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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220)화 (220/1,004)

220화 명월산장의 주인

월령안은 가장 뒤에 떨어져 있었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는 연회에 참석한 아가씨들이 순서대로 자리를 찾아 앉은 뒤였다.

공교롭게도 준비된 자리는 하나가 모자랐다. 아니, 월령안의 자리가 없다는 게 맞을 것이다.

월령안은 들어설 때부터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옆쪽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조용히 넘어가고 싶다고 해서, 등요 공주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등요 공주는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너희는 어떻게 준비한 것이냐? 월 낭자의 자리는?”

“공주 마마, 용서해 주십시오. 월 낭자의 출신이 그렇다 보니, 소인이 어디에 자리를 배치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이 자리에 계시는 분들은 모두 관리 집안의 규수들이십니다. 그러니 소인으로서는 도무지 어떻게 배치해야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등요 공주의 시녀는 아주 깔끔하게 무릎을 꿇고 사죄를 했다.

연회의 자리는 두 사람이 같이 앉게 되어 있었다. 자리마다 사이가 좋은 두 사람씩 앉았다. 오직 월령안만 혼자였다.

아가씨들은 궁녀의 말을 듣자, 다들 월령안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이 월령안을 딱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그저 나서서 월령안을 비웃지 않는 것에 그쳤을 뿐이다. 절대 월령안을 위해서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녀들이 상인 집안 여인과 가깝게 지내고, 자리에 함께 앉았다는 소문이 퍼지기라도 해 보라. 이유 없이 무시를 당하게 될 것은 물론, 혼사에도 영향이 갈 것이다.

월령안에게는 돈이 아주 중요했다. 하지만 그녀들 같은 귀족 아가씨들은 출신과 명성이 돈보다 훨씬 중요함을 잘 알고 있었다.

좋은 출신과 명성이 있어야만 대갓집에 시집갈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월령안 같은 상인 집안의 여인들은 그녀들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돈을 바쳐야 하는 처지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연회에서 손님을 초대해 놓고 손님의 자리를 준비하지 않은 것은 연회 주최자의 과실이었다.

월령안은 이런 일을 크게 벌이면 마지막에는 연회의 주인이 난감해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홀로 해결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등요 공주는 본인이 주인임에도, 망신당할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남들 앞에서 이 일을 들춰냈다.

등요 공주의 이 행동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려는 게 아님이 분명했다. 그저 월령안을 난감하게 만들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월령안은 한가운데에 홀로 서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음에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궁녀의 변명을 듣고도 생긋 웃으며 등요 공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올곧고 밝았다. 조금도 겁을 먹거나 불안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또 그 어떤 불만도 비추지 않았다. 마치 사람들 앞에서 비웃음을 당하고 고립된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듯 덤덤했다.

그러나 월령안의 이런 반응조차 등요 공주에게는 도발로 느껴졌다. 등요 공주는 얼굴을 굳히며 거만하게 말했다.

“역시 상인 집안 여인이라 그런지 낯짝이 두껍군.”

“소녀의 낯이 두꺼운가요?”

월령안이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공주 마마, 소녀의 낯은 그리 두껍지 않습니다. 한 번 만져 보시겠습니까?”

“이게…… 무엄하다!”

등요 공주는 순간 벌컥 화를 냈다.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월령안! 저게 지금 내가 얼굴에 분을 너무 많이 발랐다고 비웃는 건가?’

월령안은 웃음소리를 내더니, 등요 공주가 억지를 부리기 전에 말을 꺼냈다.

“공주 마마, 춘일연에 온 사람은 전부 공주 마마의 손님이 아닙니까. 주인으로서 절 춘일연에 초대하셨으면, 제 신분에 맞는 자리를 주셔야지 않겠습니까?”

월령안은 가끔 등요 공주의 머리를 열고, 안에 든 게 잡초인지, 찹쌀풀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녀에게 초대장을 보낸 건 등요 공주였다. 막상 왔더니 또 그녀의 신분이 안 된다고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다. 이건 도대체 누구의 체면이 깎일 일인가.

“너…….”

