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월령안처럼 살고 싶어
월령안은 정 낭자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낭자들은 집에 금산, 은산은 없더라도 아주 귀하게 자라났다. 먹는 것, 입을 것 걱정 없이 편히 살아와서 자존심도 강했다. 아무리 그래도 신분을 내려놓고 상인 집안 여인의 환심을 사려고 애쓸 일은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말이다.
월령안은 정 낭자가 사람 사이에 끼어들고 싶어서 핑계를 댔다고 여겼다. 그녀는 정 낭자에게 좋은 인상을 느꼈다. 월령안의 농담에 기분 나빠할 정도로 정 낭자가 옹졸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 낭자의 말을 듣고도 농담하듯 웃으며 승낙했다. 이 화제를 이용해 정 낭자를 사람들과 어울리게 해 주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 낭자는 진지했다.
그녀는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빨개진 얼굴로 월령안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월 낭자, 저희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서 예쁘다고 칭찬받는 것을 싫어하는 여인은 없대요. 월 낭자도 그런가요?”
“낭자 어머님께서 하신 말씀이 맞아요. 칭찬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죠.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월령안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정 낭자의 두 볼이 발그스름해졌다. 얼굴에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서인지 긴장하고 쑥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그녀는 고개를 들고 월령안을 똑바로 바라보려고 애쓰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월 낭자, 저는 낭자를 기쁘게 하려고 칭찬하는 게 아니에요. 진심으로 낭자가 예쁘다고 생각해요. 얼굴도 예쁠 뿐만 아니라 말과 행동도 예뻐요. 전, 전 낭자가 아주 부러워요. 낭자처럼 살고 싶어요.”
그렇다. 관리 집안 출신인 정 낭자가 상인 집안 여인인 월령안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옆 사람들이 보기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월령안이 부러웠다.
월령안은 언제든지 원하기만 한다면 사람들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일 처리도 확실하고, 예상 밖의 일이 벌어져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웃으면서 해결할 수 있었다.
또 누구와도 친해지고, 그 어떤 장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월령안이 부러웠다. 자신도 월령안처럼 당당함을 뽐내며 마음껏 살고 싶었다. 항상 남들 뒤에 웅크려 있고, 말도 꺼내지 못하고, 나서지도 못하고 누가 주목할까 두려워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월령안이 부러워. 월령안처럼 살고 싶어…….’
월령안은 정 낭자가 이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웃으며 말했다.
“저를 부러워할 게 뭐가 있다고 그러세요. 전 정 낭자가 부러운걸요. 전 지금의 모습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요.”
월령안은 농담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이 진심임은 그녀만 알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십 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부모님과 오라버니와 함께 살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직접 마셔봐야 뜨거운 물인지, 차가운 물인지 안다잖아요.”
옆에 서 있던 유명미가 월령안과 정 낭자의 말을 듣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삶을 부러워했다. 하지만 얼마나 답답하게 사는지는 자신만 알고 있었다. 그녀도 월령안처럼 상업계를 누비며 거리낌 없이 마음껏 살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유명미는 정 낭자의 말을 이해했다. 왜냐하면, 그녀도 월령안처럼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월령안은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사람의 상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네요. 사실 우리가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잘사는 것만은 아닌데, 우리는…….”
말을 하던 월령안은 분위기가 무거워진 것을 보고 바로 뒷말을 삼켰다. 그리고 홀가분하게 말했다.
“물론, 우리가 남들 생각만큼 나쁘게 사는 것도 아니죠. 우리는 각자 자기 인생을 잘 살면 되죠. 다른 사람을 부러워할 것 없어요. 또 다른 사람의 부러움도 필요하지 않고요.”
“맞아요.”
“월 낭자, 그 말이 딱 맞아요.”
나이가 어린 아가씨 몇몇은 좋다고 했다. 유명미는 사색에 잠겼다.
그러나 소함연은 여전히 말을 하지 않고 독사처럼 옆에 도사리고 있었다. 아무리 애써 감춘다고 해도 눈에 담긴 오만함과 조롱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소함연은 무슨 일을 벌인 거지?’
