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내가 널 사생아로 만들었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월령안이 손에 든 장신구가 땅에 떨어졌다. 그러자 금색 연기가 하늘로 솟구치며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아! 두렵구나. 너무 두려워……. 화 상궁, 누군가 날 해치려고 해!”
청희 장공주는 핍박을 받기라도 한 듯 비명을 질렀다.
“마마, 무서워하지 마세요. 제가 있습니다.”
화 상궁은 청희 장공주를 품에 안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곧 고개를 돌려 시위들에게 엄한 목소리로 호통쳤다.
“어서, 뭣들 하느냐? 얼른 저 계집을 죽이지 않고. 저것이 허튼 짓을 못하게 해라!”
“네.”
시위들도 신호를 보았다. 그들도 오늘의 목적은 월령안의 목숨을 빼앗는 것임을 떠올렸다. 그러자 머뭇거리지 않고 장창을 쳐들더니, 뾰족한 창끝으로 월령안을 겨누고 세차게 찌르려고 했다.
으슥한 곳에 숨어 있던 황금당의 살수는 공주부의 사람들이 월령안을 괴롭히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목숨이 당장은 위험해 보이지 않는 데다가, 살수라는 신분으로는 사람들 앞에 나서기 난감하여 가만히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월령안이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가 구조 신호를 보내지 않았더라도, 공주부의 시위가 사람을 죽이려는 것을 보았으니 나서서 저지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보다 한발 빠른 사람이 있었다.
슉!
긴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성문 밖에서 날아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형을 집행하던 시위의 손목을 꿰뚫었다.
“으악!”
시위는 비명을 질렀다. 선혈이 튀며 손에 들고 있던 장창이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성문 밖에서 날아오더니, 월령안의 목을 누르고 있던 시위를 한순간에 발로 걷어차 버렸다.
그 그림자는 양 우리에 뛰어든 늑대처럼 눈 깜짝할 새에 공주부의 시위들을 하나하나 쓰러트렸다. 시위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자, 장봉아…….”
청희 장공주는 부드러우면서도 놀라움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공주부의 시위들이 당하는 끔찍한 모습은 보지 못한 척했다.
‘육장봉이라고? 육장봉이 어떻게 왔지?’
월령안은 땅에 엎드린 채, 놀라서 움직이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러나 더 생각할 틈도 없이 누군가가 그녀를 잡아 일으켰다. 그다음 그녀를 부드럽고 따뜻한 품에 안았다.
“괜찮소?”
남자의 나지막하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는 알아차리기 힘든 걱정이 섞여 있었다.
월령안은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저으며 육장봉을 밀어냈다.
“대장군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괜찮아요.”
공주부의 시위가 장창으로 그녀의 등을 두 번 정도 내려치기는 했지만, 사실 괜찮았다. 장창은 나무 몽둥이가 아니라서, 곤장으로 사용할 수도 없었고 힘 조절도 잘되지 않았다. 상대가 세게 내리쳤지만, 뼈까지 다치지는 않았다.
그래서 등이 아프기는 했지만 참을 만했고, 똑바로 설 수도 있었다.
“이걸 걸치시오.”
육장봉은 겉옷을 벗어 월령안에게 걸쳐 주었다.
그녀가 어떤 상황을 겪었는지 방금 똑똑히 보았다.
지금 월령안의 몰골이 멀쩡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아주 엉망진창도 아니었다.
아까까지 청희 장공주는 시험을 했을 뿐이다. 또는 월령안에게 덫을 놓았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월령안이 물러나기만 하면 무사하리라고 여기도록 했다. 그리고 월령안이 경계심을 내려놓았을 때, 갑자기 죽이려 들었다.
그렇지 않고 처음부터 월령안을 죽이려고 했으면, 누가 승리할지는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소식이 빠른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었다. 이런 때 월령안이 외출하는 이상, 신변을 보호할 고수를 데리고 있을 게 뻔했다.