등요 공주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손님이 앉을 자리가 없다는 것은 주인이 제대로 접대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물론, 월령안도 춘일연에서 있었던 일이 소문 나면 나름 망신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등요 공주도 사람을 초대해 놓고 자리를 준비하지 않았다는 말이 새어 나간다면 그녀에게도 구설이 생길 것이다.

심지어 태후조차 등요 공주에게 불만을 가질 수 있었다. 태후는 춘일연을 통해서 공주가 위신을 세우고, 최씨 가문에 시집갈 수 있기를 바랐다. 최선의 결과는 최일과 혼인하는 것이었다.

공주는 최씨 가문에 시집가고 싶지 않았다. 최일과 혼인하는 것은 더욱 싫었다. 그러나 그녀가 거절하면 몰라도, 최씨 가문 쪽에서 거절해서는 안 됐다.

등요 공주의 눈에 당황한 기색에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연못 주변을 대충 손으로 가리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쪽에 앉아라!”

월령안은 돌도 하나 없는 연못 주변을 보고 똑같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공주 마마,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지요? 제가 아무리 상인 집안 출신이라고 해도, 마마께서 초대하신 손님이 아닙니까. 손님을 이렇게 접대하시는 것이 공주 마마의 방식입니까?”

월령안은 정말 등요 공주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이렇게 의미 없이 싸우는 것은 전혀 내키지 않았다.

어린 여자아이들처럼 따돌리고 괴롭히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소박맞은 경험이 있었다. 이 어린 아가씨들과 함께 미혼 소년들을 놓고 경쟁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등요 공주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적대하는 것은 참으로 생각 없는 짓이었다.

정말 그녀를 증오한다면, 공주의 신분을 이용해 죽이면 그만이었다. 이런 하찮은 수단을 쓰는 바람에 황실의 체면도 깎이고 있었다.

“너 같은 장사꾼은 앉을 자리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냐. 뭘 까다롭게 고르느냐.”

등요 공주가 입을 열 필요도 없었다. 공주의 환심을 사고 싶었던 하급 관리 집안의 여식이 나서서 대신 말을 해 주었다.

“왜? 공주 마마께서 네게 주신 자리가 마음에 안 든단 말이냐? 넌 명월산장이 어떤 곳인지 알기나 하느냐? 네가 들어와서 한 번 볼 수 있는 것도 지난 생에 쌓은 복이란다.”

소함연도 일어서서 나섰다.

“령…… 월 낭자, 아니면 내 자리는 어떠니? 난 날씬해서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 않아. 내 자리를 절반 나눠주마.”

“나는 장사꾼과 한자리에 앉고 싶지 않아. 만약 소문이라도 난다면…… 사람들이 우리가 일부러 자세를 낮추어 장사꾼과 어울린다고 생각할 거야.”

소함연과 같은 탁자 앞에 있던 아가씨가 눈을 흘기며 싫은 티를 냈다.

유명미는 입을 열고 싶었다. 그러나 황궁의 태후와 어머니도 월령안과 왕래하는 것을 싫어했다. 결국, 입만 벙긋거리다 참고 말았다.

태후는 원래 월령안을 싫어했다. 월령안이 유명미에게 나쁜 물을 들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가 또 월령안과 가까이 지낸다면, 태후가 월령안을 더욱 싫어할지도 몰랐다.

“월 낭자, 직접 보게. 나도 어쩔 수가 없군. 사람들이 다 너와 함께 앉고 싶어 하지 않는구나. 아쉬운 대로 좀 멀리 떨어져 앉아야겠구나?”

사람들이 입을 열어 맞장구를 쳐 주자, 등요 공주는 오늘 처음으로 미소를 떠올렸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지금 사람을 불러 탁자를 준비해 주마. 내가 처음으로 연회를 열다 보니 경험이 없었느니라. 너 같은 손님에게는 어떤 자리를 주어야 할지 미처 몰랐구나. 앞으로 누가 널 연회에 초대하면, 전례가 있으니 변두리에 탁자만 하나 마련하면 되겠구나. 이러면 다들 좋지 않은가?”

등요 공주 마마에게 아부하던 아가씨가 손뼉을 치며 좋다고 했다.

“공주 마마의 방법이 참으로 좋습니다. 앞으로 이렇게 하면 되겠어요. 월 낭자를 연회에 초대한다면 변두리에 작은 탁자 하나만 준비하면 되겠네요.”

