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222)화 (222/1,004)

222화 언제 선물로 줬다고?

아가씨들에게 등요 공주가 넘어질 뻔한 일은 이미 뒷전이었다. 그들은 월령안이 입은 치마의 매력을 알게 되자, 하나같이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월 낭자, 방금 너무 멋있지 않았어? 저것 봐, 공주 마마께서 굴욕을 당하지 않게 사뿐히 받았잖아.”

“월 낭자는 사실 아주 좋은 사람 아닐까? 아까 월 낭자가 나서지 않았다면, 공주 마마는 사람들 앞에서 넘어지셨을 거야. 저쪽에 공자들도 많은데 그런 추태를 보이기라도 했다가는…….”

“조용! 사람들이 오고 있어.”

“어?”

아가씨들은 그제야 대숲 너머에 있던 공자들이 그들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들의 맨 앞에 선 사람은 바로 육 대장군과 최일이었다.

“월 낭자는 참으로 아름답네. 얼굴뿐만이 아니라 마음씨는 더욱 고와! 등요 공주가 먼저 그렇게 괴롭혔는데, 도리어 등요 공주가 망신을 당하지 않게 도와주다니. 정말 착해.”

“난 드디어 첫눈에 반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네. 너무 아름다워! 월 낭자가 상인 집안 여인이라고 해도 아내로 맞이하고 싶네.”

“육 대장군이 잘 내치셨어! 그분이 내치지 않았더라면 우리에게는 기회가 없었을 거야!”

“나는 벼슬을 할 생각도 없었으니 잘 되었어. 어차피 혼인도 해야 하니, 집으로 돌아가면 어머니께 말씀드릴 거야. 어머니께 월씨 가문에 혼담을 꺼내 달라고 해야겠어.”

아가씨들과 마찬가지로, 육장봉과 최일의 뒤를 따라온 공자들도 월령안이 손을 뻗어 사람을 구하는 모습에 반하고 말았다. 심지어 앞서 월령안이 그들을 ‘노리개’ 취급을 한 일은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령안!”

유경장은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바람에 늦게 도착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한 채였다. 월령안이 등요 공주를 부축하는 모습을 보자, 그녀가 괴롭힘이라도 당할까 걱정되어 생각도 하지 않고 뛰어왔다.

그러나 그가 무리에 끼어들자마자, 육장봉이 먼저 다가가 차갑게 호통을 쳤다.

“등요 공주와 장군왕 세자가 술에 취하신 모양이다. 여봐라, 저분들을 부축하여 술을 깨게 해라.”

등요 공주는 육장봉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월령안을 홱 밀쳤다. 그리고 서러움이 묻어나는 연약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장봉 오라버니! 조홍후가…….”

하지만 육장봉은 그녀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딱 잘라버렸다.

“뭣들 하는 것이냐? 어서 부축해 가지 않고?”

“장봉 오라버니……!”

등요 공주는 화가 나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그녀를 동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인은 끌어내다시피 해서 그녀를 데리고 갔다.

등요 공주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잊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등요 공주가 장군왕 세자의 집안사람들 보고 전부 죽어버리라고 저주한 것을 똑똑히 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등요 공주가 장군왕 세자에게 얻어 맞았어도 그녀를 동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같은 상황이었어도 그런 말을 직접 들었다면, 죄를 각오하고서라도 똑같이 손을 썼을 것이기 때문이다.

등요 공주는 지나치게 교만하고 방자한 데다가, 머리마저 심하게 나빴다.

“내가 술이 과해 여러분의 기분을 망쳤군. 여기서 여러분께 사과하겠소.”

장군왕 세자는 화가 났지만, 상황 파악을 못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육장봉의 말을 따라 상황을 수습했다. 사람들에게 읍하며 사과한 뒤, 월령안에게도 읍하며 말했다.

“월 낭자, 아까는 감사했소. 번거롭겠지만 나를 도와 여러 낭자에게 드릴 선물을 준비해 주시오. 내가 낭자들께 사죄의 뜻으로 드리겠소.”

등요 공주가 정말로 크게 다쳤다면, 그에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하더라도 소용없었다. 이유가 어쨌든 등요 공주는 황실의 일원이기 때문이었다.

