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제게 금산을 주려나요?
“저런 분을 내치다니. 역시 육 대장군은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르셨군요.”
최일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그는 비록 월령안을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월령안은 외모만 아름다운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가 가진 재주가 미모보다 더욱 유명했다.
‘재능과 미모를 겸비한 아내인데 육장봉은 만족을 못 한다고? 저런 여인을 내쳤다고? 육장봉은 어떤 아내를 맞이하고 싶은 거지? 선녀로도 부족한가?’
육장봉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한편, 공자들이 월령안에게 흠모의 시선을 보내는 것과는 달리, 등요 공주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월령안을 보자, 얼굴에 바른 두터운 분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월령안을 죽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네 그 치마는 어디서 난 것이냐?”
등요 공주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청희 장공주에게 많은 대가를 약속하고 오랫동안 사정하고 나서야, 겨우 월령안을 막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또 월령안이 춘일연에서 입을 옷을 망가뜨려 그녀가 아름다운 차림새로 춘일연에 등장하지 못하게 하기로 했다.
하지만 결과는 어찌 되었는가.
등요 공주는 월령안의 옷이 망가진 것을 분명히 보았다. 심지어 등에는 상처도 입었다. 그런데 월령안이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원 상태를 회복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아까보다도 더욱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등요 공주, 또 뵙는군요. 성문 입구에서 헤어진 뒤로, 별일 없으셨는지요?”
월령안은 천천히 다가와 등요 공주에게 예를 올렸다.
“말이 나온 김에, 마마께 감사를 드려야겠어요. 마마께서 시위더러 제 옷을 망가뜨리게 하지 않으셨다면, 저도 이 아름다운 치마를 입지 못했을 겁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월령안의 저 차림새가 등요 공주와 연관이 있다는 거야?”
“나야 모르지.”
“하지만 월령안이 입은 치마는 정말 예뻐. 나도 한 번 입어 봤으면 좋겠네. 너무 예쁘잖아.”
“화신을 굳이 뽑을 필요가 있나? 저 차림새만으로도 월령안이 올해 화신이 되기엔 충분하겠는걸.”
아가씨들은 월령안의 차림새를 보자, 부럽기도 하고 시샘이 나기도 했다. 월령안이 하는 말을 듣더니 서로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네 이 옷은 어디서 난 것이냐? 염치없이 장…… 육 대장군에게서 얻어 낸 것은 아니겠지?”
등요 공주는 화가 나서 이성을 잃었다. 주먹을 꽉 움켜쥐자, 뚝, 하는 소리가 나며 손톱이 또 부러졌다. 하지만 분노가 너무 컸던 탓에 아픔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월령안이 몸에 걸치고 있는 이 치마를 그녀의 장봉 오라버니가 월령안을 위해 준비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 숨을 쉬지 못할 정도였다.
‘장봉 오라버니가 날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고, 나와 혼인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절대로 다른 사람을 좋아해서도, 아내로 맞이해서는 안 돼! 특히 월령안만큼은 절대 안 돼!’
“육 대장군이라고?”
“육 대장군과 무슨 상관인데? 육 대장군께서 월령안을 내치지 않으셨나? 설마 월령안이 또 육 대장군께 매달리는 것 아닐까? 사람이 그렇게까지 염치가 없을까?”
월령안은 비웃었다.
“개 주둥이에서 상아가 자라날 수는 없지만, 소함연이 말 한마디는 제대로 했네요. 저는 여러분과는 달라요. 여러분은 귀한 집 아가씨고, 저는 딸린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지요. 치마 하나뿐만 아니라, 금산이든 은산이든, 제가 원한다면 제 손으로 얼마든지 만들 수 있어요.”
월령안은 옷소매를 당기더니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고작 치마 하나뿐인데요, 뭘. 대단히 비싼 것도 아니고, 설령 대단히 비싸다 하더라도 저 월령안은 남자에게 달라고 할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어떤 남자가 절 기쁘게 해 준다면, 저는 그 사람한테 금산이나 은산을 줄 수 있어요.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요.”
