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화신은 이래야지
정자에 앉아 있던 공자들은 푸른 옷을 입은 공자의 말에 뭐라 해야 좋을지 몰라 분위기가 조금 어색하던 참이었다. 유경장의 출현 덕분에 이러한 어색함이 깨어졌다.
유경장과 사이가 좋은 공자들과 서생들은 그가 화려한 차림새로 나타나자, 너도나도 앞으로 다가가 놀렸다.
“경장, 오늘 왜 이렇게 요란하게 입었나? 마치 새신랑 같구먼.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참, 경장. 일전에 자네가 연모하는 여인도 올해의 춘일연에 참석한다고 말하지 않았나. 마음에 둔 여인이 도대체 누구인가? 우리가 잘 봐야겠어. 자네가 마음에 둔 여인이 그만큼 아름답지 않다면, 자네 체면이 있더라도 그 여인을 화신으로 뽑아 주지는 않을 거니까.”
“그러게, 해마다 화신을 뽑는 것도, 흠흠……. 누가 그들의 금 연주나 노래를 좋아한다고. 해마다 이런 식이니 따분해 죽겠네.”
“경장, 방금 자네가 명월산장의 하인을 몰래 찾아가는 것을 봤네. 뭘 하려는 건가? 먼저 우리에게 귀띔해 주면 안 되겠나? 우리가 도울 수도 있지 않나.”
“경장, 그 웃음은……. 좀 수상한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유경장은 재능이 넘치고, 용모가 출중했으며, 품위가 있었다. 또한, 교우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문인이나 선비들 중에서도 명성이 뛰어났고, 인기도 대단히 좋았다.
사람들은 유경장이 평소의 소박하고 우아한 옷차림을 바꾼 모습을 보자, 하나같이 흥분해서 눈을 반짝였다.
유경장은 자신이 연모하는 여인도 올해의 춘일연에 참석한다고 했다. 그가 이렇게 화려하게 차려입은 이유가 무엇인지는 머리를 쓰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유경장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놀림을 당하자, 부탁한다는 듯이 공수를 했다.
“형님들, 제발…… 이 아우를 놓아주십시오. 춘일연이 끝나면 제가 꼭 자리를 마련해서 사죄하겠습니다.”
“경장, 좋은 친구들끼리 이렇게 쩨쩨하게 굴지 말게. 일이 있으면 말을 해야지. 그래야 우리도 자네를 도울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낼 수도 있지 않겠나.”
“자네가 연모하는 낭자가 도대체 누구인가? 올해 춘일연에 참석하는 사람 중에서 낯선 얼굴이 아주 많더라고. 이씨 가문의 낭자인가? 아니면 허씨 가문의 낭자인가?”
“전씨 가문 낭자는 아니고?”
“내가 방금 소 승상의 아들을 보았네. 한창 전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의 주변을 맴돌더라고. 아마도 전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은가 봐.”
“소씨 가문에서는 공주와 혼인한다고 하지 않았어? 어떻게 된 일이지?”
젊은이들의 호기심은 늘 빠르게 생겼다 사라지고는 했다. 유경장이 입을 열지 않으니 사람들도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러자 더는 캐묻지 않고 화제를 돌려 소씨 가문과 전씨 가문의 일에 관해 이야기했다.
유경장은 사람들의 포위에서 벗어나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난간에 기대앉은 푸른 옷차림의 공자를 본 순간, 얼굴의 미소를 거두고는 앞으로 다가가 예를 올렸다.
“최일(崔軼) 공자.”
“청루재자(靑樓才子)라는 유경장인가?”
푸른 옷차림의 공자는 눈을 들어 유경장을 힐끔 쳐다보았다. 별처럼 아름다운 눈에는 냉기가 살짝 내비쳤다.
미풍이 그의 늘어뜨린 옷자락을 스치더니, 난간 밖으로 드리운 긴 머리를 날렸다. 그 모습이 그를 더욱 차가우면서도 우아해 보이게 했다. 무례하게 앉은 자세도 눈에 들어오지 않게 했다.
“네.”
