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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212)화 (212/1,004)

212화 무릎을 꿇으시오

먼지가 뿌옇게 이는 성 밖에 갑자기 치맛자락을 쥐고 달려가는 여인이 나타났다. 산뜻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은 순식간에 많은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저 사람은 누구지? 저렇게 긴 치마를 입고 저리 빨리 뛰다니. 넘어질까 걱정도 안 되나?”

“뒤에 관리들이 따라가는 거로 봐서는 대갓집 규수인가 본데?”

“앗, 저기 봐. 땅에 핏자국도 있어.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성문을 들락거리던 백성들은 월령안이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저마다 발걸음을 멈추었다. 다들 호기심에 차 수군거리며 서로 물어보았다.

일반 백성뿐만 아니라, 말을 타고 성을 나가던 귀족 자제들도 속도를 늦추고 옆 사람에게 물었다.

“저 낭자는 누구지? 저렇게 빨리 달리다니, 무슨 일이지? 어디, 우리도 가서 보지 않겠나?”

이 귀족 자제들도 춘일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중에는 월령안을 알아본 사람도 있었다. 그는 앞으로 나가려는 일행을 붙잡았다.

“저 사람, 월 낭자로군!”

“뭐? 월씨 가문의 그 재신 말이야?”

몇몇 젊은 공자는 순식간에 눈을 반짝거렸다.

“기다릴 게 뭐가 있어? 우리가 가서 월 낭자에게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보세. 월 낭자가 우리에게 신세를 진다면, 앞으로 돈 버는 일에 우리도 챙겨 주겠지. 그럼 우리도 부자가 될 게 아닌가.”

삼 년 전, 변경 상업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월령안의 이름은 전설이 되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녀와 친분을 쌓고 싶어 혈안이 되었던가.

그러나 그녀는 육 대장군의 부인이었기에 지체가 높았다. 어지간한 신분으로는 그녀와 협력할 자격조차 없었다. 그들처럼 이름만 있고 실권은 없는 도련님은 더욱이 그녀와 협력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육 대장군이 그녀를 내치면서 일품 장군 부인이라는 신분도 사라졌다. 그들이 그녀와 친분을 쌓는 일은 썩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사고 치지 말게! 저기 좀 보게. 저것은 영녕후부의 마차고, 그 뒤에 있는 것은 황궁의 마차야. 황궁의 마차를 뒤에 달고 갈 수 있는 게 영녕후부의 누구겠는가?”

월령안을 알아 보았던 젊은 공자는 길가에 세워진 마차와 말을 가리키며 일행을 가로막았다.

“저건…… 청희 장공주?”

다른 젊은 공자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더니 다급하게 말했다.

“이보게, 우리 얼른 지나가세.”

그는 말을 마치더니 말을 거세게 채찍질하며 길을 재촉했다.

옆에 있던 사람은 그가 미친 듯이 앞으로 달려 나가자,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응? 청희 장공주께 예를 올리러 가는 게 아니고?”

“예는 무슨? 얼른 가자고. 자네 어머니께서는 청희 장공주를 만나면 피해 가라고 가르치지 않으시던가?”

공자들은 말을 몰아 떠나갔다. 누구도 더는 월령안에게 잘 보이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시위가 장창을 들고 뒤에서 몰아대는 탓에 월령안은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쥐고 미친 듯이 달렸다. 짧은 거리였지만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채였다.

“멈춰라!”

청희 장공주의 대열 앞에 도착하자, 시위가 월령안을 막아섰다.

“소녀 월령안, 명령을 받고 장공주 마마를 뵈러 왔습니다.”

월령안은 숨을 돌리고 읍을 하며 예를 올렸다.

“월 낭자, 장공주 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시지요.”

나이가 지긋한 상궁이 느린 걸음으로 월령안 앞에 섰다. 그녀는 오만한 눈빛으로 월령안을 슬쩍 한 번 훑어보았다. 월령안이 무슨 더러운 것이라도 된다는 듯, 그 시선에는 경멸과 불쾌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네.”

