앞에서는 바뀔 수 있었다.
“네가 육장봉보다 영리하다는 거냐?”
야율제는 쥘부채를 거두고 계단을 올라 월령안에게로 걸어왔다.
월령안은 그 자리에 서서 꼼짝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아니오, 육장봉에 대한 제 마음을 접었다고요.”
“마음을 접었다면서 왜 내 청혼을 승낙하지 않느냐? 내가 주나라 황제에게 보낸 구혼서는 너도 보았을 것이다.”
야율제는 한 걸음, 한 걸음 느릿하게 옮겼다. 그 걸음마다 사람을 짓누르는 위압감이 가득했다.
지금의 그는 승리를 확신하는 사냥꾼 같았다. 서둘러 손을 쓰기보다는 느긋하게 사냥감을 가지고 놀려고 했다.
“저는 동의했는데요. 대왕께서는 제 대답을 듣지 못한 모양이군요?”
월령안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야율제가 만들어 낸 분위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대왕께서 준비하시는 예물이 제 마음에 든다면 당장 시집가겠다 했지요.”
유희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누가 사냥감이고 누가 사냥꾼인지는 야율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
“감히 시집오겠다고? 내가 죽일까 겁나지도 않나 보구나.”
마지막 계단을 디디는 순간, 야율제의 표정이 음험하고 사나워지더니 살기로 가득 찼다.
월령안은 여전히 처음과 같이 담담하기만 했다. 야율제의 눈동자를 마주 보며 나긋나긋하게 우스갯소리를 했다.
“대왕께서 저를 맞아들일 용기가 있다면, 저 역시 시집갈 용기가 있답니다. 저는 과부가 되더라도 별로 상관이 없거든요.”
“내가 무섭지 않으냐?”
야율제는 계단을 오르기는 했지만, 앞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대신 월령안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보아하니, 오히려 대왕 쪽에서 저를 두려워하시는 것 같군요.”
월령안은 들고 있던 옷을 아무렇게나 한쪽에 던져 놓았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정교하게 만들어진 쇠뇌(발사장치를 통해 쏘는 기계식 활)를 꺼냈다.
“천궁각에서 저를 위해 만든 쇠뇌를 시험해 볼까요?”
“그깟 잔재주로!”
야율제의 눈빛이 날카롭고 예리해졌다.
“그 쇠뇌에 화살을 몇 개나 장전할 수 있겠느냐? 그 화살을 다 쏘고 나면 어쩔 셈이지?”
‘무모하게 손을 쓰지 않길 잘했군. 월령안이 역시 준비를 했어.’
“대왕을 유인하기 위해 이렇게 큰 미끼를 던졌어요. 그런데 제가 준비하지 않을 리가 있겠어요? 대왕을 지루하게 할 수는 없죠.”
월령안은 허리에 맨 폭넓은 허리띠를 끄른 후, 안에 숨겨진 쇠뇌를 내보였다. 얼핏 보아도 수십 개는 되어 보였다.
야율제는 한 손을 뒷짐 지고, 경계 어린 눈으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준비를 야무지게도 했군.”
월령안은 대담하고 신중했다. 그녀를 한 번에 죽이지 못했으니 앞으로 더는 기회를 찾기 힘들 것이다.
“대왕, 서두르지 마세요. 아직 더 있어요.”
월령안은 옷소매를 걷어서 안에 숨긴 수전(袖箭 – 소매 안에 숨겨 발사하는 암기)을 보여 주며 자비 없이 웃었다.
“화살은 모두 백열 대입니다. 대왕, 시험해 보시겠어요?”
“그까짓 백열 대가 대수인가? 연속으로 쏠 수도 없을 텐데”
야율제는 냉소했다. 그가 들고 있던 쥘부채가 순간 예리한 무기가 되어 월령안에게로 날아갔다.
“저번에 네가 죽음을 피할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아서다. 오늘은 기회가 없을 거다.”
“대왕, 조심하세요. 제 쇠뇌는 연달아 쓸 수 있거든요.”
일부러 야율제의 체면을 뭉개려는 듯, 월령안은 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에 맞춰 손에 든 쇠뇌를 발사했다.
슉!
수십 개의 화살이 일제히 야율제에게로 날아갔다. 화살의 속도는 야율제보다 아주 조금 빨라, 가까스로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월령안과 야율제는 거의 동시에 공격했다. 둘 다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첫수는 모두 허탕이었다.
월령안이 쏜 화살은 공중에서 불꽃만 반짝 일으켰을 뿐이다. 야율제의 옷자락도 스치지 못하고, 그의 손에 든 쥘부채에 맞아 땅에 떨어졌다.
야율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가 공격하려 할 때 월령안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공격을 포기하고 방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월령안은 일격을 날린 뒤, 신속하게 다음 쇠뇌를 꺼내어 야율제에게 계속 쏘았다.
슉슉!
마찬가지로 수십 발의 화살이 일제히 야율제를 공격했다.
야율제가 일격을 막고 몸을 가누기도 전에 또 예리한 화살들이 잔뜩 날아 들어왔다. 뒷걸음질 치며 막을 수밖에 없었다.
슉!
월령안은 멈추지 않았다. 화살이 떨어지면 바로 다음 쇠뇌를 꺼내 야율제에게 쏘았다.
연속되는 공격에 야율제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두 계단이나 물러났다.
“북요 남원대왕도 그저 그렇군요.”
야율제가 후퇴하자, 월령안은 앞으로 나아갔다. 손에 든 쇠뇌를 끊임없이 쏘았다. 야율제에게 숨을 돌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야율제는 연신 뒷걸음질하며 계단을 내려가다가 맨 처음 섰던 자리까지 물러나게 되었다. 손에 든 쥘부채도 예리한 화살에 뚫려 너덜너덜해졌다. 더는 풍류가 같은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겨루면서 계속 후퇴하다 보니 월령안의 옷자락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야율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월령안, 고작 암기 가지고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두고 보자.”
“어쨌든 남원대왕께서는 저를 건드리지 못할 거예요.”
잇달아 쏟아지는 화살 비에 야율제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내디디지 못했다. 그러나 월령안이 허리띠에 감추었던 쇠뇌도 이제 두 개밖에 남지 않았다.
순간 야율제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는 후퇴를 멈추고 화살 비의 틈새를 뚫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하지만 월령안은 갖고 있던 쇠뇌를 모두 쓰자, 옷소매를 젖히더니 팔에 묶인 수전(袖箭)을 꺼냈다.
수전은 작고 정교하여 쇠뇌처럼 동시에 수십 대의 화살을 쏠 수는 없었지만, 연속으로 쏠 수 있었다. 예리한 화살을 잇달아 쏘면 야율제를 다치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접근하지 못하게는 할 수 있었다.
이제까지 겨뤘지만, 야율제는 여전히 방어만 했을 뿐 월령안의 옷자락도 건드리지 못했다.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오늘은 너와 천천히 놀아 주마.”
“누가 대왕하고 천천히 놀고 싶답니까? 이미 제 사람들이 왔는데요.”
월령안이 손을 들어 뒤쪽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