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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216)화 (216/1,004)

216화 장공주가 뭐 어때서?

말을 하던 청희 장공주는 또 눈물을 후두둑 쏟았다. 마치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듯이 화 상궁의 품에 안겨 쉬지 않고 몸을 떨었다.

“사생아라고? 세상에! 육 대장군이 생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생아라는 말이야?”

“어……. 그런 것 같아. 육 노장군께서 부인을 맞이하지 않으시다가 갑자기 애를 안고 돌아오셨지.”

“사생아도 벼슬을 할 수 있어? 장군이 될 수 있어? 조정에는 사람이 없는 건가?”

“사생아! 보기에는 멀쩡하더니만 그런 놈이었다니. 우리 주나라 망신을 다 시키는구먼.”

성문 입구는 원래 백성들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앞서 청희 장공주가 월령안을 모욕하며 괴롭힐 때부터 많은 사람이 슬그머니 눈여겨보고 있었다. 단지 공주부의 시위가 호시탐탐 지키고 있어 감히 다가가지 못했을 뿐이었다.

이때 육장봉이 병사를 거느리고 순시하러 왔다. 성을 드나들던 백성들은 장군이 온 것을 보자, 개중 용기 있는 자들은 가까이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

그러다 마침 청희 장공주의 말을 들은 순간, 하나같이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들이 육장봉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경멸과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육장봉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차가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사생아라고 하셨습니까? 제가?”

“장봉아, 미안하다. 나는…… 난 일부러 말한 게 아니야. 네 신분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만 깜빡했구나. 걱정하지 마렴. 내가 지금 당장 저들에게 입단속을 시키마.”

청희 장공주는 불쌍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말했다.

“그럼 공주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인정하시는 겁니까?”

육장봉의 온몸에서는 싸늘한 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주변의 분위기도 확 달라졌다.

주변을 에워싼 백성들은 그 상황을 보자 깜짝 놀랐다. 찍 소리도 내지 못하고, 허둥지둥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청희 장공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당황한 어조로 말했다.

“장봉아, 미안하구나. 지금 당장 사실을 바로잡으마. 내가, 내가 말실수를 했느니라. 내가 헛소리한 것이야.”

“사과만으로 해결된다면 관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육장봉은 다시 이 한마디를 강조했다.

“청희 공주, 대중 앞에서 조정의 일품 관원을 모욕한 것은 무슨 죄로 다스려야 합니까?”

“장, 장봉아…….”

청희 장공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육장봉은 손을 들어 옷소매를 정리했다. 그의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에는 전혀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청희 장공주는 길거리에서 조정의 일품 관원을 모욕했다. 여봐라, 청희 장공주를 잡아들여라!”

“장봉아, 네가 화가 나서 날 가둔다 해도 난 널 원망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너도 더는 잘못을 저지르지 마라. 사사로운 원한에 공권력을 동원했다가는 어사(御史)에게 탄핵당할 것이야. 장봉아, 더는 잘못된 길로 나가지 말거라. 네 아버지도 실망하실 거다. 네 어머니의 희생을 헛되이 하면 아니 된다.”

청희 장공주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한쪽에 늘어뜨린 손은 몰래 꽉 움켜쥐고 있었다. 마음속의 흥분을 애써 누르는 중이었다.

‘육장봉, 역시 걸려들었구나!’

“제가 뭘 두려워하겠습니까?”

육장봉은 손을 들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들을 제압해서 순천부로 보내라!”

“네, 장군.”

육이 등 친위대는 큰소리로 대답했다. 청희 장공주의 신분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제압했다.

“나, 나는 주나라의 장공주다. 너희가…… 감히 나를 건드릴 수는 없다.”

청희 장공주는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눈치껏 반항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신분이 있으니, 감히 그녀를 어찌하지 못하리라 여긴 것이다.

“흥.”

그러나 육이를 비롯한 이들은 코웃음을 쳤다. 청희 장공주를 신경 쓰기는커녕 바로 그녀를 붙잡아 땅바닥에 짓눌렀다.

