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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232)화 (232/1,004)

232화 우리 내기할까요?

육장봉은 월령안과 함께 천천히 걸었다. 상인에 대한 이야기는 더 하지 않고,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야율제는 명월산장에 없소. 오늘 나타날지도 잘 모르겠군.”

육장봉은 야율제가 그의 눈을 피해 숨어 있을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찾지 못했으니 야율제는 명월산장에 없는 게 분명했다.

“대장군, 우리 내기할까요?”

월령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들더니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햇빛이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를 뚫고 그녀의 얼굴과 몸에 부서져 내렸다. 그녀가 몽환적으로 흐릿하게 보였다.

육장봉은 달콤하게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순간 황홀경에 빠졌다. 그녀가 뭐라고 하는지 듣지 못한 채 고개부터 끄덕이고 말았다.

“대장군, 야율제가 명월산장에 나타날지 안 나타날지를 가지고 내기하시죠.”

월령안은 육장봉이 잠깐 넋이 나갔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맑고 깨끗한 그녀의 목소리가 잠깐 멍해졌던 육장봉을 현실로 되돌아오게 했다.

정신을 차린 육장봉은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를 깨닫고는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자신에게 혼군(昏君 -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이 될 자질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떻게 내기할 거요?”

일단 승낙한 이상,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한 승낙이라도 인정해야 했다.

“장군께서는 야율제가 명월산장에 없다고 하셨죠? 저는 그자가 나타난다는 것에 걸 거예요.”

야율제가 나타날지, 나타나지 않을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육장봉이 그녀와의 내기에 응했다는 것이었다.

“무엇을 걸 거요?”

육장봉은 냉정함을 되찾았다. 이제는 월령안의 말에 쉽게 대답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야율제가 명월산장에 나타나면 제가 이긴 거예요. 그러면 앞으로 육 대장군은 저를 보면 돌아서 피해 다니셔야 해요.”

월령안은 미소를 거두었다. 표정에는 소원함과 냉정함이 서려 있었다.

육장봉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대신 뚫어지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그자가 명월산장에 나타나지 않으면?”

월령안이 내놓은 조건이 그를 만족시킨다면, 그는 군대까지 동원할 수 있었다. 야율제를 영원히 사라지게 만들고, 영원히 명월산장에 나타나지 못하게 할 용의가 있었다.

“그러면 앞으로 육 대장군을 만나면 제가 돌아서 다닐게요. 절대 대장군한테 매달리지 않을게요.”

월령안은 한 글자, 한 글자 특별히 힘을 주어 말했다.

육장봉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기고 지는 거에 무슨 차이가 있소?”

‘월령안은 이렇게까지 나와 분명하게 선을 긋고 싶은 건가?’

“당연히 있죠! 육 대장군이 이기면 제가 대장군을 피해서 다니고, 더는 대장군 앞에 나타나지 않는 거잖아요. 그러면 대장군께서는 당신을 따라다니면서 괴롭히고 매달리는 골칫덩어리 전 부인을 쉽게 떨쳐 버릴 수 있잖아요. 얼마나 좋아요?”

그녀는 육장봉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 오늘 그가 사람들 앞에서 한 말은 일부러 오해하라고 한 것이 분명했다. 그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둘 사이가 깊다고 암시한 꼴이었다.

그녀는 육장봉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그와의 인연을 하루빨리 정리하고 싶을 뿐이었다.

육장봉이 말했다.

“내가 져서, 내가 당신을 피해 다니면 세상 사람들은 내가 당신을 싫어한다고 여기겠지. 그러면 효과가 더 좋지 않겠소?”

‘월령안은 이렇게까지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건가? 스스로 명성을 훼손하면서까지?’

“장군 말씀이 맞네요. 그럼 내기하는 건가요?”

월령안은 육장봉이 불쾌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그냥 그의 대답만 얻으면 되었다.

육장봉이 대답하기만 하면, 마주치더라도 모른 척하고 더는 얽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가 남들이 오해하게 만들려고 해도, 그럴 기회가 없을 것이다.

