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난 사과할 줄 모르오
월령안은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말했다.
“제가 육 장군께 어떻게 보답해 드려야 할까요?”
이 남자에게 신세를 져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 열 받아! 왜 하필 육장봉이지?’
“내일, 이렇게 등장하지 마시오. 안전하지 않으니까.”
육장봉은 생각도 하지 않고 말했다.
주변이 온통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월령안의 아름다움을 감출 수는 없었다. 내일 햇빛 아래에서,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선녀처럼 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월령안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할지 상상이 갔다.
“아까는 제가 실수한 거예요. 벌레 한 마리가 제 얼굴에 앉았거든요. 벌레에 쏘이는 바람에 실수로 떨어진 거예요.”
‘내일 이렇게 등장하지 말라니, 터무니 없는 소리!’
그녀가 이렇게 등장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그 자리에 있는 귀족 여인들과 공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지 못한다면, 유경장이 사적으로 그녀에게 표를 몰아주어도 소용없었다.
그녀는 기필코 화신의 칭호를 따내야 했다.
“내일도 벌레에 쏘이면 어떡할 거요?”
육장봉은 그제야 월령안의 얼굴 위로 부어오른 자국을 보았다. 꽤 심각해 보였다.
월령안은 간질거리는 볼을 만져보더니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럴 리 없어요! 내일은 천으로 얼굴을 가릴 거예요.”
육장봉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그녀가 조심해서 오늘 밤처럼 떨어지지는 않는다고 해도, 만약 또 벌레에 쏘이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얼굴이 부어오르면 화신으로 뽑히지 못할 수도 있었다.
화신이 되는데 경국지색의 미모까지는 필요 없었지만, 그래도 반드시 아름다워야 했다.
월령안의 태도는 이상할 정도로 단호했다. 육장봉에게 말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
그녀는 육장봉에게 읍하고 엄숙하게 말했다.
“장군의 은혜는 제가 반드시 갚겠어요. 하지만 제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거예요. 만약 장군께서 불만이라거나, 절 괜히 구하셨다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도로 올라가서 다시 한번 떨어질 수도 있어요. 장군께서 절 구하지 않으신 거로 치게요.”
육장봉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내가 있는 한, 춘일연의 화신은 당신뿐이오. 굳이 모험할 필요가 없소.”
‘또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굳이 애쓸 필요도 없소.’
월령안이 말했다.
“그건 의미가 달라요. 저는 스스로 해내고 싶어요.”
그녀가 원하는 것은 춘일연의 화신 칭호만이 아니었다.
“당신…… 설마, 매해 화신 선발에 개입하려는 거요?”
월령안이 입을 열기도 전이었다. 육장봉의 그녀의 반짝거리는 눈망울만 보고 그녀의 속셈을 눈치챘다.
월령안은 손을 내젓고 입을 다문 채 미소를 지었다.
“개입이라니요. 춘일연의 화신을 만들어 내는 거죠.”
‘개입하는 정도로 무슨 재미가 있겠어. 내 손으로 매해 화신을 만들어 내는 거야. 매해 춘일연의 화신들이 전부 내 손에서 나오면 얼마나 재미있겠어.’
“당신은 욕심도 참 많소. 이렇게 일을 크게 벌이다가는 남들에게 미운털이 박힐까 두렵지도 않소?”
‘월령안은 지금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알기는 하는 건가?
일개 상인이 귀족 여인들의 춘일연을 손에 넣고 휘두르려고 하다니. 정말 간도 크군.’
월령안이 말했다.
“두려울 게 뭐가 있어요? 누구든 돈을 내고 저를 고용하면, 저는 그 사람을 위해 일을 하죠. 화신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뒷배 하나 없겠어요?”
게다가 그녀도 뒷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신의 야망은 너무 크군. 만약 세도가들에게 당신이 그들의 지위를 좌우할 수 있다는 것을 들키면, 그들은 도리어 당신에게 앙심을 품을 수도 있소. 이건 아시오?”
사서에는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다. 한 상인이 뛰어난 재능과 재산을 가지고 큰 거래를 했다. 그는 조정과 민간을 주무를 수 있는 중신이 되었다. 나중에는 제왕의 중부(仲父 – 둘째아버지를 일컫는 표현이나, 제왕이 재상이나 중신을 부르는 존칭이기도 함)까지 되었다.