“너, 너, 이 천한 것이!”
등요 공주는 화가 나 얼굴이 일그러지고 두 눈이 벌게졌다.
여인들은 월령안의 호언장담과 기세에 놀라 멍해졌다.
‘금산, 은산도 얼마든지 준다니. 월령안이 그렇게나 돈이 많아?’
월령안의 말에 맞은편에 있던 공자들도 하나같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도저히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잠깐, 월령안이 지금 우리를 희롱하는 건가?’
월령안은 말 한마디로 자리에 있던 모든 여인을 놀라게 했다.
등요 공주는 월령안이 허풍을 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매일 돈을 쓸어 담는 미인방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기부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묵묵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월령안은 정말 돈이 많았다.
금산을 만드는 것은, 그녀들처럼 손에 쥔 돈이 없는 여인들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월령안처럼 한 가문의 주인으로, 돈이 부족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사소한 일이었다.
등요 공주는 화가 나서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와 가까이 있던 몇몇 낭자도 서로를 쳐다만 볼 뿐, 감히 한마디 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늘따라 월령안이 너무 공격적으로 나왔다. 괜히 한마디 했다가 안 좋은 일에 휘말리게 될까 걱정이 되었다.
지난번 미인방에서는 등요 공주가 사람들 앞에서 월령안에게 무안을 주었다. 그러나 월령안은 웃어넘겼다. 비록 등요 공주를 골탕 먹이기는 했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녀의 체면을 깎아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어찌 된 영문인지, 월령안은 화약이라도 삼킨 듯 등요 공주의 체면을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등요 공주를 난처하게 했다.
월령안이 등요 공주의 체면도 봐주지 않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가만두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자신에게 등요 공주만 한 체면도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누가 감히 나서겠는가.
이제 입구의 분위기는 긴장으로 가득 찼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월령안도 이 어색한 상황을 굳이 풀려고 하지 않았다.
바로 이때, 주황색 옷을 입은 소녀가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등요 공주의 팔을 잡아당기며 대담하게 말했다.
“다들 오랜만에 만나다 보니 할 이야기가 너무 많은 건 잘 알아요. 하지만 춘일연을 곧 시작할 테니 여러분도 문을 막지 마시죠. 공주, 우리 먼저 들어가 앉아서 천천히 이야기해요. 어때요?”
등요 공주는 본능적으로 팔을 빼려 했다. 그러나 상대의 얼굴을 보자, 바로 웃음을 띠었다.
“미(微) 언니, 언니도 오셨네요.”
유명미(劉明微)는 태후 친정 출신의 아가씨였다. 태후 앞에서는 등요 공주보다 귀여움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녀만이 입을 열 수 있었고, 등요 공주를 달랠 수 있었다.
“그럼요. 진작 와서 춘일연의 주인이 저희를 잘 접대해 주기를 기다렸죠.”
유명미는 조금도 봐주지 않고, 등요 공주가 지각한 일을 사람들 앞에서 콕 집었다. 그러나 그 과감한 말투에는 비꼬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니 듣는 쪽에서도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제 잘못이에요. 미 언니를 오래 기다리게 했네요.”
등요 공주는 불만이 있어도 드러내지 못했다. 그저 딱딱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녀가 웃자, 얼굴의 분가루가 또 우수수 떨어졌다. 유명미는 못 본 척하며 등요 공주의 팔을 친근하게 잡고 정원 안으로 걸어갔다.
유명미는 월령안의 옆을 지날 때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여 보였다.
월령안은 참지 못하고 미소를 지었다.
월령안과 태후의 친정은 많은 거래를 해 왔다. 그래서 유명미를 만난 적이 있었다.
처음 유명미와 만났을 때, 유명미는 일꾼으로 분장하고 그녀의 오라버니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그녀의 오라버니와 월령안이 거래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월령안은 그때부터 유명미가 분장했던 일꾼이 남다르다고 느꼈다. 그래서 거래를 마치고 떠나갈 적에 일부러 슬쩍 떠보았다. 유명미는 시원스럽게 자신의 정체를 인정했다.