월령안의 마음은 내기에서 가감 없이 다 드러났다. 그녀는 그에게서 벗어나고, 멀리하고 싶어 했다. 그와 아무 관계도 없기를 절실히 바랐다.

육장봉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여인의 마음은 알 수가 없군.’

한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슬픔과 분노에 싸여 그를 가로막고 처도 맞아들이지 마라, 다른 여인과 관계도 맺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그를 떨쳐 버리고, 멀리하려 했다.

“당신은 이렇게까지…….”

육장봉은 월령안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 월령안은 알아들을 수가 없어 머리를 그에게로 기울였다.

그녀의 몸짓을 따라 배꽃 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 육장봉은 자기도 모르게 그 향을 들이마셨다. 그는 마음속에 이는 물결을 가다듬고, 입꼬리를 올려 가볍게 웃었다.

“나는 늘 도전을 좋아하오.”

도발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버리려고 하다니. 월령안은 그가 정말 만만해 보이는 걸까.

“그래서요?”

월령안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어떤 어려움도 두렵지 않소.”

육장봉이 말을 덧붙였다.

월령안은 눈을 깜빡였다.

“장군의 뜻은 어떤가요?”

그녀는 그가 완곡하게 거절하는가 싶었다.

육장봉이 대답했다.

“나는 여인을 상대로 이득을 챙길 생각은 없소.”

그리고 그녀는 골칫덩어리가 아니었다.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아닐 것이다.

월령안은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딱딱하게 말했다.

“그럼 대장군께 대단히 감사를 드려야겠네요.”

‘내기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지. 이렇게 빙빙 돌려 말하면 뭐 재미있나?’

“도박을 하는 건 좋은 습관이 아니오.”

육장봉은 월령안의 부드러워 보이는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손을 내밀어 어루만지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앞으로는 남과 쉽게 내기를 하지 마시오. 이기면 좋지만, 지면 번거로움이 적지 않게 생기잖소.”

“장군의 가르침 참 고맙습니다.”

월령안은 입꼬리를 올려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육장봉도 화를 내지 않았다. 냉담하고 딱딱하게 말했다.

“돌아가시오. 사람들이 오래 기다렸으니.”

두 사람이 동시에 이렇게 오랫동안 사라졌으니, 효과는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월령안은 거절했다.

“장군께서 먼저 가세요. 저는 아직 할 일이 남았어요.”

육장봉은 얼굴빛이 금세 어두워졌다.

“월령안, 모험하지 마시오. 이미 북요에 국서를 보냈소. 며칠만 지나면 야율제도 더 이상은 활개를 치지 못할 것이오.”

월령안이 무얼 하려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는 그자가 활개 치는 걸 단 하루도 참을 수가 없어요. 저는 이미 청희 장공주에 의해 등에 상처를 입었어요. 이렇게는 못 보내요.”

월령안은 자기 등을 가리키며 차갑게 웃었다.

남이야 그녀 등의 상처를 모른다고 해도, 육 대장군은 직접 보고 친히 옷을 덮어 상처를 가려 주지 않았던가.

청희 장공주는 신분이 고귀하니 조그마한 트집만 잡아도 그녀를 때릴 수 있었다. 그럼 돈이 있는 그녀가, 야율제의 목숨을 돈으로 사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이제는 그 뿐만 아니라 영녕후부를 조금씩 끌어내려, 청희 장공주의 버팀목을 망가뜨릴 심산이었다.

“나한테 맡기시오. 일주일 내에 당신에게 만족할 만한 답을 주겠소.”

육장봉은 월령안의 백옥 같은 등에 얼마나 많은 핏자국이 남았는지, 얼마나 많은 멍이 들었는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모험하지 않기를 바랐다.

“제가 말했잖아요. 전 하루도 참을 수가 없다고요. 사람 마음을 가지고 노는 자는 결국 남의 손에 놀아나게 될 거예요. 전 청희 장공주가 순천부 관아로부터 야율제의 사망 소식을 받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월령안은 유난히 환하게 웃었다. 햇빛 아래의 그 웃음은 육장봉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육장봉은 또다시 잠깐 넋을 잃었다. 이때 월령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군, 그럼 전 먼저 실례할게요.”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월령안이 뭐라고 했지? 내가 또 무언가를 승낙한 건가?’

