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청희 장공주의 진정한 모습
청희 장공주의 수려한 미모와 순진하고 맑은 눈망울, 친절한 미소와 마주하자, 월령안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말을 하지 못하니 너무 답답했다.
비로소 육 노부인이 왜 청희 장공주를 멀리하라고 거듭 당부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녀를 마주하고 있으려니, 타당한 논리 따위는 전혀 소용없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월 낭자, 나는 자네가 무릎을 꿇고 내 꽃신을 손보아 주는 걸 싫어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네. 난 모두가 다 이렇게 하는 줄 알았어.”
청희 장공주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사람을 모욕하려는 뜻은 전혀 없어 보였다.
사람을 모욕하고도 자기는 알지 못한다니, 당한 사람만 난감해졌다. 월령안마저 자신이 너무 모질게 대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청희 장공주는 사람을 열 받아 죽게 만들더라도 책임은 지지 않을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월령안은 또 화가 치솟았다.
‘마흔이 되었는데 아직도 이렇게 천진난만하고 세상 물정에 어둡다니. 진짜로 그러는 걸까, 그런 척하는 걸까?
그런데 막상 청희 장공주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면 또 의심이 들었다.
‘내가 혹시 옹졸한 시선으로 좋은 사람을 오해한 걸까? 어쩌면 청희 장공주는 진짜로 내가 공주부의 아랫사람들처럼 무릎을 꿇고 기어가 꽃신을 손보아야 한다고 여긴 걸까?’
청희 장공주의 외모와 분위기는 월령안조차 그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할 정도로 굉장했다.
청희 장공주가 마차에서 내리자, 모두 하나같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는 누구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이거 정말 골치 아프게 됐네.’
월령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청희 장공주에게 읍했다.
“마마, 소녀가 예전에 미인방의 주인이었던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소녀는 침모가 아니어서 정말로 꽃신을 수선하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부디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등을 두 번이나 얻어맞았지만, 이 억울함을 갚지는 못할 듯했다. 그녀는 정말로 청희 장공주를 상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정말 할 줄 모른다고?”
청희 장공주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눈시울이 이미 그렁그렁해 곧 울음이 터질 듯했다.
“하지만 등요는 네 솜씨가 아주 좋다고 했어. 혹시 날 속이는 게 아닌가? 내가 대장공주가 아니라서, 황제 폐하께서 나를 무시하시니, 나를 속이는 게 아닌가? 날 도와주기 싫으니까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은 아니고?”
월령안은 감탄한 나머지 청희 장공주 앞에서 무릎을 꿇을 뻔했다.
‘이 모함하는 능력은 정말이지……. 저 ‘연약한’ 마음이라니! 난 분명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청희 장공주는 어쩜 이렇게까지 망상을 할 수 있지? 너무 억울해!’
월령안이 잠깐 황당해져서 갈피를 잡지 못했을 뿐인데, 그 사이 청희 장공주는 울음을 터뜨렸다.
“아…… 그래. 그런 것이었어. 자네더러 도와달라고 한 내 잘못이로구나. 하지만 월 낭자. 이 꽃신은 내게 정말 중요한 것이야. 육 오라버니가 날 위해 특별히 구해 온 것이다. 육 오라버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거라고는 이 꽃신밖에 없어. 내겐 이 꽃신밖에 안 남았거늘……. 이렇게 하나 남은 추억마저 내게서 빼앗으려는 거니?”
청희 장공주는 슬픔에 젖은 눈으로 월령안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물론, 통곡하지는 않았다. 그저 미인답게 눈물만 방울방울 흘렸을 뿐이다.
그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마음을 떨리게 했다. 그 서러움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저도 모르게 와락 품에 끌어안아, 조심스레 지켜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청희 장공주는 슬피 울다가 몇 번이고 숨이 넘어갈 뻔했다. 마침내 풀썩 꿇어앉아 말했다.
“월 낭자, 제발 부탁하네……. 날 도와주게. 이 꽃신은 나한테 아주 중요한 것이라네.”
‘어이가 없네.’