“대장군께 감사드립니다.”
그녀가 걸친 옷이 완전히 찢겨 망가지는 바람에, 등이 휑하니 드러났다. 지금 옷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월령안은 거절하지 않고 몸에 걸친 옷을 여몄다. 육장봉에게 고맙다고 하려는 순간, 발을 헛디뎌 그만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조심하시오.”
육장봉은 월령안은 부축하여 자신의 옆으로 끌어당겼다.
월령안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 육장봉의 눈에는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청희 장공주 일행을 보는 눈빛에서는 뼈를 에는 한기가 느껴졌다.
“성문 밖에서 사람을 때리고 죽이려 들다니, 누가 해명하겠느냐?”
“자, 장봉아……. 나, 나다. 청희 이모야. 기억나니? 네가 어렸을 때, 내가 널 안아 준 적도 있단다. 넌 날 어머니라고도 불렀잖니.”
청희 장공주는 육장봉의 얼음장 같은 눈과 마주했다. 눈물 자국으로 얼룩진 기쁜 표정은 마치 행복하고 자애로운 바보 같았다.
만약 청희 장공주가 표정을 싹 바꾸는 광경을 직접 보지 못했더라면, 월령안도 깜빡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그만큼 청희 장공주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에는 조그마한 허점도 없었다. 그래서 월령안도 그녀의 정체를 들춰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육장봉도 속아 넘어가리라고 생각했다. 설령 그가 청희 장공주를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악담을 퍼붓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곧바로 육장봉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희 공주께서는 저를 육 장군이라고 부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청희 장공주는 서글프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장봉…….”
“청희 공주! 말씀을 삼가십시오!”
육장봉은 얼굴을 굳힌 채였다. 청희 장공주의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았다.
멋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이 여인이 자신의 어머니인 줄 알고, 어머니라고 불렀었다. 그것이 그에게 있어서는 평생의 치욕으로 남았다. 또한 아버지를 가장 증오하게 된 계기나 다름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심지어 그를 신경 쓰지 않아도, 미워하더라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를 속이지는 말았어야 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속여 이 악독한 여인을 어머니라고 부르게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볼 낯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장봉아. 내 마음속의 육 장군은 육 오라버니뿐이란다. 내가 널 육 장군이라고 부른다면 육 오라버니는 어쩌지? 육 오라버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너희 모두는 육 오라버니를 잊을 수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못 하겠구나. 나라도 너희 대신 육 오라버니를 기억하련다.”
청희 장공주는 슬픔을 금할 길이 없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몸은 계속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울다가 숨이라도 넘어갈 것 같은 비통한 모습이었다.
월령안은 청희 장공주의 음험한 면을 보았지만, 그녀가 슬프게 우는 것을 보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외모가 아름다운 게 좋긴 좋구나. 나이가 들어도 눈물만 흘리면 사람의 심금을 울릴 수 있다니.’
월령안은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이렇게 신분도 높고, 연기까지 잘하는 여인을 만나자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육장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청희 장공주에게 끌려다니지도 않았다. 그저 차가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공주, 공주의 시위가 어째서 무고한 백성을 때렸는지는 해명해야지 않겠습니까?”
“미안하구나, 장봉…… 장군. 내 잘못이네. 내가 월 낭자를 때리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지금 월 낭자에게 사과하마. 월 낭자가 날 용서할 때까지 사과하마.”
청희 장공주는 화 상궁의 팔을 붙들고, 슬픔을 참으며 겨우 일어났다. 그리고 월령안에게 손을 모아 읍했다.
“월 낭자, 오늘은…….”
월령안은 청희 장공주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지난밤에 먹은 밥까지 토할 것 같았다.
‘사람을 때리고 사과하면 끝이라는 건가?’
하지만 싫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상대는 장공주였다. 그런 상대가 존귀함을 내려놓고 사과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괜찮다’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으면, 감지덕지한 줄도 모르는 옹졸한 사람이 될 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치대로 따져 본들 억지를 쓴다고 할 것이다.