유경장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푸른 옷차림의 공자가 보인 싸늘한 태도에 화를 내지 않았다. 상대방의 평가에 불만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푸른 옷을 입은 공자는 이름이 최일(崔軼), 자는 자도(子都)로, 청하(淸河) 최씨 출신이었다. 그리고 백 년 세가인 최씨 가문의 적장자였다.
최일은 유명한 유학자 종근(鍾瑾)을 스승으로 모시고, 열여섯 살에 장원 급제했다. 올해 스물다섯으로, 이미 호부의 좌시랑(左侍郞)이었다.
“좋은 재능을 썩히는군.”
최일은 일어나서 유경장의 옆을 지나쳤다. 옷자락이 나풀거리는 모습이, 마치 바람을 일으키며 다니는 것 같았다.
유경장은 제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에 떠오른 미소만이 유난히 씁쓸했다.
최일이 떠나자, 정자 안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시끌벅적해졌다. 그중 용감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저자는 왜 왔대?”
“아까 정말 깜짝 놀랐잖아. 저자가 입을 여니 난 감히 앉지도 못하겠던걸.”
“최씨도 좋은 여인과 혼인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는 건가? 춘일연에는 왜 왔대? 이런 연회를 가장 싫어하지 않았던가?”
“경장, 괜찮나?”
최일의 말을 듣고 유장경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그와 사이가 좋은 이들은 앞으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유경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괜찮네.”
예전이었더라면 꽤 오랫동안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에게는 새로운 선택지가 생겼다.
삼 년 전에는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벼슬길 때문에 겁쟁이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을 위해서라도 한 번 더 도전해 보고 싶었다.
“괜찮으면 됐네. 올해 무슨 일인지 육 대장군께서도 오신다는군. 올해 춘일연에 무슨 일이 있나? 왜 하나같이 대단한 사람들이 왔지?”
“육 대장군? 그분이 왜 온대? 성문 앞에서 월 낭자에게 삼 년 안에는 혼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혼인할 것도 아닌데 춘일연에 참석하다니. 우리 기를 죽이겠다는 건가?”
* * *
정자 밖에서, 최일은 오솔길을 가로지르다가 은색 옷을 입은 육장봉을 보았다. 그는 배나무 아래에 서 있었는데, 마치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최일은 앞으로 다가가 읍했다.
“대장군.”
“최 대인?”
육장봉은 코웃음을 쳤다.
“조계안이 보냈나?”
“역시 장군은 속일 수 없군요.”
최일은 가볍게 미소를 짓고 육장봉의 옆에 섰다.
“그가 자네더러 날 지켜보라고 했나?”
육장봉에게 조계안의 속셈쯤은 훤했다.
최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자네, 미혼이던가?”
육장봉이 물었다.
“네.”
미혼이 아니면 춘일연에 나타날 수가 없었다.
육장봉은 그제야 최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최씨 가문의 자제는 역시 명불허전이군.”
“헛된 명성일 뿐입니다.”
최일은 육장봉의 말뜻에 숨겨진 뜻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육장봉이 절대 그냥 한 말은 아님을 확신했다.
‘그런데……. 일부러 내가 미혼인 걸 꼬집다니, 무슨 뜻이지?’
최일은 저도 모르게 경계심이 생겼다.
육장봉과 최일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등요 공주가 도착했다.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시선이 모였다.
등요 공주는 아까 입었던 의상이 망가지는 바람에, 금색 궁장(宮裝 – 궁중 여인들이 입던 보통 예복)으로 갈아입었다. 고귀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황실의 귀인다운 풍채를 한껏 드러냈다.
아가씨들은 화려한 옷차림을 한 등요 공주를 보고 감탄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등요 공주가 가까이 다가와 그 얼굴을 보였을 때, 감탄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등요 공주는 얼굴에 분을 몇 겹이나 덧바른 거지?’
‘나이도 많지 않은데, 분을 저렇게 많이 바른 걸로도 모자라서 저 진한 화장이라니, 미쳤나?’
‘얼굴이 뽀얗기는 한데…….’
그녀들은 등요 공주가 걸을 때마다 얼굴에서 분가루가 떨어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놀란 것과는 별개로, 등요 공주가 나타나자 예를 올리는 것까지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공주 마마를 뵙습니다.”
