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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223)화 (223/1,004)

223화 절 즐겁게 해 주려고요?

최일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대장군께서는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나는 이제 등요 공주를 보고 싶지 않네.”

조계안은 육장봉이 자신에게 빚을 지자, 등요 공주를 화신으로 뽑으라고 했다. 그러나 등요 공주가 춘일연에 아예 나타날 수가 없다면 어떨까.

“조왕 마마께서 화를 많이 내실 겁니다.”

최일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내 성격도 좋지는 않네.”

육장봉은 말을 마치고 한 걸음 내디뎠다. 바로 거리를 확 벌리더니 최일 혼자만 남겨 두고 떠났다.

최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청풍명월(淸風明月)처럼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보아하니 오늘은 남 좋은 일이나 하게 생겼구나.”

그가 졌다. 육장봉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 * *

육장봉이 연회에 참석한 공자들을 데리고 떠나간 뒤, 월령안은 주인다운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황궁에서 나온 궁녀에게는 등요 공주가 엎은 탁자를 정리하라고 했다. 등요 공주가 벌인 일이었기에 궁녀도 고분고분 지시를 따랐다. 동시에 그녀는 명월산장의 하인들에게는 낭자들에게 대접할 시원한 과일과 음료, 간식을 내오게 했다.

그리고 악사와 무희를 불러 금을 타고 춤을 추게 하여 분위기를 살렸다.

월령안도 별수 없었다. 등요 공주가 이런 소란을 벌이고 떠나자, 연회 분위기도 가라앉고 말았다. 그러니 사람들이 아까의 불쾌함을 내려놓고 다시 즐길 수 있도록, 더욱 신경을 써야 했다.

다행히 자리에 있는 아가씨들도 협조적이었다. 각자 웃고 떠들며 아까 벌어진 불쾌한 사건을 잊으려고 애썼다. 등요 공주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던 하급 관리의 여식들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등요 공주 이야기를 꺼내는 대신 옆 사람들과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녀들도 월령안의 체면을 봐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육 대장군이 아까 한 말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월령안에게 힘을 실어 주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육 대장군과 월령안이 무슨 사이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전까지는, 감히 그녀에게 더 밉보일 수는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송사가 바로 베갯머리 송사니까.

그녀들은 월령안에게 밉보이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육 대장군의 분노를 사는 것은 두려웠다.

그래서 마음속 생각이 어떻든지 간에, 다시 월령안을 대할 때는 모두 웃는 얼굴이었다. 심지어 먼저 나서서 월령안에게 말도 걸었다.

하지만 가장 궁금한 것은 역시 월령안과 육 장군 사이의 일이었다. 끝내 누군가 참지 못하고 떠보듯이 말을 꺼냈다.

“월 낭자, 낭자와 육 대장군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육 대장군께서 낭자를 대하는 태도가 보통이 아니던걸요?”

누군가 입을 열자, 다른 사람들도 쳐다보기 시작했다. 모두 월령안이 대답하기를 간절하게 기다렸다. 특히 그중에서도 소함연의 표정이 가장 이상했다.

월령안은 이렇게 묻는 사람이 나올 거라고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육장봉은 온갖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말을 던짐으로써 일부러 사람들이 오해하게 했다.

사람들이 육장봉에게 이런 것을 물어본다면 무시당하는 것은 물론이오, 화를 당하는 것까지 각오해야 했다. 반면 월령안과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통하니 궁금하면 그녀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거라 여기면서도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사람이란 원래 이렇게 모순적이다. 믿지도 않을 거면서 말해 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월령안은 그 낭자의 물음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단지 소함연의 표정이 의아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설마 소함연이 아직도 육장봉에게 미련을 가진 건가?’

하지만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소함연이 아까 지은 표정은 아주 이상했다. 마치 무슨 일을 애써 숨기려는 듯한 기색이었다. 게다가 남들을 높은 데서 내려다보는 듯한 오만함과 조롱을 띠고 있었다.