월령안은 소함연 쪽을 힐끔 보더니, 속으로 경계하기 시작했다.
정 낭자는 뜻밖에도 자기 말에 남들이 맞장구를 쳐 주자, 순간 긴장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월령안이 활짝 웃는 모습을 보자, 정 낭자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월 낭자, 지금 기분이 조금 좋아졌어요?”
정 낭자는 말을 마치고 다시 손을 휘휘 내저으며 변명했다.
“월 낭자, 많이 즐거울 필요도 없어요. 아주 조금만 즐거워도 돼요. 전 금산을 갖고 싶은 게 아니에요. 은산도 필요 없고요…….”
“전 지금 기분이 아주 좋아요.”
월령안은 정 낭자가 뭘 하려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몸집은 거대해도 쑥스러움을 타는 어린 소녀에게 선의를 베푸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그럼 제가 작은 부탁을 하나 해도 될까요?”
정 낭자는 월령안이 거절할까 두려워 간절한 손짓까지 곁들이며 말했다.
“아주아주 작은 거예요.”
월령안은 육십이를 제외하고, 정 낭자처럼 순수한 사람은 좀처럼 보지 못했다. 그녀는 순수한 사람에게 참으로 물렀다. 월령안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정 낭자, 마음껏 이야기하세요.”
정 낭자가 다른 사람의 비웃음도 무릅쓰고, 사람들 앞에서 그녀의 환심을 사겠다는 말을 했다. 그러니 정 낭자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정 낭자의 부탁이 그녀의 능력 범위 안에 있다면 다 들어줄 수 있었다.
“월 낭자, 낭자가…… 입은 치마가 너무 아름다워요. 저, 저한테도 같은 치마를 제가 입을 수 있도록 한 벌 만들어 줄 수 있어요?”
정 낭자의 얼굴은 잔뜩 붉어져 있었다. 그 말을 하느라 자신의 용기를 다 짜내다시피 했다.
그녀는 말을 마치자, 월령안이 입을 열기도 전에 또 서둘러 한마디 덧붙였다.
“제 몸집이 거대하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안 된다고 하셔도 괜찮아요. 월 낭자, 난감해하지 마세요. 전 단지, 단지 낭자가 입은 치마가 마음에 들어서 그랬어요. 낭자가 입으니까 너무 아름다워서요.”
여인이 얼굴도, 옷도 아름답다고 칭찬을 받는 것은 늘 기분 좋은 일이다. 월령안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웃음이 순식간에 더욱 환해졌다.
그녀는 시선을 돌리고 물었다.
“정 낭자, 혹시 의원에게 진료를 받을 생각은 없나요?”
“네? 진, 진료요?”
정 낭자는 월령안이 왜 갑자기 의원을 들먹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낭자들은 정 낭자가 못생긴 주제에 요구도 많다고 비웃으려던 찰나였다. 월령안의 말을 듣자, 다들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월 낭자, 정 낭자는 월 낭자의 옷을 가지고 싶다는데 갑자기 의원이라니요?”
월령안은 앞으로 다가가 정 낭자의 두 손을 잡고 말했다.
“정 낭자, 제가 아는 의원 하나가 그랬어요. 소녀가 갑자기 살이 찌고, 물만 마셔도 찌고, 어떻게 노력해도 빠지지 않는다면 그건 병이라고 했어요. 만약 괜찮으시다면 제가 그 의원을 소개해 줄까요?”
정 낭자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월령안이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알고 있어요. 아버지가 어의를 모셔서 진료를 받은 적이 있는데, 어의도 방법이 없대요.”
“네? 정 낭자가 이런 게…… 병 때문이었어요?”
“난 또, 정 낭자가 많이 먹고 게을러서 그런 줄 알았죠.”
“저도요, 저도 그랬어요……. 저희 어머니께서는 낭자와 놀지 말라고 몰래 당부했어요. 낭자 따라 많이 먹고 게을러진다고요.”