“일어나게.”
등요 공주의 안색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래도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늦는 바람에 모두를 오래 기다리게 했구나.”
“저희가 일찍 왔습니다. 공주께서는 제시간에 오셨어요.”
아까까지 얼마나 불만이 많았든지 간에, 등요 공주 앞에서 감히 불만을 드러내는 사람은 없었다.
등요 공주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쭉 훑어보았다.
그리고 한 사람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월령안은?”
등요 공주는 월령안에 대한 적의를 전혀 감추지 않았다. 서둘러 안에 들어가는 대신, 굳은 얼굴로 물었다.
“월령안이라고?”
등요 공주가 묻자, 사람들은 그제야 지금까지 월령안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지 않은 모양인데. 난 보지도 못했어.”
“나도 못 봤어. 안 왔나 봐.”
여인들은 등요 공주가 늦게 나타나는 바람에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공주였으니, 감히 책망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월령안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것을 보자, 벌컥 화를 냈다.
“공주께서 일개 상인을 춘일연에 초대하신 것만 해도 크나큰 영광인데 감히 오지도 않았다니.”
“역시 상인 집안 출신이로군. 얼굴을 내밀지도 못할 주제에, 공주께서 밀어주신다 해도 몸에서 풍기는 돈 냄새를 지울 수나 있겠어?”
여인들이 월령안을 질책할 때였다. 소함연이 나긋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령안이에게 분명 무슨 일이 생겨서 지체하는 것이겠지요. 령안이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소 낭자?”
아가씨들이 월령안을 깔보기는 했지만, 소함연에게도 그다지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소함연이 육씨 가문의 일곱 번째 도련님과 약혼한 사이임을 떠올리자, 불만이 있어도 얼굴에 티를 낼 수 없었다.
육씨 가문은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녀들로서는 육씨 가문에게 밉보일 수 없었다.
소함연은 온 지 한참이나 되었다. 본래는 현임 좌승상의 여식으로서, 뭇사람에게 떠받들려야 마땅했다. 하지만 온 지 반나절이나 지나도록, 몇몇 하급 관리의 여식 말고는 아는 척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바람에 기분이 언짢았다. 안 그래도 두각을 드러내어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기회를 줄곧 엿보던 참이었다. 지금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니, 당연히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소함연은 가볍게 얼굴을 들어 올리고, 완벽하다고 할 만한 미소를 지었다.
“령안이는 우리와 달라요.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처지거든요. 평소에도 잡다한 일을 처리해야 하니, 사람이나 일 때문에 발목이 잡혔을 거예요. 그래서 잠시 지체된 것이겠지요. 동생들, 제 체면을 봐서라도 령안이를 너그럽게 봐주세요, 네?”
소함연이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비꼬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 낭자의 체면이 정말 대단하네요. 우리 월씨 가문을 대표할 정도라니요.”
사람들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꽃이 활짝 핀 치마를 입고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 월령안이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모두는 깜짝 놀라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월령안?”
연회색 비단 치마를 입은 월령안은 단아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넓은 치마폭이 나풀거리자, 치마 위의 진짜 같은 꽃송이들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팔랑거렸다.
꽃송이와 치마 사이에 감춰진 은사가 햇빛을 받자 반짝반짝 빛이 났다. 성스러운 빛이 월령안 주변을 감싸고 있는 듯했다. 지금 그녀는 인간 세상에 내려온 꽃의 선녀처럼 신비로워 보였다.
“화신이다!”
“이게 화신이지!”
“화신은 이래야지!”
월령안이 나타나자, 맞은편에 있던 공자들이 하나같이 눈을 빛냈다. 용기 있는 사람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저 사람이 월령안이라고요?”
배나무 아래 있던 최일과 육장봉도 빛을 등지고 걸어오는 선녀 같은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그렇네.”
육장봉의 안색이 먹처럼 어두워졌다.
진작에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월령안이 이 치마를 입고 그의 앞에 섰을 때, 그는 그녀를 명월산장으로 데려온 것을 후회했다.
다름이 아니라, 월령안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성스러우면서도 독특한 그 아름다움은 육장봉의 혼마저 쏙 빼놓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