월령안은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등에서 느껴지는 불에 덴 듯한 아픔은 애써 무시했다. 그녀는 늙은 상궁을 따라 청희 장공주의 마차 앞으로 갔다.

“소녀가 청희 장공주를 뵙…….”

월령안이 두 손을 모으고 읍을 하며 예를 올리려던 순간이었다. 늙은 상궁의 비꼬는 목소리가 들렸다.

“월 낭자, 육 장군께서 내쫓으신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새 신분에 적응을 못 한 겁니까? 아직도 일품 장군 부인인 줄 아십니까?”

‘역시, 좋은 의도로 부른 게 아니었군.’

월령안은 움직이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단지 읍하려던 자세를 유지했다.

“월 낭자, 장공주 마마를 뵐 때는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려야 합니다.”

상궁이 음험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월령안은 머뭇거리지 않고 무릎을 꿇었다.

“소녀가 장공주 마마를 뵙습니다.”

평민은 관리를 보면 예를 올려야 한다. 황족, 귀족을 만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중요한 장소가 아니고는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하물며 황제를 만날 때도 반드시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려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청희 장공주가 월령안더러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라고 한 것은 모욕을 주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월령안이 일품 장군 부인이던 시절에는 청희 장공주를 만나도 고개만 끄덕이면 됐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일개 평민이었다.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일품 부인까지 해 보신 분인데, 이런 예법도 못 배우셨습니까?”

늙은 상궁은 트집을 잡으며 월령안을 차갑게 보았다.

월령안은 웃으며 일어나 말했다.

“전 정말 몰랐습니다. 마마님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누가 일어나라고 했는가!”

늙은 상궁은 굳은 얼굴로 호통쳤다.

“무릎을 꿇으시오!”

“무릎을 꿇고 하는 큰절은 어떻게 올리는 건가요? 마마님께서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월령안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대답했다. 그 자세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어 트집을 잡을 수가 없었다.

‘월 낭자의 예법은…….’

육씨 가문으로 시집간 뒤, 상인 집안 출신이라 무식하고 무례하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특별히 큰돈을 들여 황궁에서 나이 지긋한 상궁을 모셔와 예법을 배웠다.

예법을 배울 적에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른다.

그런 만큼, 예를 올리는 자세가 완벽하다고는 못 하더라도, 트집이 잡힐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그녀가 청희 장공주에게 올린 예는 숙배(肅拜 - 양쪽 무릎을 나란히 꿇고 손을 들었다 내리는 절)였다. 조금도 틀린 점이 없었다.

청희 장공주의 상궁이 일부러 트집을 잡는 게 분명했다.

“마마께서 일어나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못하오. 월령안은 무릎을 꿇으시오!”

늙은 상궁은 화가 나서 엄숙한 얼굴로 호통쳤다.

“화 상궁, 물러나게.”

마차 안에 있던 청희 장공주가 가볍게 명령을 내렸다.

청희 장공주는 젊은 나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여전히 맑고 부드러워, 소녀의 목소리처럼 달콤하게 들렸다.

“네, 장공주 마마.”

월령안을 호통치던 늙은 상궁은 움츠러들더니, 곧 허리를 숙인 채 물러갔다.

“월 낭자…….”

청희 장공주는 다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월령안은 온몸을 바싹 긴장하며 청희 장공주에게 읍했다.

“소녀 여기 대령했습니다.”

“화 상궁이 비록 자네에게 호통을 쳤지만, 틀린 말은 하지 않았네. 신분의 귀천이 유별한데, 자네가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려야지.”

청희 장공주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말을 마치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예를 올리게.”

월령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변명하지 않고 무릎을 꿇었다.

“네, 장공주 마마.”

육 노부인이 살아계실 때. 청희 장공주를 멀리하라고 거듭 당부했었다.

만약 청희 장공주를 건드린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든 없든, 나중에는 다 그녀의 잘못이 된다고 했다.

월령안은 청희 장공주와 엮인 적은 없었지만, 그녀에 대해서는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다.

청희 장공주는 남자들이 좋아하는 유형이었다.