어린 낭자는 말을 마치고 나서야 어머니를 팔았다는 것을 깨닫고 장난스럽게 혀를 날름 내밀었다. 그리고 애교를 부리듯 정 낭자의 팔을 안고 말했다.
“정 낭자, 미안해요. 저희 어머니께서 일부러 그러신 건 아니에요. 저희 어머니께서는, 단지…….”
“괜찮아요, 괜찮아요. 제가 어렸을 때 몸이 허약해서 약을 이것저것 너무 많이 먹었어요. 어의 말로는 그것 때문에 제 몸이 이렇게 된 거래요. 저도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다 큰 뒤에는 물만 마셔도 살이 찌고, 어떻게 노력해도 살이 빠지지 않았어요.”
월령안이 사람들 앞에서 정 낭자가 살이 찐 사실을 꺼냈는데도, 다른 사람들은 싫어하기는커녕 오히려 좋게 받아들였다. 이럴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정 낭자는 순간 감정이 벅차올라 눈시울이 빨개졌다.
그녀는 다급히 사과하는 낭자를 다독이고, 또 살그머니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붉어진 눈시울에는 감격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는 정말, 정말 월 낭자가 너무 좋았다.
그녀에게 월 낭자는 세상에서 가장, 가장 좋은 사람이었다. 월 낭자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자리에 모인 아가씨는 모두 귀하게 자랐다. 세상 풍파를 별로 겪어보지 못해, 대부분 마음씨가 고왔다.
여태까지 정 낭자를 오해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들은 정 낭자의 주변에 모여들어 사과를 건넸다. 또 이런저런 말로 위로해 주었다.
그중 어떤 낭자는 자기 집에 몸매를 가꾸는 비법이 있다며, 집에서 훔쳐다가 정 낭자에게 주겠다고 살그머니 속삭이기도 했다.
월령안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감동한 정 낭자를 보고 웃었다.
소녀들의 환심을 사기는 늘 쉬웠다.
옷 한 벌, 장신구 하나, 칭찬하는 말 한마디, 친구 한 명에도 소녀들을 반나절이나 기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소녀가 아니었다. 이런 작은 일로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정 낭자는 여태까지 또래에게 이렇게 환영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너무 기쁜 것과 동시에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한편으로 이런 상황을 만들어 준 월령안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그녀는 항상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해도, 변경의 아가씨들은 그녀를 상대해 주지 않았고, 함께 놀려고도 하지 않았다. 결과는 늘 실망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제는 그녀에게도 친구가 생겼다. 앞으로 다시는 홀로 구석에 외롭게 앉아 있지 않아도 될 것이다.
“월 낭자, 감사해요. 낭자는 정말 너무 좋은 사람이에요.”
정 낭자는 옆에 있는 친구들과 두어 마디 이야기를 나눈 뒤, 발그레한 얼굴로 월령안에게 말했다.
그녀가 지금 얼굴이 붉어진 것은 흥분했기 때문이지, 긴장해서가 아니었다.
“정 낭자가 좋은 사람이라서 모두가 좋아하는 거예요.”
월령안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옷 한 벌, 장신구 하나로는 단순한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 얼굴에 활짝 핀 순수한 웃음은 좋아했다.
다른 사람의 웃음을 보면 그녀도 기분이 좋아졌다.
정 낭자는 쑥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기분이 아주 좋은 게 분명했다.
월령안은 정 낭자의 귀여운 표정을 보자 손이 근질거리는 것을 참지 못했다. 정 낭자의 하얗고 말랑거리는 얼굴을 살살 조물거렸다.
“저도 지금 아주 기뻐요. 옷은 침모들에게 만들라고 할 거고, 의원도 소개해 줄게요. 어떠세요?”
“네?”
이런 상황을 만들어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월령안은 바라던 옷도 지어 주고 의원을 소개해 준다고 말했다. 정 낭자는 믿기지 않아 눈을 동그랗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