“세자 전하, 별말씀을요. 사소한 일이니 제게 맡겨 주십시오. 혹시 장군왕 전하께 서신을 전해 드리고 싶으시다면, 제 하인이 대신 다녀올 수 있습니다.”

월령안은 웃으며 승낙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장군왕 세자가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원인이 어찌 되었든 간에, 장군왕부의 세자가 명월산장을 잃은 것은 큰 죄였다. 이 일이 알려졌다가는 장군왕부의 사람들은 황제에게 크게 혼날 게 뻔했다.

그러나 등요 공주가 이렇게 소란을 피운 바람에, 장군왕 세자는 반대로 피해자가 되었다.

황제가 아무리 못마땅하더라도, 하사한 별장을 잃었다는 이유로 장군왕 세자를 훈계하기는 어려웠다.

“고맙네.”

장군왕 세자는 눈앞이 훤해졌다. 월령안의 암시를 알아들은 것이다.

월령안은 장군왕 세자와 이야기를 나눌 때 딱히 다른 사람을 등지고 있지 않았다. 남들은 둘의 알쏭달쏭한 대화를 듣고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최일은 바로 알아챘다.

최일은 눈을 반짝이며 옆에 있던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둘만 들을 수 있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대장군, 정말 월씨 가문의 금산을 볼 생각이 없습니까?”

‘월 낭자는 참으로 재미있는 사람이군.’

“최 자도(子都 - 최일의 자), 그 입 다물게!”

육장봉은 최일에게 경고하는 눈빛을 보냈다. 막 그 자리에서 떠나려는 순간, 누군가 말했다.

“세자, 명월산장을…… 정말 월 낭자에게 주셨습니까?”

육장봉은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질문한 사람은 세자를 향해 말했지만 장군왕 세자가 무언가 말을 하기도 전에 육장봉이 나서서 그 질문에 대답했다.

“명월산장은 내 재산이오. 내가 월령안에게 선물로 주었소. 왜? 무슨 이의가 있나?”

육장봉은 질문한 사람을 훑어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뭘 줬다고?”

“명월산장을 선물로 줬다고?”

“월령안에게 선물로 줬다고?”

“육 장군, 장군께서 명월산장을 월령안에게 선물로 줬다고요?”

그 자리에 있던 낭자와 공자들 모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신이 들은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둘이 도대체 무슨 사이야?’

‘육 장군은 월령안을 내쫓아 놓고 왜 또 황실 별장을 선물로 준 거지?’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이 말을 월령안이 했더라면 그들은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육장봉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무려 육 장군이 한 말이었다. 그는 입성하기도 전부터 이혼장을 월령안에게 보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월령안을 보기조차 싫어했던 그가 명월산장을 월령안에게 선물로 주다니. 여기에는 도대체 무슨 의도가 담겨 있는 걸까.

‘육 장군은 무엇을 하려는 거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연유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육장봉의 차가운 얼굴과 살신(殺神)이라는 위명이 마음이 걸렸다.

결국, 그들은 감히 묻지 못하고 육장봉을 멀뚱히 바라만 보았다. 그가 두어 마디 더 해 줘서 궁금증을 풀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육 대장군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가 사람들을 휙 둘러보자, 사람들은 그의 흉악한 눈빛에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육장봉은 사람들이 감히 자신을 쳐다보지 못하자, 그제야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왜? 이의라도 있나?”

“저는 이의 있습니다.”

정작 당사자인 월령안은 화가 났다.

“육 장군, 명월산장은 제가 직접 번 게 아닌가요? 언제 장군께서 선물한 게 됐죠?”

항상 월령안 쪽에서 육장봉에게 선물을 주었다. 언제 육장봉이 그녀에게 선물을 준 적이 있단 말인가.

‘몰염치한 인간 같으니!’

육장봉은 월령안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맞소, 당신이 번 것이지.”

그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말투며, 그 총애하는 눈빛이…….

공자들은 그나마 괜찮았다. 그러나 아가씨들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중 겁이 없는 사람이 놀라운 나머지 소리쳤다.

“육 장군, 월 낭자를 아주 많이 아끼시는군요.”

월령안은 어이가 없었다.

