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아가씨를 보고 후회하지나 마시지요
월령안은 조롱하듯이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육장봉은 자기가 신이라도 되는 줄 아나?’
그녀는 그가 손에 든 옥부고를 잠깐 보았다. 다시 시선을 내리깔아 눈 속의 비웃음을 거두었다.
그녀는 육장봉과 따지지 않았다. 뒤로 물러서며 깊이 절을 했다.
“밤이 깊었으니, 대장군께서 다른 일이 없으시다면 붙잡지 않겠습니다.”
“다 썼으니 버리는 거요?”
육장봉은 손에 든 옥부고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소매에서 또 한 병 꺼내 똑같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월령안, 당신은 늘 현실적이로군.”
“약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월령안은 부인하지 않았다. 이제 더는 육장봉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육장봉과 그녀는 애초에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그가 그녀를 싫어해도 좋고, 멸시해도 좋았다. 모두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육장봉은 월령안 양어깨에 드리워진 반쯤 마른 긴 머리카락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됐소. 일찍 쉬시오.”
내일, 월령안은 또 힘든 전쟁을 치러야 한다. 오늘 밤은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적당한 때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넘쳐나는 게 시간이었다.
“장군, 살펴 가세요.”
월령안은 깊이 절을 하며 육장봉을 배웅했다.
‘월령안은 날 얼마나 쫓아내고 싶었던 거지?’
육장봉은 월령안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옷소매를 떨치며 떠나갔다.
펄럭, 하고 큰 소리를 내는 옷소매가 주인의 상한 마음을 고스란히 나타냈다.
월령안은 고개도 들지 않고 육장봉을 배웅하는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그가 떠난 지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상처를 거칠게 훔쳤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욕을 했다.
“육장봉, 당신이 잘해 준 것 따위는 기억하지 않을 거야.”
‘영원히 기억하지 않을 거야.’
월령안은 앞으로 다가가 문을 거세게 닫았다. 그리고 돌아와 탁자 위에 놓인 약병을 보자, 생각도 하지 않고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휙 손을 들어 올렸지만, 억지로 멈췄다. 약병을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꽉꽉 눌렀다.
“됐다. 살아 있는 것도 아닌 물건에 화풀이하진 말자.”
탁!
월령안은 약병들을 경대에 올려놓았다. 머리가 마르지 않은 것도 개의치 않고, 촛불을 끄자마자 침상에 누웠다.
“보는 눈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남자랑 실랑이해서 뭐 해.”
월령안은 이불을 당겨 얼굴을 가리고 눈만 빼꼼 내밀었다.
그녀는 육장봉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났으니 오늘 잠은 다 잤다고 여겼다. 하지만 침대에 누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까무룩 잠이 들었다.
분명 너무 피곤해서 그랬을 것이다.
* * *
이튿날 아침, 월령안은 날이 밝기도 전에 온 하인의 부름에 눈을 떴다.
춘일연에 참석하려면 평소처럼 긴 치마 하나만 달랑 입고 나갈 수는 없었다.
오늘만큼은 성대하게 치장해야 했다. 그러려면 시간이 오래 걸렸다.
월령안은 일어나자마자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얼굴의 빨간 뾰루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하녀에게 거울을 가져오라고 했다. 거울을 보고 얼굴의 뾰루지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확인하자, 마음이 놓였다.
“궁중의 비약이라더니. 정말 소문대로네.”
어젯밤 육장봉에게 오기를 부리지 않고, 고분고분하게 그가 약을 바르도록 놔두길 잘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오늘 상처가 낫지 않아 낭패를 보았을 것이다.
월령안은 아직도 경대에 놓여 있는 옥부고를 보면서 웃었다.
이 연고 두 병을 봐서라도 육장봉과 실랑이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인은 월령안이 소세(梳洗)하도록 시중을 들고, 또 간단한 조식을 올렸다. 그녀가 식사를 마치자, 오늘 그녀가 입을 옷을 대령했다.
월령안이 오늘 입을 치마는 월씨 가문의 수많은 침모가 춘일연 참석용으로 특별히 밤을 새우며 만든 옷이었다.