‘청희 장공주는 정말 수완이 뛰어나군. 상황에 따라 약한 척도, 강한 척도 잘하네.’
월령안은 화가 나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지만, 손을 꽉 움켜쥐고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괜찮다고, 억지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꺼내기 직전이었다.
육장봉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사과로 해결이 된다면 관리는 왜 있겠습니까? 사과하실 생각이면, 공주께서는 순천부윤과 이야기하시지요. 여봐라!”
육장봉이 큰소리로 사람을 불렀다.
때마침 육이가 친위대를 거느리고 도착했다.
“장군!”
“이자들은…… 성문 밖에서 소란을 피웠다. 모두 순천부로 끌고 가라.”
육장봉은 그에게 맞아 땅에 널브러진 공주부의 시위를 가리키며 싸늘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청희 장공주를 전혀 안중에 두지 않는 행동이었다.
월령안은 눈앞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마터면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그러게, 사과해서 해결될 거면 관리는 왜 있겠어? 할 말 있으면 공당에서 보자고!’
청희 장공주는 크게 충격을 받은 듯했다. 자신이 들은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슬픈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자, 장봉아……. 혹여 지금 날 원망하는 거니? 나 때문에 어릴 적부터 어머니 없이 자랐다고 일부러 복수하는 것이냐?”
“마마.”
화 상궁은 마음이 안쓰러웠다. 다급히 다가가 청희 장공주를 끌어안고 말했다.
“마마, 슬퍼하지 마세요. 우리가…… 입궁해서 황제 폐하를 찾아가지요. 육 대장군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괴롭힐 수는 없어요.”
“아니야, 황제 폐하를 찾아가지는 말자꾸나. 장봉이가 날 원망하는 것도 당연하지……. 육 오라버니는 나 때문에 장봉이의 어머니와 혼인하지 않았다. 내가 장봉이를 사생아로 만들었어.”
청희 장공주는 화 상궁에게 안긴 채 슬프게 흐느꼈다.
“장공주 마마!”
월령안은 안색이 변해 크게 소리쳤다.
‘청희 장공주! 정말 악독하구나!’
그녀는 청희 장공주가 일부러 그랬다고 확신했다. 청희 장공주가 한 모든 말, 모든 행위에는 목적이 있었다.
월령안은 육장봉의 옷을 잡아당기며 다급히 말했다.
“대장군, 저 여인은 장군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쉬운 사람이 아니에요. 일단 저 여인이 헛소리를 지껄이지 못하게 잡아들이셔야 합니다.”
지금 그 말이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간다면, 내일 육장봉을 탄핵하는 상주문이 황제의 책상 위에 가득 쌓일 것이다.
“괜찮소.”
육장봉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제고 벌어질 수 있는 일이오.”
육장봉은 야율제를 건드렸다. 청희 장공주는 육장봉을 원망해도 다른 방면으로 그에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트집을 잡을 수 있는 것이 그의 출신이었다.
하지만 청희 장공주는 그의 어머니가 혼인하지 않은 몸으로 그를 낳았다는 사실만 알 뿐, 육장봉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몰랐다.
그렇기에 트집을 잡으려고 그를 사생아라고 지칭했다.
청희 장공주는 순식간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자신의 말실수를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급급히 해명했다.
“장봉아, 미안하다. 미안해……. 일부러 너를 사생아라고 한 게 아니야. 난 너의 어머니를 존경한단다. 너의 어머니는 정말 용감하고 강한 여인이었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이었어.”
청희 장공주는 기대에 찬 얼굴을 했다가 또 바로 우울한 표정을 했다. 그리고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장봉아, 날 믿어다오. 나는 육 오라버니가 네 어머니와 혼인하지 못하게 막은 적이 없다. 내가 일부러 널 사생아로 만든 게 아니야. 난 정말, 정말로 육 오라버니더러 네 어머니에게 명분을 주라고 설득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