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221)화 (221/1,004)

221화 공주 마마를 구하라

“지하실에 작년에 저장한 과일이 있었지? 해가 떴으니 얼음을 조금 깨다가 과일을 시원하게 만들어 올리거라.”

월령안은 완전히 주인다운 말투로 태연자약하게 하나하나 분부했다.

“술 창고에 복사꽃으로 빚은 도화양(桃花釀)도 있지? 가져와서 여기 계시는 낭자들께 올리거라. 또, 도화양이 입에 맞지 않는 분들은 과일즙을 대접하거라.”

“소인이 분부대로 준비하겠습니다.”

하인은 명령을 받들고 물러났다. 그의 자세는 아주 공손했다.

“네, 네가 정말…… 명월산장의 주인이란 말이냐?”

아가씨들은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멍해져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없어!”

등요 공주는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다.

“월령안, 명월산장은 황실의 별장이다. 네가 아무리 돈이 많다 해도 살 수 없어! 이건 분명 속임수야. 네가 돈을 들여 산장의 하인을 매수한 것이 틀림없어. 너와 함께 연기를 펼쳐서 네 체면을 세우려는 것, 맞지?”

등요 공주가 입을 열자 많은 하급 관리의 여식들이 바로 맞장구를 쳤다.

“월 낭자, 당신 정말 염치가 없네요. 체면을 세우려고 이런 거짓말까지 하다니.”

“난 당신이 상인 집안 출신이기는 해도, 삼 년 동안이나 일품 부인으로 지냈으니 조금이나마 품위가 생긴 줄 알았지. 설마…… 이런 사람일 줄이야. 정말 염치도 없네.”

“육 장군께서 전처가 이렇게 염치없는 사람인 것을 아신다면, 당신을 미리 내친 걸 다행으로 여기실 거예요. 댁 같은 사람이랑 혼인한 건 육 장군에게도 평생 지울 수 없는 수치일 거예요.”

몇몇 아가씨들이 입을 열어 월령안을 질책했다. 오직 등요 공주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만은 아니었다. 육장봉을 연모한 사람도 있었고, 상인 집안 출신인 월령안이 자기들을 압도하며 훌륭함을 뽐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녀들이 월령안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니, 고운 말이 나오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 * *

대숲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춘일연에 참석한 미혼의 공자들이었다.

숲 너머로 희미하게 여인들이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반인들은 듣기 힘들겠지만 육장봉의 귀에는 뚜렷하게 들렸다. 그리고 육장봉은 다른 이는 몰라도 최일만큼은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최일은 바로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싱글벙글 웃으며 육장봉에게 술잔을 쳐들었다.

“평생의 수치라고요?”

“술로도 자네 입을 막지 못하나?”

육장봉은 최일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최일은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술잔에 든 술을 다 마시더니, 옷소매를 가볍게 거두었다. 술 주전자를 들어 올리더니 육장봉의 잔을 채워 주었다.

“가서 도와주시지 않을 겁니까?”

“저들은 월령안의 적수가 안 돼.”

그에게도 지지 않는 월령안이 저런 멍청한 여인들에게 질 리가 없었다.

“장군 같은 분은…… 평생 혼자 살 팔자로군요!”

최일은 또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여인의 힘을 무시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또한 여인의 나약함도 무시하지 마세요. 아무리 강한 여인이라도 상처는 받습니다.”

“자네, 지금 나에게 훈계하고 있는 건가?”

육장봉은 술잔을 들고 호기롭게 입에 털어 넣었다.

“춘일연에 초대받은 사람은 모두 손님이니 신분의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혹시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지요?”

육장봉과 달리 최일은 술잔을 들고 천천히 음미했다. 똑같이 술을 마시는데 최일이 조금 더 우아한 모습이었다.

육장봉은 최일을 흘겨보고 비꼬듯이 말했다.

“서생들은 참으로 속이 깊군.”

“정말 도우러 가지 않으실 겁니까?”

최일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월령안에게는 필요 없네.”

육장봉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최일은 술잔을 내려놓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라도 가보겠습니다.”

그는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맞은편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걸음을 얼마 내딛기도 전에, 육장봉이 말했다.

“소문으로 들으니 최씨 가문에서는 자네가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기를 바란다더군. 그리되도록 내가 반드시 힘을 쓰겠네.”