치마는 선명하면서도 단아한 회색의 가는 실로 짠 천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 위에는 침모들이 특별한 기술을 발휘해 진짜처럼 아름다운 꽃을 한 송이, 한 송이 수놓았다.
치마가 개켜져 있을 때는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치마를 펼치면, 어깨부터 발목까지의 꽃송이가 전부 입체감을 드러내며 진짜 꽃처럼 보였다.
“아가씨, 이 치마는 아가씨 말씀대로 옛 서적에서 화신을 묘사한 대로 제작한 것입니다.”
월령안은 올해의 춘일연에 참석해야 한다는 사실을 늦게 알게 되어, 미리 옷을 준비하지 못했다. 침모들도 일을 서둘렀지만, 시간이 부족해 복잡한 무늬를 수놓지는 못했다. 그래서 재질과 모양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좋아.”
긴 치마에는 정교한 꽃수가 놓여 있지는 않았다. 그저 비단 조화가 한 송이씩 달려 있었다. 그러나 이 치마가 정교하게 수놓은 다른 치마보다 뒤떨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보다 훌륭하다 할 수 있었다.
특히 햇빛 아래에서는 얇은 비단에 섞어 짠 은사가 보일 듯 말 듯 하게 드러났다. 그 덕분에 치마가 더욱 화려해 보였고, 몽환적인 빛을 뿜어냈다.
이런 치마를 거절할 여인은 없었다. 월령안도 예외가 아니었다.
침모들이 ‘화신군(花神裙)’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 비단 치마는 가벼우면서도 투명했다. 월령안은 안에 옷을 세 겹이나 받쳐 입고서야 이 치마를 입을 수 있었다.
월령안이 이 치마로 갈아입은 순간, 시중을 들던 시녀도 저도 모르게 감탄을 터트리더니 흥분해서 외쳤다.
“와……. 너무 예뻐요. 너무 아름다워요. 아가씨, 우리 아가씨가 선녀보다도 더 곱네요.”
월령안은 보통의 귀족 여인들처럼 날씬하지는 않았다. 또 인적 없는 계곡에 피는 난꽃이나, 속세에 물들지 않은 선녀 같지도 않았다.
그녀에게는 그러한 초연한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다른 여인들 보다 현실적인 느낌을 풍겼다. 그러나 이런 느낌이 그녀를 더욱 성숙한 여인으로 보이게 했다.
하인들은 월령안이 이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치마를 입으면, 치마 특유의 고상한 분위기에 눌려 그녀의 개성이 옅어지리라고 생각했다. 치마만 눈에 띄고 정작 치마를 입은 월령안은 빛을 잃을 줄 알았다.
막상 그녀가 이 하늘하늘한 화신군을 입으니 개성이 눌리기는커녕, 세속적인 느낌을 주지 않으면서도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화신이라면 이래야지.’
월령안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한 바퀴 크게 빙글 돌았다. 치마폭에 달린 꽃송이가 그녀의 몸짓을 따라 날리는 모습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정말 아름답구나.”
옷이 날개라더니. 하늘하늘한 치마를 입으니 사람도 선녀 같은 느낌을 물씬 풍겼다.
침모들이 심혈을 기울인 게 확실했다. 이 치마는 입으면 아름다워 보였고, 움직이면 더욱 환상적인 느낌을 주었다. 이 아름다움은 천궁각이 그녀에게 만들어 준 그 장치에 아주 잘 어울렸다.
꽃, 미인, 옷.
이 세 가지를 갖추었으니, 오늘의 춘일연은 그녀가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화신군은 세속적인 느낌을 주는 옷이 아니었다. 금은 장식을 더하면 오히려 그 아름다움에 흠이 될 것 같았다. 침모들은 이 치마에 맞춰 장신구를 무려 열 가지나 준비해 두었다.
모든 장신구는 비단과 실로 만들었다. 하나하나 치마와 아주 잘 어울려, 아무거나 골라도 이 치마에 꼭 알맞아 보였다. 그러나 침모들은 무려 열 가지나 준비했다. 그만큼 이 치마에 자부심이 있는 것이리라.