육장봉은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상처투성이가 된 등을 꼿꼿이 편 채 점점 멀어져 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결국 저지하지는 않았다.

‘월령안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자.’

어쨌든, 하늘이 무너져도 그가 떠받치면 그만이었다.

“여봐라!”

육장봉은 순식간에 모든 미소를 거두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장군!”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모를 육일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바로 입궁하여 명월산장에서 일어난 일들을 폐하께 상세히 보고해라.”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 식구의 잘못을 감싸려 한다. 오늘 일이 명백하게 등요 공주의 잘못이라고 해도, 황제의 주관이 된다면 그는 월령안을 탓할 것이다. 그녀가 등요 공주와 겨루려 드는 바람에 등요 공주가 이성을 잃었다고 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늘 이치만으로 설득되지는 않는다.

“네, 장군.”

육일은 명령을 받들며 속으로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암일이 대장군에게 딱 걸린 것을 본 참이었다. 속으로 암일이 그들까지 팔아넘길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육일이 기뻐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그가 물러가려는 순간, 육 대장군의 냉담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너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말할지 잘 궁리해라. 네 변명을 기다리고 있겠다.”

육일은 바싹 굳어졌다. 곧 몸을 돌려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대답했다.

“네.”

“허!”

육일은 잘 숨긴 줄 알았다. 그러나 찰나의 굳어짐은 결국 육 대장군의 눈을 벗어나지 못했다.

육장봉은 모든 것을 알아차린 듯 냉소를 지었다.

육일은 고개도 들지 못했다. 쉭,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서 사라졌다.

육장봉은 한 손으로 뒷짐을 지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새하얀 배꽃이 바람에 실려 한가득 날아왔다.

육장봉이 손을 내밀자, 꽃잎은 그의 손에 내려앉았다. 이윽고 바람이 불자, 또다시 하늘거리며 날아갔다.

육장봉은 가볍게 웃으며 슬쩍 다시 꽃잎을 움켜쥐었다. 손을 펴서 손바닥에 고분고분 내려앉은 꽃잎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늘 이렇게 가만있지를 못하지.”

육장봉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그의 손바닥에 고분고분 붙어 있던 꽃잎은 또다시 바람결에 날아가 버렸다.

* * *

월령안은 육장봉과 헤어진 뒤, 혼자 천궁각의 장치를 시험해 보았던 뜰로 갔다.

공숙무의 제자 소갑이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월령안이 빛을 등지고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는 눈을 반짝였다.

“월 낭자, 그 옷을 입으신 채로 저희 천궁각의 장치를 시현하시면 아주 잘 어울리겠어요. 틀림없이 낭자가 이번 춘일연에서 가장 아름다우실 거예요. 낭자가 화신이 되지 못해도, 화신보다 더 빛나실 거예요.”

“오늘 제 목적은 오로지 화신이 되는 것뿐이에요. 다른 건 필요 없어요.”

그녀는 온몸에 상처를 입으면서 왔다. 만약 화신의 칭호를 받지 못해 소씨 가문과 하씨 가문이 가산을 탕진하게 만들지 못하게 된다면 얻는 것 없이 너무 큰 손해를 보게 된다.

소갑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존심을 세우지 않고 바로 말을 바꾸었다.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월 낭자는 오늘 틀림없이 화신이 될 거예요.”

“이제야 맞는 말을 하는군요!”

월령안도 함께 웃었다. 슬쩍 훑어보고 소갑에게 물었다.

“사부는요?”

“휴, 사부는 아침에 공숙의 형에게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몸져누웠어요.”

소갑은 만면에 띄고 있던 미소를 거두고 탄식했다.

공숙의에게 일이 생겼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둘 다 알고 있었다.

그의 사부는 공숙의의 사부이기도 했다. 공숙의가 천궁각에 이렇게 큰 화를 불러왔으니, 사부가 조급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신네 소각주가 오면 좋아질 거예요.”

월령안은 소갑을 위로하지 않았다.

천궁각에서 그런 큰일에 개입했으니,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처세를 잘 한다면, 천궁각의 기반까지 뒤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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