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뒷감당은 생각해 보셨나요?
두 남매는 걸으면서 말하다 보니 최일이 한쪽에 서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최일은 그들을 냉소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조왕이 적지 않은 대가를 치르고 그를 춘일연에 보낸 이유는, 육 대장군을 감시하고 월령안의 접촉을 막으라는 것만은 아니었다.
소여방을 처리하고, 그의 명성을 실추시키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었다.
‘소여방이 전씨 가문 낭자를 맞아들이겠다고? 아마 다음 생에도 어림없을걸.’
멀어지는 소여방과 소함연의 뒷모습을 보며, 최일은 입꼬리를 올려 삐뚜름하게 웃었다.
* * *
전 낭자는 많은 사람 앞에서 유명미에게 체면을 깎였다. 그러나 화를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둘이서만 비밀스럽게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명미 언니, 월 낭자는 금이니, 바둑이니, 서예니, 그림이니 전부 못 하잖아요. 삼 년 전에는 요령을 피워서 화신이 됐어요. 오늘도 일부러 화려하게 입어 이목을 끌었고요. 그런데 왜 다들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좋아할까요?”
전 낭자는 특별한 감정을 섞지 않고, 순수하게 자신의 의문을 제기했다.
그녀는 학자 집안 출신이다 보니 월령안과는 전혀 접촉이 없었다. 다만 남에게서 삼 년 전 춘일연에 관한 일들을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학자 집안의 자제들은 요령을 피우고, 속임수를 쓰는 행위를 가장 싫어했다. 가문의 웃어른들에게는 월령안의 인상이 좋지 않다 보니, 자연히 전 낭자도 월령안을 싫어하게 되었다.
“속임수는 무슨? 삼 년 전에 남의 도움을 받으면 안 된다는 말을 누가 한 적이나 있어요? 그리고 언제부터 춘일연의 화신을 그런 교양으로 뽑았대요?”
춘일연이 열리기 전, 태후는 유명미의 어머니를 황궁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춘일연에서 유명미가 등요 공주와 경쟁해서는 안 된다고 암시했다.
이 사실을 떠올리자,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들 똑같은 사람인데 누가 누구보다 얼마나 더 귀하다고. 월령안은 그 잘난 분들처럼 아닌 척하지 않았을 뿐이잖아. 그 잘난 분들은 무슨 자격으로 월령안을 무시하는 걸까?’
월령안이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결국 자기의 능력으로 겨루었다. 부모나 출신으로 겨루지는 않았다.
전 낭자는 말문이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하, 하지만…… 월령안이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공평하지 않나요?”
“그럼 공평한 것은 뭔데요?”
유명미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그런 교양을 겨루면 공평한 거예요? 교양을 겨뤄야 한다는 건 누가 정한 건데요? 그럼 왜 금, 바둑, 서예, 그림만 겨루고 육예(六藝 – 군자의 교양으로 예법, 악무, 궁술, 마차 몰기, 서예, 산술을 가리킴) 같은 건 겨루지 않나요?”
“하지만 규칙이 그렇잖아요?”
전 낭자는 유명미의 말이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지만,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규칙은 누가 정했어요? 규칙을 정한 사람이 이런 규칙을 정한 건 자기들이 이런 걸 더 잘해서일 뿐이잖아요.”
유명미는 언짢아하며 말을 이어 갔다.
“전씨 가문에는 전 낭자 위로 다른 아가씨가 없어 춘일연에 대해서는 잘 몰랐나 보네요. 한 이 년 정도 참석하다 보면 춘일연도 특별할 게 없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좋지만은 않거든요.”
“언니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되네요. 하지만 우리가 교양을 겨루지 않으면 무얼 겨뤄요? 우리 같은 여인들이 배우는 게 다 그런 거잖아요?”
전 낭자는 나이가 많지 않았다. 막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조금 귀여워 보였다.
유명미는 그러한 그녀의 모습에 더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웃으며 이 화제를 마무리했다.
“됐어요. 이제 이런 얘기는 그만해요. 그냥 장난 같은 연회일 뿐이에요. 너무 마음에 둘 필요 없어요. 다만 소씨 남매는 좀 멀리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 남매는 이득 볼 궁리만 하는 사람들이라, 우리하고는 달라요.”