그녀의 가냘픈 모습은 다 큰 어른 같지가 않았다. 언제나 보호가 필요해 보였고, 늘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한눈을 팔았다가는 그녀가 다칠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주었다.

물론 청희 장공주의 고귀한 신분을 생각하면, 몸이 상할 일은 없으니 마음을 다친다는 말이다.

남편인 영녕후부 세자는 무언가에 씐 사람처럼 그녀를 더욱 싸고돌았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서러움을 느끼면, 그가 바로 상대방을 찾아가 따졌다.

만약 상대방의 신분이 너무 높아서 세자로서도 상대가 되지 않으면, 청희 장공주는 황실의 종묘 밖에서 내내 울었다.

아버지인 고종(高宗) 황제께서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며, 아버지의 보호가 없으니 공주인데도 아무에게나 쉽게 괴롭힘을 당한다고, 그래도 누구 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다고 울었다.

그렇게 해도 소용이 없으면, 또 황제가 자기를 종묘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고종 황제께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한다며 통곡했다.

청희 장공주의 울음은 가히 일류였다. 가장 심했을 때는 종묘 밖에서 사흘 밤낮을 운 적도 있었다.

울다 지치면 종묘 밖에서 잤고, 자다가 깨면 또 계속해서 울었다. 마치 물로 만든 사람처럼 눈물이 끊이지 않고 계속 흘러나왔다.

그녀의 울음 공격을 받자, 황제도 어쩔 줄 몰라 했다. 두통을 참으며 그녀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청희 장공주가 울음을 그치도록, 그녀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사과하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청희 장공주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람 대부분은 정작 자신이 그녀에게 어떻게 ‘상처’를 주었는지조차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그들은 그저 어리둥절한 채로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

청희 장공주의 명성은 너무 드높았다. 게다가 무패에 가까운 전적을 자랑했다. 그러니 변경에서는 그녀를 감히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되었다.

월령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월령안은 전혀 따지려 들지 않았다. 청희 장공주 앞에서는 잔뜩 겁먹은 티를 냈다. 무릎을 꿇으라면 꿇었고, 머리를 조아리라면 조아렸다.

그녀로서는 이 가냘픈 공주의 성미를 건드릴 수 없었다. 어쨌든 실권은 없는 공주이니, 말과 행동으로만 모욕할 뿐 다른 것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정도는 참으면 그만이었다.

“월 낭자, 자네도 나를 원망할 건가? 내가 인정머리가 없다고, 억지로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하게 했다고 말이야.”

청희 장공주는 나긋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불안한 것 같기도 했고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했다.

월령안은 참지 못하고 눈을 흘겼다.

변경의 귀족 여인들이 왜 이 공주를 무서워하는지 드디어 알 것 같았다.

분명 허겁지겁 달려와 비굴하게 무릎을 꿇은 사람도, 시위의 장창에 베여 등에 상처가 난 사람도 월령안이었다. 그러나 청희 장공주가 입을 열자마자, 마치 월령안 쪽에서 트집을 잡고 그녀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였다. 또 청희 장공주는 월령안이 화를 낼까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하며 겁을 먹고 해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남들이 들으면, 월령안이 청희 장공주에게 예를 올리기 싫어 겁박했다고 여길 만한 상황이었다.

‘이런 여인은 정말 무시무시하구나.’

날고 긴다는 월령안도 청희 장공주에게는 두 손 들고 말았다.

그래서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고 난 뒤 입을 열었다.

“장공주 마마께서는 교양이 있고 사리에 밝으며, 예법에 따라 행동하시는 분이신데, 어찌 인정이 없다 하겠습니까?”

월령안은 자신이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고 여겼다. 단어 하나하나에 문제가 없으니, 이를 조합해서 써도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차 안에서는 청희 장공주가 구슬피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흑흑흑……. 내 이럴 줄 알았네. 자네도 날 우습게 보는군. 내가 대장공주로 책봉되지 못했다고 날 비웃고 야유하는 게야.”

월령안은 어이가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이 연약해 보이는 공주는 남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모함하는 데 너무나도 능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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