‘소함연이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지?’

“월 낭자, 우리에게 말해 줘요. 우리끼리만 알고 절대 소문내지 않을게요.”

맨 처음에 물은 낭자는 월령안이 비록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화도 내지 않자, 과감하게 애교를 섞어 말했다.

그녀는 예전에 미인방에서 월령안과 만난 적이 있었다. 월령안은 절대 화를 내지 않았고, 늘 웃는 얼굴로 모두에게 상냥하게 대했다. 또 자기들의 부탁을 절대 거절하지 않았다.

신분이니 뭐니를 떠나서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월령안을 무척 좋아했다.

월령안은 배려심이 넘쳤다. 항상 모두의 호감을 살 수 있었고, 그 누구도 냉대하지 않았다. 월령안이 있기만 하면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월령안은 그녀의 재촉을 듣자 바로 정신이 들었다. 더는 소함연을 바라보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저와 육 장군의 관계는 다들 알잖아요?”

“우리가 뭘 안다고요?”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니까요.”

“월 낭자, 알려 줘요. 절대 소문내지 않을게요.”

몇몇 아가씨들은 멍한 얼굴을 했다. 월령안은 짓궂게 그녀들을 놀리더니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혼한 부부죠. 모르셨어요?”

“아이참, 그건 예전 일이잖아요? 지금 육 장군께서 명월산장도 선물로 줬다면서요. 혹시 다시 합친 것은 아니에요?”

“맞아요, 맞아요. 아까 육 장군께서 낭자를 보는 시선이, 세상에…… 너무 부드러웠어요.”

“나는 육 장군이 그렇게 다정다감한 줄도 몰랐어요. 낭자가 언짢아하면서 자기가 번 것이라니까 육 장군께서 바로 그렇다고 하셨잖아요.”

“육 장군께서 낭자를 정말 아끼시나 봐요.”

월령안은 몇몇 아가씨의 설렘 가득한 말을 부정하지 않고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의 눈에 비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입으로는 웃으면서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육 장군께서는 온 성의 백성들 앞에서 삼 년 동안 혼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걸요.”

‘다정다감하고 아끼기는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일 뿐인데.’

“그건 다른 사람과 혼인하지 않겠다고 한 거죠. 낭자와 혼인하는 건…… 분명 괜찮을 거예요.”

몇몇 낭자가 재잘거렸다.

아무튼, 그녀들과 육 장군은 잘될 가능성이 없었다. 육 장군이 다른 여인과 잘되느니, 월령안과 계속 혼인한 상태인 게 나았다.

과거 그녀들의 어머니처럼 장군 부인 월령안을 따르다 보면, 연지분 값 정도는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그녀들의 어머니가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월령안이 이혼을 당한 뒤, 재산을 헐값에 자기네에 처분했다고 했다. 비록 이득을 보기는 했지만, 월령안이 더는 그녀들을 데리고 함께 돈을 벌지 않아 퍽 아쉽다고 했다.

“전 다시는 시집가지 않을 거예요.”

월령안은 마음속의 씁쓸함을 애써 감춘 채 환하게 웃었다.

그녀가 다시 시집갈 일은 없었다. 만약에 남편을 맞이한다고 하더라도, 데릴사위여야만 했다.

“뭐라고요? 시집가지 않겠다고요? 그럼 앞으로 혼자 살겠다는 건가요? 그럼 너무 처량하잖아요.”

“누가 시집가지 않으면 혼자 사는 거래요? 데릴사위를 들이면 되죠.”

“어? 그래도 되는 거였어요?”

몇몇 아가씨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안 되겠어요? 저는 재산도, 사업도 있고 한 가문의 가주이기도 한데, 데릴사위를 들이지 못할 이유가 있겠어요?”

청주에 가서 범씨 가문과 쟁탈전을 벌이지 않더라도, 황실을 위해 일을 하지 않더라도, 다시 시집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사람들이 말하는 가장 훌륭한 남자와 혼인했었다. 이제 더는 아쉬울 것이 없었다.

