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꽃신을 고쳐 주게
월령안은 영녕후 세자의 굳은 얼굴과 청희 장공주가 종묘에서 사흘 밤낮을 울었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다급히 해명에 나섰다.
“장공주 마마, 소녀는…….”
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퍽!
월령안이 입을 열자마자, 시위의 장창이 세차게 그녀의 등을 내리쳤다.
“무엄하다!”
“윽!”
그 매서운 매타작에 월령안은 고통스럽게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땅에 넘어지는 순간, 그녀는 웃었다.
‘역시 악명 높은 장공주로군. 오늘은 내가 진 거로 하자. 하지만 청희 장공주, 내가 오늘 여기서 죽기를 기도하는 게 좋을걸.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변경을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전설을 쓸 의향이 있었다. 예를 들면, 영녕후부와 청희 장공주의 명의로 된 재산 전부를 날려 버린다거나 말이다.
시위는 매질 한 대로는 부족하다 여겼는지, 다시 한번 장창을 쳐들고 월령안을 내리치려 했다.
“윗사람을 거스르다니, 이런 아랫것은 때려죽여야지!”
“안 돼! 때리지 말거라!”
청희 장공주가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더니,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월 낭자를 때리지 말거라. 나는, 나는……. 월 낭자의 도움이 필요할 뿐이다. 월 낭자를 때리면 아니 된다. 알겠느냐?”
그녀는 분명 장공주였고, 나이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시위를 만류하는 목소리나 어조는 열몇 살 된 소녀처럼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했다. 못된 꿍꿍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월령안은 그저 웃고만 싶었다.
‘정말 여우가 따로 없네!’
그녀도 상업계에서 안 만나 본 사람이 없었다. 청희 장공주 같은 유형의 사람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처럼 신분이 고귀한 사람이 한없이 착하고 멍청한 척하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었다.
‘그 고귀한 신분을 내려놓고 멍청한 척하다니. 그래서 청희 장공주가 변경에서 무적이었구나.’
“마마, 자비로우십니다.”
시위는 장창을 거두고 물러났다.
월령안의 등이 화끈거리면서 아프기 시작했다. 입가에도 피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손을 들어 얼굴의 피를 닦고, 애써 기어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청희 장공주에게 고개를 숙이고 큰절을 올리며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마마, 감사드립니다.”
얻어맞았지만, 때린 사람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 했다. 이것이 바로 신분이 없는 평민이 귀족 앞에서 보여 줘야 하는 비굴함이었다.
그녀는 삼 년 동안 장군 부인이라는 자리를 누렸다. 그러나 십오 년 동안은 일반인으로서 이런 식으로 살아왔다. 신분의 차이가 분명한 이상, 아무리 불만스러워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다. 나와 장봉의 아버지는 좋은 친구 사이였지. 나는 장봉이가 자라는 모습도 다 지켜보았다. 장봉이도 날 이모라고 불렀었지. 자네는 전에 장봉이의 안사람이었지? 설령 예법을 잘 몰라서 내게 무례를 저질렀다 해도, 장봉이의 체면을 봐서 넘어가 주마. 걱정하지 마라.”
청희 장공주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맑았다. 마치 ‘네가 잘못했지만, 난 네 잘못을 묻지 않는 착한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월령안은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의 심지가 굳센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렇지 않았다면 청희 장공주의 ‘착하고 너그러운’ 모습에 화가 나서 분통이 터졌을 것이다.
월령안은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마마, 감사드립니다.”
게다가 육장봉이 청희 장공주를 ‘이모’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도 믿을 수가 없었다.
육씨 가문과 영녕후는 왕래가 없었다. 육장봉이 오만방자하고 말이 안 통했지만, 생각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절대 자신을 낮추며 청희 장공주에게 아부를 떨었을 리가 없다.
가뜩이나 그는 여자라고 해서 봐주는 법도 없었다. 내키지도 않는데 청희 장공주를 떠받들었을 리는 더욱 없었다.
물론,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월령안이 아는 육장봉이라면, 청희 장공주 같은 성격의 여인을 절대 예외로 취급할 리가 없었다.
