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내가 데려다주겠소
“조심하시오. 장공주는 당신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소.”
육장봉이 일깨워 주었다.
궁지에 빠진 쥐가 고양이를 무는 법. 청희 장공주가 쥐가 아니라는 법은 없다. 그녀가 육장봉에게는 손을 쓰지 못하더라도, 월령안을 공격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치 오늘처럼, 그녀는 순진무구한 척하는 것만으로도 옆에 있는 사람들이 월령안을 괴롭히도록 할 수 있었다.
“대장군의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조심하지요.”
육장봉의 말대로라면, 월령안과 청희 장공주는 이미 원한을 맺었다. 그것도 보통의 원한이 아닌,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는 관계였다.
‘하는 수 없지, 뭐. 청희 장공주의 ‘사생아’를 죽이려는 내 잘못이니.’
“갑시다.”
해야 할 이야기는 다 끝났다. 육일이 말을 끌고 오자, 육장봉은 월령안에게 손짓했다.
이곳은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대장군, 제 마차는 아직 성안에 있어요.”
월령안은 뛰다시피 따라갔다. 그 바람에 등의 상처에 무리가 갔다. 그녀는 통증으로 숨을 들이켰다.
육장봉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시선을 내리깔더니, 느긋하면서도 오만하게 말했다.
“지금 나더러 당신을 데려가 달라는 거요?”
“대장군, 춘일연이 곧 시작합니다.”
월령안은 숨을 내쉬며 고통을 진정시켰다.
“이 모양으로 춘일연에 참석하려고 하오?”
육장봉은 미간을 찌푸린 채 불쾌해서 물었다.
‘어떻게 춘일연에 참가하겠다는 거지? 부상까지 입었는데. 설령 다치지 않았어도, 길거리의 거지 같은 몰골로 춘일연에 가서 뭘 할 셈이지? 청희 장공주처럼 불쌍한 척하려는 건가?’
월령안은 등요 공주가 탄 마차를 노려보고 냉소를 지었다.
“제가 참석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있으니까, 반드시 참석해야겠어요.”
“객기 부리기는.”
육장봉은 차가운 얼굴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객기를 부리는 게 아니라 이익을 위해서예요. 출발하기 전에 판돈을 크게 걸었거든요. 전 지는 게 싫어요.”
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지기 싫은 것이었다. 소씨 가문에서 이득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 꼴로 가서 뭘 하겠다는 것이오?”
육장봉이 언짢은 얼굴로 물었다.
“마차에서 내리기 전에 옷을 갈아입었거든요.”
원래는 청희 장공주와 등요 공주가 기회를 보아 그녀를 모욕하리라 생각했다. 단지 그녀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춘일연에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만이 목적이라고 여겼다.
예상과 달리, 청희 장공주가 원하는 것은 그녀의 목숨이었다.
만약 그녀가 야율제와 청희 장공주의 관계를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절대 그렇게 순순히 달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정보망은 육장봉과 비교하면 항상 한 걸음 뒤처졌다. 소식이 늦었으니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월령안은 늘 의지가 굳건했다. 한번 결정한 일이라면 다른 사람 때문에 쉽게 바꾸는 법이 없었다.
육장봉은 만남을 거듭하는 동안 그녀의 성격을 알게 되었다. 월령안의 말을 듣자,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데려다주겠소.”
월령안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마차와 황실의 시위를 힐끔 보았다. 곧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대장군께 감사드려요.”
등요 공주는 어리석고 악랄한 사람이었다. 계획이 실패했으니, 그녀가 또 무슨 수를 쓸지 몰랐다.
육장봉이 있다면, 다른 건 몰라도 등요 공주 같은 악당은 절대 수작을 부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마음 편히 춘일연에 참석할 수 있으리라.
“갑시다!”
육장봉은 몸을 날려 말에 올랐다. 그리고 월령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두 번째에는 익숙해졌다. 월령안은 육장봉의 손을 잡더니, 그 힘으로 말 등에 올라타 그의 앞에 앉았다.