“하, 하지만…… 데릴사위로 들어온 남자가 얼마나 뛰어나겠어요? 좋은 집안의 공자 중에 데릴사위로 들어갈 사람이 있나요?”

아가씨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월령안을 설득하려고 했다. 동시에 월령안이 시집갈 생각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올해의 화신 자리를 두고 그녀들과 다투지 않을 것 아닌가.

이 자리에 있는 여인 중에서 신분이 가장 높은 사람은 등요 공주였다. 하지만 오늘 제일 빛난 사람은 월령안이였다.

월령안이 그들 중 가장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가장 시선을 끌었다. 월령안이 있는 한, 공자들의 눈에 다른 여인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어쩌면,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겠죠.”

월령안은 규방에만 갇혀 옷이 안 예쁘네, 장신구가 안 빛나네, 같은 것만 고민하는 아가씨들과 혼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데는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충 둘러대려 했다.

그런데 소함연이 불쑥 입을 열더니,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월 낭자가 아까 어느 남자든 자기를 즐겁게 해 준다면, 금산을 선물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잖아요. 여러분, 월 낭자 걱정은 하지 마세요. 금산을 위해 월 낭자의 환심을 사려고 애쓸 만한 좋은 남자는 분명 있을 테니까요.”

‘어머나…….’

소함연이 입을 열자, 나이가 어린 아가씨 몇몇은 모두 말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 하나같이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말은 어떻게 해석해도 이상하게만 들렸다.

“왜요? 제 말이 틀렸나요?”

소함연은 아무것도 못 본 듯,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월령안을 보는 시선은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다는 듯 교만하면서도 방자했다.

‘소함연, 이건 기억해 두겠어.’

월령안은 눈을 내리깔고 웃으며 말했다.

“소 낭자 말이 맞아요. 전 금산을 위해 절 평생 즐겁게 해 줄 좋은 남자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월, 월 낭자, 여인이 낭자를 즐겁게 해 줘도 금산을 선물해 줄 건가요?”

줄곧 사람들 밖에 서 있던 정 낭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정 낭자는 몸집이 거대하고, 무관 가문 출신이어서 항상 따돌림을 당했었다. 지금도 사람들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겨우 끼어들 기회를 찾아 조심스럽게 입을 연 것이었다.

월령안은 사람들 너머로 정 낭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농담처럼 대답했다.

“물론 되고말고요. 절 기쁘게만 해 준다면 남자든 여자든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정 낭자께서 절 즐겁게 해 주려고요?”

월령안은 정 낭자를 알고 있었다. 그날 미인방에서, 등요 공주가 갑자기 쳐들어와 월령안을 난처하게 했을 때, 정 낭자만이 그녀를 도와 상황을 원만하게 만들려고 했다.

월령안은 정 낭자에 대한 인상이 아주 좋았다. 이 낭자는 장점이 많은데도 단지 뚱뚱한 편이라는 이유로 줄곧 변경의 낭자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그리고 그에 대해 정 낭자 본인도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어떤 연회에 참석하든, 지금처럼 사람들 뒤에 숨어 자신을 감추려고 애썼다.

월령안은 정 낭자와 제대로 말을 나누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정 낭자가 먼저 입을 열었으니, 월령안도 그녀를 화제의 중심이 되게 돕고 싶었다.

* * *

월령안이 한창 아가씨들과 즐겁게 수다를 떨고 있을 무렵, 대숲을 너머에 앉아 있던 육장봉은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최일이 또 그의 귓가에서 속살거렸기 때문이다.

“장군의 전 부인께서는 참 대단하시군요. 공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해서 혼인하고 싶게 만들더니, 지금은 낭자들도 봐주지를 않네요. 저분이 원하는 게 데릴사위이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변경의 남녀들이 모두 저분을 두고 싸움이 날 판이로군요.”

육장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건 별로 기뻐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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