‘장공주가 뭐 어때서?’

군 규칙에 위반되지만 않았으면, 그들은 진작에 나서서 장공주를 두들겨 팼을 것이다.

“앗, 노, 놓거라. 놓으란 말이다!”

얼굴이 땅에 짓눌려 거친 모래와 마찰하자 불에 덴 듯이 아팠다. 청희 장공주는 자신의 모양새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높은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버둥거릴 엄두는 못 냈다. 혹시 땅의 거친 모래에 얼굴을 쓸릴까 두려웠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얼굴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남자들이 그녀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게, 결국 그녀의 얼굴 때문이 아니던가.

‘육장봉, 이 미친놈! 감히 내 얼굴을 다치게 하다니. 죽여 버리겠어! 저것이 이런 화근이 될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육속이 저 잡종을 죽이도록 했을 것을.’

“끌고 가라.”

육장봉은 자신의 부하들이 일부러 그랬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재 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걸 보니, 그녀도 늙은 모양이다. 줄곧 과거의 휘황찬란함에 빠져 있느라, 그녀의 얼굴을 좋아하던 남자들이 하나씩 죽어 버렸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설령 그들이 죽지 않았더라도, 그녀 정도의 나이에 불쌍한 척, 세상 물정 모르는 척 천진난만하게 군다고 정말 순진무구한 사람으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 늙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녀가 예전에 남자들을 길들이던 수법도 이제는 소용이 없었다.

청희 장공주는 육이에게 끌려 일어났다. 불에 덴 것처럼 화끈한 통증이 느껴지는 얼굴은 분노로 온통 일그러져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억지로 화를 참았다. 여전히 나약하고 서글프게 말했다.

“육…… 장봉.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벌하는 것은 죽을죄란다. 더는 잘못을 저지르지 마라. 네가 어렸을 때 날 어머니라고 불렀잖니. 그래서 나도 줄곧 너를 내 자식처럼 여겼단다. 이 일은 따지지 않으마. 황제 폐하께서 책망하신다면 내가 그랬다고…….”

“입을 막아라.”

육장봉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갈수록 차가워졌다. 눈빛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육장봉의 옆에 서 있던 월령안은 그의 몸에서 풍기는 살기를 분명하게 느꼈다.

하늘이 내린 재앙에서는 살길이 있더라도, 자기가 만든 재앙에서는 살길이 없는 법.

육장봉은 청희 장공주에게 살의를 품은 게 분명했다.

청희 장공주는 육장봉이 자신에게 손을 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육이의 손에 의해 걸레짝처럼 마차 안에 내던져지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사십여 년을 살았지만, 육장봉처럼 당근도 채찍도 통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현재의 황제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참아 주고 양보했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신분, 외모, 수완이 있었기에 그녀에게 손을 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육장봉이 처음이었다.

‘육장봉!’

마차에 실린 청희 장공주는 헝겊으로 입이 틀어 막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아름다운 눈만이 음침한 한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제까지 그녀를 모욕하고 대가를 치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육장봉, 네놈을 반드시 죽이고 말겠어!’

* * *

육이를 비롯한 친위대의 눈에 공주부의 시위들은 얼뜨기에 불과했다.

눈 깜짝할 새, 육이는 공주부의 시위들을 하나하나 묶어 두었다. 그리고 마차를 끄는 밧줄에 그들을 묶어 말 대신 마차를 끌어 성에 들어가게 했다.

‘청희 장공주를 위해 말이 되고 소가 되고 싶다며? 그럼 어디 한 번 청희 장공주의 마차를 끌어 보라지!’

“육이, 네가…… 육십이를 데리고 가라. 유칙에게 내가 대단히 화가 났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사람들을 풀어주지 말라고 해라. 내 말을 어기면, 나도 봐주지 않을 것이다!”

육장봉은 사람을 지명할 때 육삼, 육오 등을 지나치고 바로 육십이를 가리켰다.

월령안과 있을 때는 육십이를 멀리 보내지 않으면 반드시 예상외의 일이 벌어질 거라고, 그의 직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네, 장군.”