월령안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건 도대체 무슨 수작이지? 어떻게 말만 했다 하면 울고, 꿇어앉을 수가 있어? 전혀 상식적이지가 않잖아? 얻어맞은 쪽은 분명히 나인데, 왜 내가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월령안은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그 자리에 잠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나 청희 장공주가 무릎을 꿇은 순간, 공주부의 시위가 폭발하고 말았다. 벌떡 일어서더니 장창을 월령안의 목에 겨누었다.
“감히 일개 백성이 마마를 능멸하다니! 죽어 마땅하다!”
“마마, 슬퍼하지 마십시오! 월 낭자가 도와주지 않겠다니, 황궁으로 가서 태후 마마께 부탁을 드리면 어떨지요. 분명 태후 마마께서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침모를 찾아 마마의 꽃신을 고쳐 주실 겁니다.”
화 상궁은 아까 청희 장공주의 명령을 받고 옆으로 물러나 있었다. 그런데 청희 장공주가 땅에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더니, 자신도 무릎을 꿇고 기어갔다.
월령안은 화 상궁의 능숙한 동작을 보자 자신의 목을 겨눈 장창도 잊고 입을 떡 벌렸다.
‘청희 장공주 옆에는 어떤 인간들이 있는 거야? 무릎을 꿇은 자세로도 저렇게 능숙하게 기어가다니. 설마 아까 내게 기어가라고 한 게, 정말 나를 모욕하려는 게 아니라 당연한 거였나?’
월령안은 냉수라도 먹고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 * *
한편, 뒤쪽에 있는 마차에서는 등요 공주가 창문을 열고, 공주부의 시위가 월령안의 목을 겨누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청희 고모가 나서면 절대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청희 고모는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월령안이 오늘 무사히 빠져나온다고 해도, 저 꼬락서니로 춘일연에 참석하면 웃음거리나 되겠지.’
탁!
등요 공주는 마차의 창문을 닫고, 우쭐해서 웃었다.
“월령안, 감히 나랑 장봉 오라버니를 놓고 싸워 보겠다고? 이제 넌 끝이야.”
* * *
청희 장공주는 땅에 꿇어앉은 채 흐느끼며 울었다. 하지만 입으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월 낭자를 다치게 하지 마라. 이 일은 월 낭자와는 상관이 없단다. 내가 저절로 넘어진 것이니 월 낭자와 상관이 없어. 월 낭자가 날 밀친 게 아니니 다치게 하지 마라.”
월령안은 또다시 울화통이 터졌다.
‘청희 장공주는 날 감싸려는 걸까, 아니면 골탕 먹이려는 걸까?’
아니나 다를까, 청희 장공주가 말을 마치자마자 공주부의 시위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장창을 높이 쳐들고 월령안의 다리를 거세게 내려쳤다. 또 월령안에게 새로운 죄명을 덮어씌웠다.
“장공주 마마를 모해하다니. 죽어 마땅하다!”
“앗!”
월령안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무릎을 꿇은 거로는 부족한지, 시위는 다시 한번 장창을 쳐들고 그녀의 등을 내리쳤다.
퍽!
둔탁한 소리가 울리며 월령안은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녀는 마침 청희 장공주의 눈앞에 엎어져 있었다.
고개를 들자, 청희 장공주의 아름답고 초연한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은 얼굴을 숙인 채 월령안을 마주 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차갑고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소리 없이 세 글자를 속삭였다.
‘죽어라.’
월령안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넋이 나간 채 어찌할 줄 몰랐다.
그렇게 싸늘하고 무시무시한 웃음은 처음이었다. 청희 장공주가 나중에 소리 없이 말한 세 글자가 무슨 뜻인지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 모습이야말로 청희 장공주의 진면목인가? 착하고, 유약하며 천진난만한 모습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가식이라고? 그래, 그게 맞아!’
정말 멍청할 정도로 착하고 천진난만하기만 한 사람이었다면, 다른 사람이 자신을 몇십 년이나 좋아하게 하지는 못하리라. 꾀가 많고 수완이 뛰어나야만, 잠한성 같은 대협객이 그녀를 위해 죽네 사네 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윽!”
