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지나가던 길이오
“월령안, 뭘 꾸물거리고 있느냐? 어서 날 풀어 주지 않고!”
장군왕 세자는 월령안이 한참이 지나도록 자신을 풀어 주지 않자 크게 소리를 질렀다.
“무슨 수작을 부릴 생각은 하지도 마. 나는 장군왕 세자다. 만약 내게 일이 생기면 우리 아버지가 진상을 파헤쳐 단 한 놈도 놓치지 않을 거다.”
그렇게 말하던 중 문득 몸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조홍후는 몸의 이상이 최음향 때문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이거 진짜 월령안이 짠 판은 아니겠지? 설마 월령안이 내 몸을 노리는 건가?’
월령안은 위험에서 빠져나왔는데도 한참이 지나도록 그를 풀어 주지 않았다. 게다가 몸에 이상함까지 느껴졌다. 그는 정말로 다급해져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빨리, 빨리 나를 풀어 줘라! 빨리 구해 달란 말이다!”
‘내 몸을 더럽힐 수는 없어! 십여 년간 지켜 온 몸이야. 그러기 쉬운 줄 알아?’
“월령안……!”
마침내 장군왕 세자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월령안의 이름을 불러 댔다.
월령안은 향로를 꺼 버린 뒤, 다른 곳에 또 함정이 없는지를 찾아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장군왕 세자의 처절한 울부짖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몸을 돌려 퉁명스럽게 말했다.
“소리는 왜 치세요?”
“나 괴롭다고!”
장군왕 세자는 불쌍하게 소리쳤다. 두 눈이 빨개졌고, 뺨에도 비정상적인 홍조가 어려 있었다.
“고작 최음제인데요. 죽지는 않아요. 참으세요.”
월령안은 물 주전자를 들고 장군왕 세자 앞으로 걸어갔다. 주전자 뚜껑을 열고 장군왕 세자의 얼굴에 물을 부으려고 손을 반쯤 올린 찰나, 무슨 생각이 났는지 동작을 멈추었다.
“너, 너 지금 뭐 하려는 거냐?”
장군왕 세자는 깜짝 놀라 흠칫 몸을 떨었다.
‘월령안이 지금 날 데리고 놀기 전에 씻기려는 건가?’
월령안은 그를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손으로 주전자 온도를 재어 보더니 물 주전자를 한쪽으로 밀어냈다.
“물이 뜨겁네요. 붓지 말아야겠어요.”
“나, 난 참을 수 있다. 나한테 뜨거운 물은 붓지 마.”
장군왕 세자의 온몸이 긴장했다. 그는 살고자 하는 욕구에 불타올라 말했다.
“상관없어요. 세자께서 참지 못하시면, 제가 불구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요.”
월령안은 손에 든 비도로 공중을 그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장군왕 세자의 중요한 곳을 노리고 있었다.
장군왕 세자는 신속하게 두 다리를 단단히 붙였다.
“아니다. 난 참을 수 있어. 암. 나를 믿거라.”
“그러지요.”
월령안은 그렇게 대답하고 장군왕 세자의 뒤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묶은 밧줄을 칼로 그었다.
쿵!
밧줄의 속박에서 벗어난 장군왕 세자는 다리의 힘이 풀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월령안은 그를 부축하지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장군왕 세자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신음했다.
“워, 월령안, 괴롭다…….”
“저쪽에 여자 둘이 있습니다. 마음에 드는 쪽으로 데려다 드리지요.”
월령안은 등요 공주와 그녀의 시녀를 가리켰다.
장군왕 세자는 몸이 굳어졌다.
“그냥 나를 기절시켜라.”
차라리 월령안에게 순결을 잃는 편이 나았다. 월령안은 집으로 맞아들여도 밑지지는 않을 테니까.
“호위하는 사람은 없나요? 제가 불러올까요, 아니면 사람을 시켜 댁으로 모셔다드릴까요?”
월령안은 다시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여전히 야율제의 그림자도 찾지 못했다. 역시 야율제는 참을성이 있군.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야율제가 오늘 반드시 나타날 거라고 짐작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녀의 오산인 모양이다.
“내 수하들이 보이지 않는구나. 네가…… 네가 사람을 시켜 나를 집에 데려다주면 안 되겠느냐?”