‘아끼기는 개뿔! 육장봉은 속이 시커먼 놈이야. 지금 연기를 하는 거라고!’

“맞소.”

육장봉은 가볍게 웃었다. 그 순간, 빙산이 녹은 듯했다. 그의 웃음에 봄이 와서 꽃이 피고 만물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육, 육 장군께서 날 보고 웃으셨어!”

그 아가씨의 두 볼이 빨개졌다. 눈을 반짝거리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 같았다.

그녀 옆의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똑같이 흥분해서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이게 바로 육 대장군의 매력이었다. 그가 원한다면, 변경의 모든 아가씨가 그의 아래에 엎드려 절하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월령안은 화가 나서 울화통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매섭게 육장봉을 쏘아보더니, 그와 더 말을 섞지도, 해명하지도 않았다. 단지 싸늘하게 말했을 뿐이다.

“대장군, 연회가 이미 시작되었어요. 여러분도 자리로 돌아가시죠?”

육장봉은 오늘 너무나 이상했다. 여기서 더 말을 했다가 더욱 해명하기 곤란해질까 봐 걱정되었다.

그녀는 지금 육장봉과는 조금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

“좋소.”

항상 차갑고 오만하며, 그 누구에게도 체면을 봐주지 않던 육 대장군이 오늘은 월령안의 체면을 충분히 봐주고 있었다.

육장봉이 굳이 쓸데없는 행동과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는 모두는 그와 월령안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유경장은 육장봉의 뒤에 서 있었다. 그는 육장봉을 바라보다가 또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의 기색이 역력했다.

마침 월령안이 그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경장과 눈이 마주치자, 월령안은 고개를 살그머니 저어 보였다. 괜찮다는 뜻이었다.

유경장이 본 월령안의 표정은 냉담했다. 육장봉의 말에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자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는 육장봉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오직 월령안만 신경 쓰였을 뿐이다.

월령안과 유경장이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육장봉도 그들을 보았다.

육장봉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는 몸을 돌리더니 유경장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가시오.”

육장봉의 장대한 체구가 유경장을 완전히 가로막았다. 유경장이 까치발을 하지 않는 한, 육장봉 뒤에 있는 월령안을 바라볼 수 없었다.

유경장도 명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급해도 남들 앞에서 그런 결례를 범할 수는 없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육장봉이 말을 하자, 한쪽에서 구경하던 공자들도 저마다 떠나갔다.

육장봉은 맨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최일은 느긋하게 육장봉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그를 향해 공수했다.

“원래 육 장군께서는 이런 분이셨군요. 소인은 감복했습니다.”

육장봉은 그를 힐끔 보고 말했다.

“최 대인, 내게는 자네와 등요를 혼인시킬 방법이 넘쳐나네.”

최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최씨 가문이 아무리 몰락했다지만, 그런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수는 없습니다.”

최씨 가문은 조씨 황조 이전인 선대 황조 시절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었다. 백 년 가까이 숨죽여 지내다가 겨우 원기를 회복한 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최씨 가문이 남들 손에 놀아나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최씨 가문이 다시 일어나기 위해 후대를 희생시킬 생각도 없었다.

최씨 가문은 이미 백 년을 기다렸다. 필요하다면 백 년을 더 기다릴 수도 있었다. 무리해서 황실과의 혼사를 추진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최씨 가문에서 공주와 혼인하겠다고 먼저 말을 꺼낸 것도 아니었다. 황실에서 공주를 최씨 가문에 시집보내고 싶어 했고, 최씨 가문에서는 거절하지 않았을 뿐이다.

최일은 오늘 등요 공주의 처신에 대단히 만족하고 있었다. 등요 공주의 이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라도 황제든, 태후든 최씨 가문에 그녀와 혼인하라는 말도 꺼내지 못할 것이다.

“최씨 가문에서 거절하더라도, 만약 최 대인과 등요 공주가 정을 통했다면?”

육장봉이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안도하던 최일이 긴장하며 되물었다.

“대장군, 설마 그 정도로 염치없지는 않으시겠죠?”

육장봉은 덤덤하게 말했다.

“나는 결과만 신경을 쓰지, 과정은 따지지 않네.”

그는 필요하다면, 최일을 희생시킬 수도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