습관이란 게 무섭다. 육장봉은 사람을 가까이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월령안과 말을 한 번 타고 난 뒤에는 그녀와 함께 말을 타는 게 조금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랴!”
육장봉은 월령안을 태우고 말에 채찍질하며 앞으로 나갔다. 남은 친위대와 구경하던 백성은 깜짝 놀란 나머지 눈알이 떨어질 정도였다.
“어, 내 눈이 잘못됐나? 방금 월 낭자와 함께 말을 탄 사람이 대장군이 맞나?”
“육 대장군이 월 낭자를 내치지 않았었나? 왜 두 사람이 아직도 저렇게 친밀해?”
“육 대장군과 월 낭자가 같은 말을 타고 전혀 꺼리는 기색이 없잖아. 혹시 다시 합가하려는 게 아닐까?”
* * *
마차 안에 있던 등요 공주는 작은 창문으로 육장봉과 월령안이 같이 말을 타고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너무 놀라서 화를 냈다.
“이럴 리가 없어. 이건 말도 안 돼! 장봉 오라버니가 저 천한 것이 가까이하도록 내버려 둘 리가 없다니까!”
등요 공주의 손톱 하나가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부러졌다. 어여쁜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일그러졌다.
“저 천한 것이 수작을 부려서 장봉 오라버니를 꼬드긴 거야! 안 되겠다. 내가 꼭 저 천한 것의 진짜 모습을 까발릴 거야. 저것이 다시는 장봉 오라버니를 꼬드기지 못하게 만들어야지. 여봐라, 서둘러 명월산장으로 가자!”
등요 공주는 기를 쓰고 재촉했다. 목청을 돋우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얼른 가자니까!”
“네, 네, 마마.”
등요 공주의 시위는 육 대장군이 그들에게 죄를 묻지 않아 다행으로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등요 공주의 표독스러운 재촉을 들으니 깜짝 놀라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시위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채찍을 휘둘러 마차를 끄는 말을 몰았다.
말은 고통에 못 이겨 울부짖었다. 갑자기 앞으로 확 뛰쳐나가는 바람에 마차가 덜컹거렸다.
“앗……!”
마차 안에 있던 등요 공주가 넘어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황급히 무언가를 잡고 몸을 지탱하려고 했다. 그러나 제대로 잡기도 전에 콰당, 하는 소리가 울리며 마차가 쓰러졌다.
“꺄아악! 사람 살려, 사람 살려!”
등요 공주의 겁에 질린 고함이 마차 안에서 울렸다.
마침 말을 타려던 육일 일행은 뒤쪽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돌아보았다.
육일은 무심결에 돌에 부딪혀 박살이 난 차바퀴를 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 순식간에 사라진 금색 빛을 보고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황금당의 사람은 역시 받은 만큼 일을 하는구나.’
그는 월 낭자의 체면을 생각해, 황금당의 사람 대신 뒤처리를 해 주기로 했다.
육일은 육칠, 육팔에게 눈짓을 했다.
“가자. 저 뒤에 있는 사람을 도와줘야지.”
황궁 사람들이 이 사고가 인위적임을 조사해 내지 못하도록, 흔적을 깨끗이 지워야 했다.
“네.”
육일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육칠, 육팔은 바로 그의 뜻을 알아들었다. 두 사람은 말에서 내려 재빨리 뒤로 달려갔다. 그들은 황궁 시위를 도와 함께 마차를 들어 올렸다. 또 시위가 한눈을 파는 새에 마차 바퀴에 남은 흔적을 감쪽같이 지웠다.
그다음에는 등요 공주가 괜찮은지 확인도 하지 않고 작별을 고하고 떠나갔다.
등요 공주만이 마차 안에서 홀로 기뻐하고 있었다.
“장봉 오라버니가 날 걱정하는 줄 알고 있었다니까. 내 마차에 문제가 생기자, 바로 친위대를 불러 날 돕게 했잖아.”
등요 공주는 달콤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바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역시 장봉 오라버니가 월령안 그 천한 것에게 속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꼭 그 천한 계집의 진짜 모습을 까발릴 거야. 장봉 오라버니와 그 천한 계집을 떨어트려 놓아야 해.”