월령안은 한숨이 나왔다.

그녀는 멍청이들과 따지고 드는 게 신분과 격조를 떨어트리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등요 공주 같은 멍청이와 얼굴을 맞대고 있으려니 너무나 화가 났다.

‘등요 공주는 외출할 때 머리를 두고 나오는 건가? 정말 내 성격이 만만한 줄 알고, 아무렇게나 주물럭거려도 된다고 여기는 건가?’

오늘 월령안이 이대로 참고 넘기면 변경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변경의 상류사회는 물론이고 상업계의 사람들조차 그녀를 깔볼 것이다.

상인들은 높은 것을 떠받들고 낮은 것을 짓밟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녀를 짓밟으려 한다면, 상업계에서도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되리라.

“월 낭자, 불만이라도 있는가?”

월령안이 대답하지 않자, 등요 공주의 눈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당당한 공주로서 이깟 장사치 하나 혼내 주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공주 마마, 생각이 지나치셨어요. 저는 도리어 마마께 감사드립니다.”

월령안은 손을 들어 등요 공주에게 읍했다. 그리고 등요 공주가 우쭐거리기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오늘 연회는 공주 마마께서 주최하셨지만, 마마께서도 손님으로 오셨지 않습니까. 주인 된 처지로 어찌 손님을 번거롭게 하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공주께서 연회를 여시는데 자리가 부족한 것도 주인으로서 저의 불찰입니다.”

“뭐, 뭐라고? 너 뭐라고 했어? 주인? 하!”

등요 공주는 어리둥절하더니 곧 웃음을 터뜨렸다.

“월령안, 아직 잠에서 덜 깬 모양이구나? 주인이라고? 주인이라고 말할 주제가 되기는 해? 네 개 같은 눈깔을 똑바로 뜨고 똑똑히 봐라. 여기는 네 집이 아니고 황실 별장인 명월산장이야! 저 연못 물에 네 얼굴이나 좀 비춰 보렴……. 네가 명월산장 주인이라고 할 자격이 되는지 말이다.”

아가씨들도 월령안의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곧 따라서 웃음을 터뜨렸다.

“터무니없이 허풍을 떨기는.”

“정말 낯가죽도 두껍지.”

“염치도 없어.”

“대장군께서 내쫓길 잘하셨네. 이런 여인이 대장군의 이름과 함께 거론된다면, 대장군의 망신인걸. 예전에 도대체 무슨 수를 썼기 육 노태군(老太君 – 태군은 과거 신하의 어머니에게 내리던 봉호. 여기에서는 육 노부인을 가리킴)의 눈에 들어 장군부에 시집갔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

“상스럽고 멍청하네.”

소함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가슴이 아프다는 듯이 말했다.

“월 낭자, 너도 참……. 아무리 이기고 싶어도 그렇지, 거짓말을 하면 어쩌니. 어서 공주 마마께 사과를 드리고 용서를 구하려무나.”

월령안은 아가씨들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그리고 차갑게 입을 열었다.

“제가 명월산장의 주인인지 아닌지는, 마마께서 사람을 찾아 물어보시면 되시겠네요.”

짝짝!

월령안은 손을 들고 박수를 두 번 쳤다.

“여봐라!”

등요 공주는 월령안이 사람들 앞에서 주인 행색을 하자 비웃으며 말했다.

“정말 네가 뭐라도…….”

하지만 등요 공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명월산장의 하인이 느릿느릿 다가왔다. 그는 월령안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하더니 겸손한 자세로 말했다.

“아가씨.”

그의 자세와 어조는 절대로 손님을 대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등요 공주가 손짓으로 무심결에 부른 사람이 바로 월령안이 명월산장으로 보낸 하인이었다.

월령안은 이미 두 번이나 왔었으니, 하인들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까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바로 손을 들고 분부를 했다.

“가서 탁자를 하나 내오거라. 자리는…… 등요 공주 마마의 옆자리에 두면 되겠구나. 어찌 되었건 나도 명월산장의 주인인데, 손님이 오셨으니 접대를 해야지 않겠느냐.”

“네, 아가씨.”

하인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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