최일은 발걸음을 멈추고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돌아와 앉았다.

“육 장군, 서로 싸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황실에서 결혼 적령기에 있는 공주는 등요 공주뿐이었다.

최일은 예전에 등요 공주가 아름답고 고귀하며, 교양을 두루 갖추어 소문을 들었다. 그는 그녀가 좋은 배필이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그녀를 직접 보니, 차라리 월령안과 혼인하고 싶었다. 출신이 고귀하지 않다는 점만 빼면, 월령안은 정말 좋은 아내감이었다.

육장봉은 차갑게 대꾸했다.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지 않다면 조용히 있는 것이 좋겠네.”

육장봉은 최씨 가문의 대공자가 듣던 것보다 말이 많다고 생각했다.

“대인이 명령을 내리시니 소인은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일은 진지하게 예를 올렸다.

“얼굴이 두껍고 속이 시커먼 것이, 최 대인은 관리들의 모범이 되겠군.”

육장봉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최일은 웃으며 대꾸했다.

“육 장군, 과찬이십니다. 황제 폐하의 마음에 드신 장군과 비할 바가 못 되지요.”

“술이나 마시게.”

육장봉은 술 주전자를 들어 최일 앞에 쿵, 하고 내려놓았다.

“취할 때까지 이 자리를 떠날 생각은 하지 말게. 이것도 상관의 명령이네!”

최일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 * *

한편, 하인은 월령안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재빠르게 탁자를 내오더니 등요 공주의 옆자리에 놓았다. 그리고 등요 공주의 탁자는 옆으로 옮겨 두었다.

등요 공주는 연회의 주최자이자, 공주였다. 신분이 남다르다 보니, 홀로 탁자 하나를 차지한 정도가 아니라 상석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녀의 자리만 보아도 격이 다른 게 확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월령안은 그녀와 함께 상석의 절반을 차지하고 앉으려 했다.

월령안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가 아직 앉지도 않았는데, 등요 공주는 화가 나 벌게진 눈을 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월령안을 가리키며 분노에 차 소리를 질렀다.

“월령안, 네가 감히!”

‘한낱 장사치가 감히 공주인 나와 같은 대우를 받으려고 하다니. 어디에서 저런 배짱이 나온 거지?’

“제가 감히 하지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명월산장은 지금 제 것입니다. 산장의 모든 것은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주인으로서, 제가 앉고 싶은 곳에 앉을 수 있습니다.”

월령안은 등요 공주의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고 바로 앉았다.

“등요 공주께서 저 같은 상인과 같은 자리에 앉기 싫으시다면…… 저쪽에 앉으시면 되겠네요.”

월령안은 손을 들어 맞은편의 연못을 가리켰다. 그리고 달콤하게 웃으며 말했다.

“공주 마마처럼 고귀한 손님을 처음 접대하다 보니 경험이 없어 어떻게 자리를 마련해 드려야 할지 몰랐습니다. 부디 너무 나무라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래도 이제 전례가 생겼으니 앞으로는 다들 공주를 초대하면 특별한 자리를 내드릴 겁니다. 그러면 마마의 고귀한 신분을 더욱 잘 드러낼 수 있겠지요.”

아가씨들은 월령안의 말을 듣고 웃고 싶어졌다. 하지만 여기가 어떤 장소인지를 기억하며 꾹 참아야 했다.

하지만 등요 공주는 참을 수 없었다.

등요 공주는 크게 화가 나서 눈앞에 있던 탁자를 발로 차서 엎어 버렸다. 그리고 분노에 못 이겨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거기 누구 없느냐? 장군왕부의 사람은 어디 있느냐? 모두 죽었느냐? 이제까지 알고도 나오지 않은 거면 그냥 죽어버리라 해! 명월산장은 도대체 누구의 것이냐? 당장 나와서 해명해라!”

장군왕 세자도 미혼이었다. 하여, 올해의 춘일연에 그도 참석한 참이었다.

그는 귀족 자제들과 어울려 담소를 나누느라, 여인들이 싸우는 데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등요 공주가 악을 쓰며 장군왕부의 사람들은 다 죽으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이 말을 들은 장군왕 세자는 화가 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뭐라고! 감히 우리 부모님더러 죽으라고 저주하는 거냐!”