유명미는 소함연, 소여방 남매에 대한 혐오감을 전혀 감추지 않았다.
전 낭자는 석연치 않은 눈빛으로 근처에 있는 소씨 남매를 바라보았다. 곧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명미 언니 말을 들을게요.”
“착하기도 하지.”
유명미는 참지 못하고 전 낭자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령안이가 왜 어린아이들을 놀리는 걸 좋아하는지 알겠네요. 아이들이 애먹일 때는 애먹여도 착해지기 시작하면 아주 착하다니까.”
전 낭자는 잠깐 멍해 있다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씩씩거렸다.
“명미 언니, 저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제 얼굴을 꼬집어서는 안 된다고요.”
“놀라기는. 남이 아무렇지도 않게 한 두어 마디 말에 하마터면 휩쓸릴 뻔했잖아요. 그러니 아이가 아니고 뭐예요?”
유명미는 전 낭자의 뾰로통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삼 년 전에 월령안이 자신을 어르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월령안의 심정도 지금 내 심정과 같았을까? 나도 모르게 월령안처럼 되어 가잖아.’
“제가 언제요!”
전 낭자는 소씨 남매에게 속을 뻔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유명미에게 달려드는 시늉을 했다.
유명미도 장단을 맞추어 한발 앞서 달아났다. 두 낭자는 유화원에서 웃고 떠들며 재미있게 뛰놀았다.
* * *
그 시각, 월령안은 등요 공주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궁녀를 따라 등요 공주가 ‘술을 깨려고’ 갔던 방심원(芳心園)에 도착했다.
그러나 방심원에 들어서는 순간,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등요 공주의 궁녀가 그녀를 찾아왔을 때부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바로 그 이상한 낌새 때문에 온 것이니까.
월령안은 등요 공주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됨됨이도 대단히 악독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어느 정도로 어리석고 악독한지는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되었다.
“공주 마마, 지금 제정신입니까?”
월령안은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혼절한 상태로 기둥에 묶여 있는 장군왕 세자와 그 옆에 서 있는 거구의 사내 넷이 보였다.
등요 공주가 그녀에게 손을 쓰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장군왕 세자에게 손을 쓰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닐까.
‘게다가 이 방 안의 냄새는…….’
월령안은 몰래 훑어보더니 바로 알아차렸다.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됐다. 그렇지 않으면 등요 공주를 포함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가 봉변을 당할 판이었다.
“왜? 이제야 무서우냐?”
등요 공주는 얼굴의 두꺼운 분을 씻어 내고 뺨의 손자국과 이마의 멍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분노로 뒤틀린 채 말했다.
“내 얼굴을 똑똑히 보거라. 다 네놈들 때문이야. 감히 내 뺨을 치고도 빠져나가려고 해?”
“장군왕께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어요. 뒷감당은 생각해 보셨나요?”
월령안은 장군왕 세자가 등요 공주를 때린 걸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였더라도 똑같이 때렸을 것이다.
“무슨 뒷감당?”
등요 공주는 비웃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모두가 너처럼 비천한 줄 알아? 내가 저 자식을 죽이더라도 아무도 모를 거야. 그리고 장군왕이 알면 또 어쩌겠어? 나는 공주다. 감히 나더러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겠느냐?”
“무슨 일이든 저에게 화풀이하시지요. 장군왕 세자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세자를 놓아주시고 저를 마음대로 처리하세요.”
등요 공주는 말만 방자했지, 사실상 직접 장군왕부와 대적할 용기는 없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사람을 시켜 장군왕 세자를 기절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 월령안,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느냐? 네가 이 방 안에 들어온 이상, 도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
그녀는 거만하게 월령안을 흘겨보았다.
“월령안,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공주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죠?”
월령안은 슬쩍 훑어보았다. 방 안에는 거구의 사내 네 명을 제외하고 다른 남자는 없었다. 그녀는 떠보듯이 말했다.
“야율제가 준 자신감인가요?”
“너…… 야율제는 무슨, 난 모른다!”