장군왕 세자는 온몸이 달아올랐다. 눈빛도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아직 또렷했고, 자신의 처지를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은 자신의 수하도 믿을 수가 없었다. 오직 월령안만 믿을 수 있었다.
등요 공주가 오늘 이렇게 월령안을 해코지했음에도 월령안의 신분으로는 등요 공주에게 보복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의 아버지는 장군왕이었다.
등요 공주는 그를 납치하고 죄를 뒤집어씌워 해치려 했을 뿐만 아니라 죽이려고까지 했다. 만약 황궁에서 등요 공주를 감싸려 한다면, 그의 아버지는 황궁의 대문도 망가뜨릴 수 있었다.
월령안이 그를 집에 데려다주면, 장군왕부에서는 그녀에게 신세 졌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 둘 것이다.
“알겠어요.”
‘아무렴. 좋은 일을 하려면 끝까지 해야겠지.’
월령안은 손가락을 딱 튕기고는 공중에 대고 말했다.
“장군부의 암위, 나오세요!”
암일은 잠깐 멈칫했지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평소에 고자질은 그렇게 적극적으로 하더니, 왜요? 일 좀 시킬 것 같으니까 제 말은 안 듣겠다는 건가요?”
‘어두운 데 숨어서 나오지 않고 없는 척하면,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어림도 없지.’
그녀는 육장봉이 보낸 사람을 손보려고 진작 벼르고 있었다. 줄곧 기회를 찾지 못했을 뿐이다.
“월…… 낭자.”
암일은 울며 겨자 먹기로 나타나서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월령안이 비웃었다.
“장군부의 암위에게는 정탐꾼이라는 직책도 있잖아요. 예전에 제가 장군께 쓴 편지도 당신들이 꺼내 봤겠죠?”
암일은 온몸이 굳어 버려 꼼짝달싹 못 했다. 감히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장군이 조만간 이 일을 알아채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군이 알기도 전에 월 낭자가 먼저 알아챌 줄이야.
“보아하니 진짜 꺼내서 본 모양이네요. 그럼 여러분께 감사를 드려야겠어요. 그래도 제가 쓴 편지를 본 사람이 있으니 말이에요.”
월령안은 자신이 보낸 편지를 육장봉이 결코 보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했다. 육 대장군이 어떤 사람인가.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시간을 허비할 리가 있겠는가.
“월 낭자, 소인은 명령대로 일을 처리했을 뿐입니다.”
‘장군, 죄송합니다. 저는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월령안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을 뿐, 지나간 일을 가지고 실랑이하지는 않았다.
지나간 일은 넘겨야 한다. 육장봉이 명월산장을 가지고 그녀의 속을 뒤집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삼 년 동안 장군부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 입에 담고 싶지도 않았다.
“세자 전하를 장군왕부에 데려다주세요. 등요 공주는…… 세자, 데리고 가실 건가요?”
월령안이 물었다.
“데려가야지. 공주를 묶어라!”
장군왕 세자가 등요 공주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사나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세자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지요.”
월령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휙 돌려 암일에게 사납게 말했다.
“세자께서 하신 말씀 못 들었어요? 빨리 움직여요.”
“네, 월 낭자.”
암일은 울고 싶었지만, 얼굴을 굳히고 앞으로 나아가 장군왕 세자를 묶었던 밧줄을 주웠다. 그다음 등요 공주 옆으로 가서 그녀를 묶은 뒤, 죽은 돼지를 짊어지듯 어깨에 둘러메었다.
등요 공주를 둘러멘 다음, 암일은 장군왕 세자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세자 전하. 소인이 업을까요, 아니면 스스로 걸으실 겁니까?”
“나는…… 내 발로 가겠다!”
장군왕 세자는 암위의 어깨에 걸쳐져 있는 등요 공주를 보자, 억지로 기어 일어났다. 그녀는 머리가 아래로 향하는 바람에 목매달아 죽은 귀신 같은 꼬락서니였다.
월령안은 손에 들고 있던 비도를 장군왕 세자에게 쥐여 주었다.
“이걸 드리겠습니다. 정 참지 못하겠으면 허벅지를 그으세요. 허벅지에는 살이 많으니까, 살짝 그으면 죽지 않을 거예요.”