“내가 말했다시피, 나는 단지 장봉이의 체면을 봐서 그러는 거란다. 그러니 월 낭자가 고마워할 필요는 없네.”
청희 장공주의 입에서 드디어 정상적인 말 한마디가 나왔다. 하지만 곧 화제가 바뀌었다.
“허나 진심으로 내게 감사하다면…… 여기 내 꽃신을 고쳐 주게. 이 꽃신은 장봉이의 아버지가 내게 선물해 준 거라네. 내가 아주 소중히 여기느라, 평소에는 아까워 신지도 않았지. 자네가 내 꽃신을 제대로 고쳐 준다면 큰 상을 내리겠네.”
청희 장공주는 그렇게 말하며 마차 밖으로 발 한 짝을 내밀었다.
발에 신은 꽃신은 정교하고 화려했다. 겉에는 난초 무늬가 수 놓여 있었다. 그런데 신 끝부분의 꽃송이가 어디에 걸렸는지, 실밥이 드러난 상태였다.
고작 실밥이 나온 걸 고치는 것쯤은 침모에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청희 장공주는 굳이 그녀에게 시켰다. 트집을 잡으려는 게 분명했다.
월령안은 현재 상황이 청희 장공주가 일부러 꾸민 일임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청희 장공주에게 무슨 일로 밉보였을까?’
월령안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마마, 소녀는 고칠 줄 모릅니다.”
“보지도 않고 어찌 못 고친다 하는가?”
청희 장공주의 목소리에 다시 울음이 섞이기 시작했다.
“다시 잘 보면 안 되겠느냐? 혹시 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느냐? 내가 듣기로는 자네가 미인방을 운영했다지? 그럼 틀림없이 자네 손재주도 뛰어날 게 아닌가.”
“마마, 소녀가 미인방을 운영했사오나, 주인은 이런 일을…….”
“그저 한 번 보는 것도 싫은가? 그렇게도 내가 싫다는 말인가? 내가, 내가 네게 못되게 군 적이라도 있가?”
청희 장공주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했다. 말 한마디라도 잘못했다가는 당장 울어버릴 기세였다.
청희 장공주가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공주부의 시위가 호통을 쳤다.
“간도 크구나, 월령안! 어서 앞으로 다가가지 못할까.”
“예, 마마.”
월령안은 인내심이 정말 강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청희 장공주 같은 인간을 만나자 화가 나서 폭발할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이 사람은 사람 말을 전혀 못 알아듣잖아.’
그녀는 양측에서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고 있는 시위를 흘깃 바라보고,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꾹 삼켰다.
‘하지만 상황이 이러하니 참을 수밖에 없군!’
월령안은 한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나려고 했다. 그 순간, 공주부 시위의 장창이 또다시 그녀의 등에 닿았다.
“무엄하다! 마마께서 일어나라고 하지 않으셨으니 일어나면 안 된다. 기어서 가거라!”
‘기어가라고?’
월령안은 시위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상대를 힐끔 보았다. 곧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진심이십니까?”
시위는 잠시 멍해졌지만, 곧 정신을 차리더니 손에 든 장창에 더욱 힘을 주었다.
“뭐 하는 것이냐? 어서 움직이지 않고.”
월령안은 장창에 눌려 쉬이 허리를 들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오만하게 쳐들고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아랫사람을 예의와 겸손으로 대하시고, 백성을 자애로운 마음으로 아끼십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조례에서도 무릎 꿇는 것을 취소하셨는데, 지금 저더러 마마 앞까지 기어서 가라는 겁니까? 청희 장공주께서 황제 폐하보다 존귀하다는 말입니까?”
‘황제가 못마땅하게 여기는 공주가 이토록 거들먹거리다니. 오래 살기 싫은 건가?’
시위는 잠시 멍해졌다. 갑자기 장창을 든 손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그래도 큰소리를 쳤다.
“헛소리하지 마라. 마마께서는 늘 아랫사람을 아끼시거늘, 건방진 백성이 윗분을 능멸하는구나.”