등요 공주가 다시 한번 재촉했다.
“얼른 새 마차를 대령해라. 명월산장으로 가야겠다.”
궁녀는 등요 공주의 초라한 몰골을 보자, 여러 번 머뭇거리다가 넌지시 말했다.
“공주 마마, 옷이 망가졌습니다. 이마에는 멍도 들었고, 얼굴에도…… 긁힌 상처가 있어요.”
옷은 갈아입을 수 있었지만, 얼굴의 멍과 긁힌 상처는 쉽게 감출 수 없었다. 잘 수습해 보아도 아까처럼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가장 명월산장에 가지 않고, 춘일연에 참석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월령안, 이 천한 것!”
등요 공주는 그제야 얼굴에서 화끈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화가 치밀어 올라 욕을 하더니, 손을 들어 궁녀의 뺨을 후려쳤다.
“뭣들 하는 것이냐? 얼른 새 옷으로 입을 수 있게 준비하고, 얼굴의 상처를 가릴 방법도 생각해 내라.”
“네, 공주 마마.”
궁녀는 따귀를 맞았지만, 감히 불만을 품지도 못했다. 그저 비굴하게 등요 공주를 부축해 일으켰을 뿐이다. 그리고 뒤에 있던 하인용 마차로 데려가, 등요 공주를 다시 치장했다.
시위도 행동을 서둘러야만 했다. 등요 공주 일행이 치장을 마쳤을 무렵, 새 마차를 구해 왔다. 그리고 등요 공주를 명월산장으로 데려갔다.
그런데도 길에서 지체한 시간이 너무 길었다. 등요 공주가 명월산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각이었다.
연회의 주인인 등요 공주가 도착하지를 않으니, 춘일연도 시작할 수 없었다.
아가씨들은 한참을 기다려도 등요 공주가 나타나지 않자 불만을 품었다. 사이 좋은 몇몇끼리 모여, 등요 공주가 안하무인이라 자기들을 안중에 두지 않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그녀 한 사람을 기다리게 한다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고작 입으로만 몇 마디 불평했을 뿐, 감히 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그만큼 등요 공주의 신분은 고귀했다. 그녀들로서는 아무리 불만이 있더라도 등요 공주가 오기만을 앉아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춘일연에 참석하는 사람 중에는 혼인 적령기의 아가씨뿐만 아니라, 풍류가나 공자도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춘일연에 여러 차례 참석했는지라 어떤 순서로 진행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여인들 쪽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하나같이 서로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낭자들이 왜 아직도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는 거지?”
“지금 시간이 얼마나 됐나? 왜 아무 기척도 없지?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등요 공주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던데.”
소식이 빠른 사람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설마 그러겠어? 등요 공주가 올해 춘일연의 주최자가 아닌가? 주최가 되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을 기다리게 한다는 말인가? 자기가 공주니까 아주 대단하다고 여기는 모양인데?”
아가씨들과 달리, 신분이 고귀한 공자들은 등요 공주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당장 불쾌한 기분을 토로했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더러 올해의 화신으로 자기를 뽑으라고 하다니. 공주면 우리 모두의 체면을 짓밟아도 된다고 여기나?”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푸른 옷차림의 한 남자가 난간에 홀로 기대앉은 채 사람들의 질책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는 눈으로 가볍게 사람들을 훑더니 차갑게 말했다.
“됐네. 어린 아가씨와 심각하게 따질 필요가 있겠는가? 어차피 시간 때우기 용의 따분한 연회일 뿐인데, 빨리하나, 늦게 하나 무슨 차이가 있겠나?”
그의 신분은 보통이 아닌 듯했다. 그가 입을 열자, 불만을 토로하던 공자들도 바로 입을 다물더니, 더는 말하지 않고 순한 양이 되었다.
순간, 정자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때, 머리에 옥으로 된 관을 쓰고 주홍색 두루마기를 입은 유경장이 굽이진 오솔길로 걸어왔다. 그의 발걸음은 여유로웠고,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떠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