월령안은 용모가 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용모가 치마의 아름다움에 눌려 빛을 잃을까 걱정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색이 산뜻한 장신구를 골라, 하녀의 손을 빌려 착용했다. 그다음 손끝이 야무진 하녀를 시켜 머리를 빗고 화장을 했다.
한 시진 뒤, 월령안은 치장을 완전히 마쳤다.
몸을 일으켜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빼어나게 고상하고 우아했다.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이렇게 눈에 띄게 아름다운 모습을 좋아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고 기를 누르고 싶었다.
월령안이 치장을 마쳤을 무렵에는 이미 날이 밝았다. 시간을 계산해 보니 지금 출발해야 했다. 더 늦으면 춘일연의 개막식에 참석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신분에는 너무 일찍 가 있을 필요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딱 제시간에 도착할 자격도 없었다.
이런 사소한 일로 손가락질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더는 지체하지 않고 하녀에게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게 했다. 그리고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방문을 나서서 햇빛 아래로 걸어가자, 치마는 한층 더 밝아졌다. 얇은 비단 안에 감춰진 은사가 햇빛 아래에서 더욱 눈부신 은빛을 냈다. 마치 월령안의 몸에 성스러운 빛을 한 겹 두른 것처럼, 그녀를 더욱 고귀하고 비범해 보이게 했다.
월령안이 천천히 앞으로 나가자 그 빛도 걸음에 따라 앞으로 움직였다. 다른 사람의 눈에, 지금의 월령안은 성스러운 빛을 밟으며 속세로 내려온 선녀처럼 보였다.
“아, 아, 아……가씨!”
집사는 바깥뜰에 서 있었다. 천천히 걸어오는 월령안을 보자, 그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사람이 정말 우리 아가씨인가? 강하고 똑 부러지던 우리 아가씨가 맞나? 전혀…… 다른 사람 같잖아?’
그는 아가씨를 곁에서 오랜 세월을 모셨다. 그런데도 그녀가 이토록 아름다울 때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육 대장군이 이토록 아름다운 아가씨의 모습을 보셨으면, 그래도 아가씨를 내치셨을까?’
“그래.”
월령안은 가볍게 대답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 오…… 오늘 가장 눈에 띄실 겁니다. 꼭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할 거예요.”
집사는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올해의 춘일연에는 육 대장군도 참석했다.
‘육 대장군, 우리 아가씨를 보고 후회하지나 마시지요.’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네.”
월령안은 조금도 겸손한 척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럴 겁니다!”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곧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쉽게도 나리와 마님은…… 아이고, 내 입 좀 보게. 이게 무슨 헛소리람.”
집사는 자신의 입을 찰싹 쳤다. 자기 말 한마디에 월령안의 슬픔을 불러일으킬까 걱정이 되어 다급히 덧붙였다.
“아가씨, 수 맹주께서 어제 나가신 뒤, 아직 들어오지 않으셨습니다.”
월령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젯밤…… 흠, 어젯밤 장군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보게. 또 사람을 풀어서 수 오라버니를 찾아보도록 해. 어쩌면 오라버니에게 위험한 일이 생긴 걸 수도 있어.”
어젯밤 육장봉이 그녀에게 약을 가져올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있었던 걸 보면, 장군부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게 분명했다. 수횡천의 상황이 썩 좋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수 오라버니는 능력이 뛰어나니까. 생명의 위험은 없을 거야.’
여기까지 생각한 월령안은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생명의 위험만 없다면 해결 못 할 일은 없었다.
“네, 아가씨.”
집사는 대답하고 또 말했다.
“아가씨, 판돈으로 쓸 은표는 다 준비해 두었습니다. 모두 이십만 냥입니다. 그중 십만 냥은 소인이 임의로 판단해서, 매씨 가문 등 여러 가문을 찾아가 여쭙고 함께 건 돈입니다. 만약 돈을 따면 반반씩 나누고, 지면 우리가 책임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집사가 고른 몇몇은 모두 관리를 뒷배로 둔 가문이었다. 설령 도박판의 물주 뒤에 소 승상이 있더라도, 그들이 있는 한 딴 돈을 안 내놓지 못할 것이다.
“잘했네.”
월령안은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