“그렇다면 마마께서는 늘 아랫사람을 아끼시니, 절 원망하지도 않으시겠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월령안은 냉소를 지었다. 상대방의 장창을 움켜쥐더니 천천히 일어났다.
이 광경을 본 다른 시위들은 크게 화가 났다. 그들은 월령안을 겹겹이 둘러싸고 말했다.
“월 낭자, 이게 바로 마마를 능멸하는 짓이오. 죽을죄란 말이오.”
“영녕후부는 평범한 백성을 괴롭히려는 겁니까?”
월령안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체 높은 영녕후께서, 일반 백성을 길거리에서 괴롭히고 모욕하다니. 어사대(御使臺) 대인들이 참 좋아하시겠습니다.”
‘이놈들이 하나같이 내가 물러터진 홍시처럼 만만한 모양이지?’
청희 장공주가 울거나 하소연하는 데는 도가 텄다지만, 그런 것쯤은 그녀도 할 줄 알았다.
게다가 지금은 월령안이 청희 장공주보다 훨씬 약자였다. 청희 장공주가 같은 수법으로 월령안을 상대한다면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
“월령안! 무엄하다!”
공주부의 시위가 크게 화를 냈다. 우두머리가 월령안을 가리키며 명령을 내렸다.
“저 여인을 당장 끌어내라. 반항한다면 죽여도 좋다.”
“영녕후부 분들이 제 식견을 넓혀 주시는군요.”
월령안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대신 오른손을 몰래 꼭 움켜쥐고 그녀를 에워싼 시위를 조준했다.
그녀는 영리한 상인으로서, 바로 무릎을 꿇고 청희 장공주의 발치까지 기어가 사죄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성은 무릎을 꿇고 기어가는 게 가장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기서 무릎을 꿇는다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월령안은 공주부의 시위들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때, 청희 장공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춰라! 너희도 참……. 월 낭자는 연약한 여인인데 어찌 그리 괴롭혀. 그녀는 내가 모신 귀한 손님이니, 그렇게 대하면 아니 된다.”
청희 장공주는 어느새 마차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자, 세상이 갑자기 밝아진 것 같았다.
북쪽에 가인이 있어, 세상에 견줄 이 없이 홀로 서 있네(北方有佳人 絶世而獨立).
월령안은 청희 장공주를 본 순간, 잠한성 같은 대영웅이 왜 여인 하나 때문에 무너졌는지 알게 되었다. 만약 그 여인이 청희 장공주라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청희 장공주가 나타난 순간,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모두 그녀를 위한 배경이 되었다.
아름다웠다. 하늘과 땅이 빛을 잃을 만큼 아름다웠다. 뼈는 옥으로, 피부는 얼음과 눈으로 빚은 듯했다. 버드나무 같은 유연한 자태와 가을날 물처럼 맑은 분위기를 갖추었다.
그녀는 단정하고 고운 자태로 서 있었다. 절세가인이란 어떤 모습인지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이미 마흔두 살이라는 점이다. 시간이 그녀에게만은 멈춰 선 듯했다. 얼굴에서는 나이 든 티라고는 전혀 나지 않았다. 눈빛마저 소녀 특유의 앳된 느낌을 간직하고 있었다. 월령안과 함께 서 있으니, 자매처럼 보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청희 장공주를 보자, 천하의 월령안도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월령안뿐만이 아니었다. 매일 청희 장공주를 지키는 시위도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자 잠시 넋을 잃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분분히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소인이 장공주 마마를 뵙습니다. 장공주 마마 천세.”
이때,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었다. 초라한 모습을 한 월령안만이 청희 장공주의 앞에 서서 마주 보고 있었다.
청희 장공주는 월령안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에는 수줍음과 불안감을 담겨 있었다.
“월 낭자, 화내지 말게……. 자네더러 기어 오라는 뜻은 아니었어. 아랫것들이 너무 긴장한 탓에 그런 것이니 화를 내지 말아다오. 그들도 나를 걱정해서 그런 걸세.”
월령안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등의 상처가 쓰라려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청희 장공주는 그녀가 얻어맞을 때는 정작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일이 커질 것 같으니 그제야 얼굴을 내밀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