시위의 거센 매질에 월령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청희 장공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겁을 먹은 듯 화 상궁에게 안긴 채 울음을 터뜨렸다.
“화 상궁, 저들에게 때리지 말라고 해라……. 난, 월 낭자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믿는다. 월 낭자는 춘일연에 참석해야 하는걸.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참석하겠는가. 오늘 일은 없던 일로 하자꾸나. 월 낭자랑 더는 싸우지 말자, 응?”
‘청희 장공주는 역시 무서운 사람이었어.’
월령안은 땅에 엎드린 채 몰래 쓴웃음을 지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녀는 청희 장공주가 이용당하는 줄 알았다. 상대방의 신분이 존귀하니 참을 수 있으면 참자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결과는…….’
월령안은 영녕후의 마차 뒤쪽에 서 있는 황궁의 마차를 보고 비웃었다.
지금 보니, 누가 누구를 이용하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등요 공주는 정말 어리석기 그지없었다.
“마마, 마마께서는 정말 어지십니다. 이깟 장사치 계집이 마마를 안중에 두지도 않고, 감히 봉호로 비웃으며 마마의 머리 위로 기어오르지 않았습니까.”
화 상궁은 동의하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외출하실 때, 세자께서 분부하셨습니다. 이런 멋모르는 백성은 용서하실 필요가 없다고, 죽을 때까지 때려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세자께서 책임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화 상궁은 말하면서 월령안에게 눈을 부라렸다.
“안 된다. 살인은 안 된다. 사람을 죽이지 마라. 사람을 죽이는 건 나쁜 짓이야.”
청희 장공주는 더욱더 슬프게 울었다.
월령안은 시위의 장창에 짓눌려 꼼짝달싹하지도 못했다. 땅에 엎드린 채 온 얼굴이 흙투성이가 되는 바람에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눈물까지 찔끔 흘릴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월령안은 늘 영리했다. 표정 관리 또한 일류라고 자부했었다. 하지만 오늘에야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얄팍한 능력은 청희 장공주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청희 장공주의 능력이 이렇게 대단하니, 월령안으로서도 그녀에게 당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청희 장공주가 대놓고 그녀를 적대시하고 있으니, 굳이 한 번, 또 한 번 참을 필요가 없었다.
월령안은 더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청희 장공주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장공주께서는 길거리에서 저를 때려죽이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아니면, 제가 뭘 어찌할지 아시겠지요.”
“감히 마마를 위협하다니. 죽어 마땅하다! 여봐라, 이 천한 것을 때려죽여라!”
화 상궁은 생각도 하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귀족이 잘못을 저지른 평민을 때려죽이는 데는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다. 신분에 귀천이 있으니, 지체 높은 사람들의 생각이란 보통 그러했다.
더구나, 청희 장공주의 지위는 친왕과 비견되었으며 봉지와 병사도 있었다. 심지어 법을 집행할 권리까지 있었다. 비록 그녀의 봉지에서만 행사할 수 있는 권리였지만, 변경에서 사람 한둘을 죽인다고 하더라도 황제는 참을 게 뻔했다.
황제로서도 뾰족한 수는 없을 것이다. 고종 황제의 유언이 있는 데다, 청희 장공주가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니었다. 모든 것은 아랫사람들이 한 일이었다.
만에 하나 황제가 따지더라도, 아랫사람에게 죄를 물으면 되는 일이었다. 청희 장공주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청희 장공주는 여전히 단순하고, 티 없이 순수한 미인으로 남을 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
심지어 직접 나서 두어 번 말린다면, 명성도 더욱 높아질 것이다.
“허!”
월령안은 화 상궁의 말을 들었지만, 당황하거나 겁을 먹지 않았다. 냉소를 짓더니, 바로 목에 걸고 있던 황금 장신구를 꺼내 던졌다.
청희 장공주가 단순히 괴롭히고 모욕하기만 한다면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목숨을 노린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미안하지만, 그것까지 참을 수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