정작 육십이는 육장봉이 자신에게 ‘중임을 맡기자’ 신이 나서 우쭐거렸다.

반대로 육이의 입꼬리는 축 처졌다. 그래도 육장봉의 겉옷을 걸친 월령안을 보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장군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그는 반드시 육십이를 멀리 데려가야 했다.

육이는 청희 장공주와 그의 시위들을 신속하게 끌고 갔다. 순식간에 비좁던 길거리가 많이 넓어졌다. 그러자 뒤에 웅크리고 있던 등요 공주 일행도 드러났다.

등요 공주 일행이 안절부절못하며 육장봉이 다가와서 따질까 봐 걱정하고 있을 때였다. 정작 육장봉은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고개를 돌리고 월령안에게 물었다.

“당신이 고용한 사람은 어디에 있소?”

“이런 일에는 그들이 나서기 불편하죠.”

월령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백성은 관리와 싸우면 안 되는 법이다. 더구나 상대는 황실 귀족이었다. 그녀가 고용한 사람은 중요한 순간에 그녀의 목숨만을 보호할 뿐이었다. 청희 장공주의 모욕과 괴롭힘에 대해서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쓸모없기는.”

육장봉은 얼굴을 굳혔다.

월령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육장봉에게 읍하며 감사 인사를 했다.

“오늘 일은 대장군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일은 육장봉이 나서지 않았더라도, 생명의 위험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청희 장공주와 영녕후부에게 밉보이게 되었을 테니, 앞으로 더욱 골치가 아파질 것이다.

백성은 관리와 싸우면 안 되는 법이다.

이 짧은 한마디가 보통 백성들의 고달픔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인사할 필요는 없소. 이 일은 내 잘못이오. 당신에게 말해 주는 걸 잊었소. 야율제와 청희 장공주는 보통 관계가 아니오.”

육장봉은 손을 들어 인사를 가로막았다. 이 일로 월령안이 그에게 감사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순간, 월령안은 눈앞의 이 사람이 육장봉이 맞는지 의심을 했다.

하지만 따질 새가 없었다. 그녀는 육장봉의 말에 깜짝 놀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야율제와 청희 장공주라고요? 야율제는 올해 스물다섯이나 여섯이잖아요? 청희 장공주가 겉으로 보기에는 소녀와 다름이 없어도 나이가 있는데, 적어도 야율제보다 열대여섯 살이나 많다고요. 야율제가…… 어떻게 장공주와 그럴 수가 있죠?”

“당신은 어떻게 그런 쪽으로 생각하는 거요?”

육장봉은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월령안의 머리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 거지?’

“그런 관계가 아니면 무슨 관계인데요?”

월령안은 육장봉의 시선에 그만 겸연쩍어졌다.

이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분명 육장봉 본인이 말을 두루뭉술하게 했다. 그래서 그쪽으로 생각이 흘러갔을 뿐이다.

“야율제의 생모는 신분이 확실하지 않소.”

육장봉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월령안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정보는 방금 들은 것보다 더 무서웠다.

“서, 설마요? 야율제는 북요의 남원대왕이잖아요!”

‘청희 장공주가 미치지 않고서야!’

“당신이 생각한 대로요.”

육장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육장봉은 월령안이 이 일을 알게 되는 걸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일은 곧 비밀이 아니게 될 터였다. 청희 장공주의 시대도 끝나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고종 황제의 유언도, 종실의 사정도, 영녕후부의 병권도, 북요의 압력도 소용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누구도 청희 장공주를 구하지 못하리라.

“이건……. 정말이지, 자기 뒤처리도 제대로 못 하면서 당신에게 구정물을 퍼부은 꼴이네요.”

청희 장공주가 말끝마다 육장봉을 ‘사생아’라고 부른 것을 떠올리자, 월령안은 그녀에게 한마디 묻고 싶어졌다.

‘육장봉이 ‘사생아’라면, 그럼 야율제는? 자기가 낳은 아들을 그렇게 말하다니. 정말 괜찮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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