등요 공주는 낯이 하얗게 질렸다. 바로 당황해하며 변명했다.
사람을 시켜 월령안과 장군왕 세자를 손보려고 한 것은 사적인 원한이었다. 어린 여자애가 철이 덜 들어서 그랬다고 둘러댈 수 있었다.
하지만 야율제와 엮이면 그것은 적과 내통한 사건이 되었다. 그녀가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 심각성은 잘 알고 있었다.
“청희 장공주가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여서 쉬운 사람 같죠? 하지만 공주나 저나 잘 알잖아요. 그분은 그렇게 친절하고 착한 분이 아니에요. 공주께서 청희 장공주를 설득해 많은 사람 앞에서 저를 가로막고 난처하게 만들었죠. 그러려고 분명 적지 않은 대가를 치렀을 거예요. 그 대가가 바로 야율제를 명월산장에 잠입시킨 것이겠죠?”
월령안은 느긋하게 앞으로 나갔다. 의자를 하나 끌어내더니 등요 공주의 맞은편에 앉았다.
예전이었다면 야율제를 떠올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육장봉이 청희 장공주와 야율제의 관계를 알려 주었기에, 이 일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너…… 죽여버리겠어.”
등요 공주의 얼굴에 흉악한 기색이 드러났다. 그녀는 거구의 사내 네 명을 삿대질하며 호통을 쳤다.
“멍하니 뭐 하는 것이냐? 어서 빨리 손을 쓰지 못할까? 이 여자는 너희 마음대로 가지고 놀아도 돼. 숨만 붙어 있으면 된다.”
“공주 마마, 세자는…….”
거한 넷은 죄다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손바닥을 비비며 아첨하는 표정으로 등요 공주를 바라보았다.
등요 공주는 턱을 살짝 쳐들더니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무얼 두려워하느냐. 내가 있느니라.”
“네, 공주.”
네 사람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방향을 바꾸어 월령안에게로 걸어갔다. 조급하고 음흉한 눈빛이었다.
월령안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냉정함과 침착함을 유지하며 다리를 꼬았다.
“소씨 가문에서 온 놈들이냐?”
“너, 너……!”
거한 넷은 걸음을 멈추었다. 얼굴에는 당황이 스쳐 지나갔다.
“무슨 허튼소리냐?”
“역시 그랬군.”
이게 바로 소함연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득의양양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정했던 이유였던 모양이다.
‘소함연은 이렇게 하면 나를 망칠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사내 넷에 최음제까지?’
이 일을 꾸민 것이 소함연인지 소 승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를 너무 얕보았다. 이들이 그녀에게 손대지 못할 건 둘째 치고, 설사 손을 댄다 해도 상관없었다.
죽더라도 소씨 가문을 끌어들여 함께 죽을 테니까.
“멍청하게 서서 뭐하는 것이냐! 어서 빨리 손을 쓰지 못할까!”
등요 공주는 약이 바싹 올랐다.
거한 넷은 서로 마주 보았다. 큰 결심이나 한 듯이 갑자기 월령안을 덮쳤다.
바로 그 순간, 월령안이 손목을 움직였다.
쉭, 하는 소리가 나자, 그들은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내려다보니 땅바닥에는 푸른 빛을 뿜는 가느다란 침이 일렬로 꽂혀 있었다.
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가느다란 침이 몸에 꽂혔다면 바로 끝장이 났을 거라는 것쯤은 상상할 수 있었다.
거한 네 명이 그 자리에 굳어진 채 월령안을 경계하며 바라보았다.
월령안은 가볍게 피식 웃었다. 비웃음이 가득한 눈길로 그들을 훑어보더니, 여유롭게 말했다.
“어쩐지 공주께서 장군왕부를 두려워하시지 않는다고 했어요. 누명을 뒤집어쓸 사람이 다 있었던 거로군요. 그런데 소함연이 이걸 아는지는 모르겠네요?”
“공주 마마?”
거한들의 낯빛이 금세 변했다. 그들은 주저하며 등요 공주를 바라보았다.
‘이 일이 계획대로 안 풀리면, 결국 죄는 누가 뒤집어쓰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