그 첫 만남에서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서로의 재능을 높이 샀다. 그 뒤, 두 번에 걸친 만남에서 월령안은 유명미가 장사에 흥미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유씨 가문에서는 큰아가씨가 장사를 하게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유명미가 이때 나선 것은 등요 공주를 위해 중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월령안을 도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춘일연에 참석한 여인들이 이렇게 많은데, 월령안 혼자만 너무 튄다면 남들의 기를 눌러 버리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월령안이 자기를 내세우려고 등요 공주를 계속 짓밟는다면, 다른 아가씨들의 불만도 살 게 뻔했다.
그런 참에 유명미가 제때 나섰다.
월령안이 시선을 끌 수 있을 만큼, 하지만 너무 미움을 사지 않을 만한 시간이 지난 때였다.
월령안도 적당한 시기에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가씨들이 앞으로 가자 눈치껏 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대부분 자리를 뜰 무렵에야 조용히 따라갔다.
상인 집안 출신인 월령안은 늘 자신의 처지를 잘 파악했다. 어떤 무리에는 그녀가 끼고 싶다고 해서 낄 수는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또 나서야 할 때와 겸손해야 할 때, 싸울 때와 싸워서는 안 될 때를 잘 파악했다.
바로 지금은 나설 때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과 맞지 않는 무리에 끼어드느라 아부를 떠는 짓도 할 수 없었다.
월령안은 더는 입을 열며 나서지 않았다. 대신 묵묵히 여인들의 뒤를 따랐다. 그러자 아가씨들도 마음이 편해졌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끼리끼리 모여서 삼삼오오 수다를 떨었다. 월령안은 완벽하게 따돌림을 당했다.
그녀들이 월령안을 싫어해서만은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월령안이 오늘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위협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들은 월령안의 옆에 들러리처럼 서 있고 싶지는 않았다.
월령안에게는 아직 그만한 자격이 없었다.
* * *
여인들이 정원으로 들어설 무렵, 맞은편 회랑에 있던 공자들도 월령안의 ‘희롱’에서 하나둘씩 정신을 차렸다.
스스로 고결하다고 여기는 몇몇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월령안이 알지도 못하면서 돈 냄새나 풍긴다고 욕했다.
다른 사람들은 월령안이 호기롭다고 여겼지만, 그녀가 남자들을 ‘노리개’ 취급한 것을 떠올렸다. 결국, 그들도 월령안의 편을 들지 않았다.
한편, 최일과 육장봉은 배나무 아래에 나란히 서 있었다. 최일은 순식간에 모든 날카로움을 거둔 월령안을 보았다. 그의 눈에 호감이 스쳤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서릿발이 선 얼굴을 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대장군, 금산은 어떻게 생겼던가요?”
육장봉은 굳은 얼굴로 말을 하지 않았다.
최일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보아하니, 대장군께서는 월 낭자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지는 못했나 보군요.”
“닥치게!”
육장봉은 최일에게 싸늘한 얼굴을 보였다.
“대장군, 만약…… 제가 월 낭자를 기쁘게 해 준다면, 정말 월 낭자가 제게 금산 하나를 주겠습니까?”
최일은 말을 마치더니 돌아서서 배나무 숲으로 걸어갔다. 육장봉 홀로 배나무 아래 남겨졌다.
바람이 불었다. 새하얀 배꽃이 나풀나풀 떨어지며 육장봉의 몸에 내려앉았다.
월령안은 뒤처져 있었다. 맞은편에 있던 몇몇 서생이 월령안의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고 큰소리로 욕을 했다. 그녀는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돌려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웃었다.
고개를 돌렸을 때, 배나무 아래에 서 있는 육장봉이 곁눈으로 얼핏 보였다.
월령안의 미소가 옅어졌다.
그녀는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여인들을 따라 정원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