장군왕 세자는 벌떡 일어나 아가씨들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군요.”

최일은 손에 든 술잔을 돌리며 속세를 벗어난 듯한 맑은 웃음을 지었다. 마치 인간 세계로 귀양 온 신선 같았다.

육장봉은 그를 힐끔 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아가씨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한편, 갑자기 여인들 사이로 쳐들어 온 장군왕 세자는 등요 공주 앞으로 달려가더니 손을 들어 따귀를 세게 내리쳤다.

철썩!

“네가…… 공주면 다 되는 줄 알아?! 우리 부모님이 너한테 무슨 죄라도 지었어? 어? 어떻게 감히 그분들을 죽으라고 저주해!”

장군왕 세자는 화가 나 씩씩거렸지만, 그나마 콩알만큼의 이성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짐승만도 못한 것’이라는 말은 꿀꺽 삼켰다.

등요 공주가 아무리 행실이 나빠도 황실 출신이었다. 만약 장군왕 세자가 등요 공주를 짐승이라고 한다면, 황제와 태후는 뭐가 되겠는가?

등요 공주를 때린 것은 작은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꼬투리를 잡히면 작은 일로 끝내기가 힘들어진다. 골치가 아파졌다.

장군왕 세자의 손길은 매서웠다. 등요 공주는 맞고서 한 걸음 휘청거렸다. 얼굴도 바로 부어올랐다.

“조홍후, 지금 날 쳤어?”

등요 공주는 따귀를 맞고 멍해졌다. 그녀는 얼굴을 붙잡고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장군왕 세자를 바라보았다.

“그래! 내가 널 때려죽이지 않은 걸 감사해야 할 거다.”

장군왕 세자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장군왕과 황제는 같은 핏줄이었고, 사이도 아주 좋았다. 그러니 장군왕 세자는 등요 공주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게다가 등요 공주가 욕을 한 게 먼저였다. 등요 공주의 신분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때리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장군왕부를 모욕하고 죽으라고 저주를 하는 것은 절대 보아 넘겨서는 안 될 일이었다.

“너, 네가…… 감히!”

등요 공주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가 장군왕 세자에게 으르렁거리며 덤벼들었다. 손을 뻗어 세자의 얼굴을 할퀴었다.

“조홍후, 너 미쳤어? 죽여 버릴 거야. 황제 오라버니께 말해서 너를 죽여 버리라고 할 거라고!”

“좋아! 가자! 황제 폐하께서 누구를 죽이실지 어디 보자고!”

장군왕 세자도 성질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등요 공주가 여자라고 봐주는 일이 없었다. 그녀가 덤벼들자, 반사적으로 힘껏 밀쳤다.

“꺅!”

등요 공주는 강한 힘에 떠밀려 발밑이 미끄러지자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옆의 탁자로 날아갔다.

말석에 있던 아가씨들은 등요 공주가 탁자 위로 쓰러질 것 같자, 다급히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먼저 행패를 부린 게 등요 공주라 하더라도 공주를 다치게 둘 수는 없었다. 탁자와 부딪쳤다간 크게 다칠 게 분명했다.

“앗, 고, 공주 마마!! 조심하세요!”

“세상에나! 공주 마마!”

“어서 공주 마마를 구해!”

월령안은 턱을 괴고 구경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변하자, 불쾌함을 억누르고 몸을 돌리면서 일어났다. 그리고 등요 공주가 넘어지려는 순간, 깔끔하게 그녀를 받아 냈다.

“조심하세요!”

월령안은 공주를 안은 채 몸을 돌렸다. 월령안이 받아 낸 덕분에 두 사람은 안전하게 착지했다.

월령안이 두 바퀴 빙그르르 돌자, 치마폭도 따라서 나풀거렸다. 움직임에 따라 치마에 장식된 꽃송이가 순간 활짝 피어나니, 온갖 꽃이 활짝 피어난 것처럼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월 낭자가 공주 마마를 받았어!”

“세상에! 너무 아름다워!”

“아아아! 나도 저 치마를 갖고 싶어. 저걸 입고 춤을 추면 아주 아름다울 거야!”

“너무 예쁘다. 어쩜 저리 고울까?”

“월 낭자, 다시 한 바퀴 돌아봐요. 아까 잘 보지 못했단 말이에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