“필요 없다. 날 건드리지 마라. 네게 능욕당하지는 않을 거다!”
장군왕 세자는 차가운 비도를 쥐고 흠칫 떨더니, 월령안을 사납게 쏘아보았다. 사실은 그저 울고만 싶었다.
‘이 여자는 지금 나를 건드리면 안 되는 걸 모르나?’
“제가 세자의 순결을 더럽히려는 것처럼 굴지 마세요. 전 세자께 관심이 전혀 없단 말이에요.”
월령안은 싫은 티를 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세자, 제가 업겠습니다.”
그제야 암일은 장군왕 세자의 상태가 좋지 못한 걸 알아차렸다. 갑자기 장군왕 세자를 쳐서 기절시켰다. 그다음 그의 몸뚱이를 번쩍 들어올려 등요 공주의 위에 올려놓았다.
“월 낭자, 소인은 먼저 가겠습니다. 안전에 주의하십시오. 소인이 명월산장을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야율제의 그림자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거나, 아니면 대단히 잘 숨은 것 같습니다. 꼭 그자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암일은 두 사람을 짊어지고도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떠나기 전에 월령안에게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월 낭자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정말 두려웠다. 그랬다가는 또 돌아가서 새내기처럼 훈련해야 할 텐데,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당신네 장군이 있잖아요? 무슨 걱정을 해요?”
월령안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암일은 흠칫하더니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월령안을 한 번 보았다. 그다음에는 완전히 풀이 죽어 말했다.
“월 낭자, 소인은 먼저 가 보겠습니다.”
‘분명 나쁜 일은 다 같이 했는데 왜 매번 덤터기를 쓰는 건 나뿐이지?’
암일의 표정은 영원한 이별을 앞둔 듯 비장했다.
원래 그는 월령안이 대장군에게 보낸 편지를 훔쳐보았다는 사실을 월령안에게 들킨 게 가장 재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군왕 세자와 등요 공주를 둘러매고 나간 순간에야 깨달았다. 이 세상에 ‘가장’ 재수 없는 일이란 없었다. ‘더욱’ 재수 없는 일만 있을 뿐이다.
“자, 장군!”
암일은 다리가 후들거려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다.
‘장군께서 언제부터 와 계셨지? 월 낭자가 한 얘기를 다 들으셨나?
암일은 마음속으로 육 대장군이 아무것도 듣지 못했기를 몰래 기도했다. 그러나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육 대장군의 마귀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자세히 생각해 봐라. 네 해명을 기다리고 있겠다.”
육장봉은 말을 마치자마자, 암일의 곁을 지나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암일은 홀로 방 밖에 서서 하마터면 체면도 잊고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정말로, 나쁜 일은 다 같이 했는데 덤터기는 왜 나만 쓰는 거야? 불공평해!’
하지만 육장봉은 암일에게 슬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자, 육장봉은 방 안에 들어서기 직전 암일을 돌아보며 재촉했다.
“빨리 가서 처리하지 못할까!”
“네, 장군.”
암일은 울먹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장군왕 세자와 등요 공주를 짊어지고 나는 듯이 뛰어갔다.
퍽!
육 대장군은 방 안에 들어서며, 그를 가로막고 있는 거한을 발로 차서 날려 버렸다.
그자는 비참하게 비명을 지르며 공중으로 날아가더니 벽에 부딪혔다. 둔탁한 소리가 울리더니 땅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그는 입을 벌려 피를 토한 후, 다시 혼절하고 말았다.
“이게 무슨 냄새지?”
육장봉은 한 손으로 뒷짐을 지고 들어섰다. 방 안의 범상치 않은 냄새를 맡더니,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대장군께서는 어떻게 오셨나요?”
월령안은 한쪽에 서서 황금당 사람이 네 거한을 해결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육장봉이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 눈썹을 치켜세웠다.
“지나가던 길이오.”
육장봉은 담담하면서도 신중하게 말했다.
“명월산장은 그다지 넓지 않으니.”
“그것 참, 대단한 우연이네요.”
월령안은 피식 웃었다. 그래도 그의 말을 굳이 더 지적하지는 않았다.
육 대장군이 지나가는 길이라면 지나가는 길이었다. 육장봉이 거짓말한다는 증거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