그 상인은 청사에 이름을 남겼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상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후대에게 막대한 부를 쥔 상인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남기기도 했다.
상인은 이득을 위해서라면 어떤 거래든 할 수 있고, 어떤 위험도 무릅쓸 수 있다.
심지어 나라나 천하를 가지고도 장사를 했다.
그래서 조정은 대체로 상인들을 억눌렀다. 상인이 국고에 대량의 세수를 이바지했다 하더라도, 지위는 여전히 높지 않았다.
“원래 정상으로 가는 길은 늘 가시밭길이죠. 제가 선택한 것이니 제가 맞서 싸우겠습니다. 전 두려울 게 없어요.”
월령안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표정은 침착하고 덤덤했다. 마치 더없이 평범한 일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잘 생각해 보았소?”
이 길을 선택한 이상 돌이킬 수가 없다.
“그럼요.”
월령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자세는 우아하고 평온했다.
이미 결심한 게 분명했다.
육장봉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그날을 기다리겠소.”
‘당신이 정상에 올라서서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날을 기다리겠소.’
“장군께서는 절 말리지 않으시나요?”
월령안은 의아하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아주 예상 밖이라는 표정이었다.
육장봉도 눈썹을 치켜세웠다.
“내가 왜 말리겠소?”
‘월령안에게는 그럴 능력이 있지 않은가?’
“장군께서는…… 제 생각과 다르시네요.”
육장봉은 변경의 대부분 남자와 달랐다. 그들은 항상 월령안을 여인으로 보고, 나중에야 능력 있는 상인으로 보았다.
육장봉은 달랐다. 그는 월령안을 항상 뛰어난 상인으로 대했다. 그녀가 여인이라고 해서 무시하지 않았다.
“그건 당신이 나를 한 번도 제대로 파악한 적이 없기 때문이오. 당신이 좋아한 것은 당신이 상상으로 만들어 낸 육장봉이었소.”
월령안이 좋아했던 사람은 진정한 그가 아니었다.
이는 그가 월령안과 여러 차례 만남을 거듭한 뒤에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깨달음에 그의 마음은 언짢아졌다.
‘월령안이 좋아하는 건 나지만, 그건 진짜 내가 아니다.’
“저는…….”
월령안은 일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육장봉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 나서 조롱하듯 말했다.
“월령안, 세상 사람 모두가 당신이 날 위해 많은 것을 바쳤는데, 내가 당신을 내쫓았다고, 당신을 공정하게 대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소. 하지만 당신은 언제 나를 공정하게 대한 적이 있소?”
월령안은 멍해졌다가 정신을 차리고 싸늘하게 웃었다.
“대장군, 그래서 제가 사과라도 해야 하나요?”
‘하마터면 육장봉에게 끌려갈 뻔 했네.’
그렇다. 육장봉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줄곧 그녀가 일방적으로 육장봉을 좋아했고, 일방적으로 희생했지만, 그 사실을 당사자에게 말한 적은 없었다.
육장봉은 심지어 그녀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 그에게 그녀의 연정에 대답해 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던가? 그녀의 희생에 보답해 달라고 있었던가?
그런 적은 없었다.
그녀가 원망한 것은 육장봉의 매정함과 육씨 가문이 저버린 신뢰였다.
필요할 때는 그녀를 가문에서 정식으로 맞이한 정실이라 하더니, 필요가 없어지니 이혼장 한 장으로 내쳤다.
육씨 가문 전체가 그녀를 바보처럼 가지고 놀았다. 그런데 원망할 자격도 없다는 말인가.
“아니오. 내가 당신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빚진 거요. 하지만…… 난 사과할 줄 모르오.”
육장봉은 차갑고 오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신, 보상으로 나는 당신에게 날 제대로 알아 갈 기회를 줄 수 있소.”
월령안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순간, 그는 정말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전장에서는 온몸에 칼에 수십 번 맞아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그였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두려웠다.
그는 월령안을 새롭게 알아가고 싶었다.
‘육장봉이 한 말이 무슨 뜻이지?’
월령안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그녀가 더 생각하기도 전에 육장봉이 갑자기 말했다.
“월령안, 야율제는 이미 성을 떠났는데 알고 있었소?”
“네?”
화제 전환이 너무 빨랐다. 월령안은 순간 화제를 따라잡지 못했다.
“그는 오늘 밤, 당신에게 손을 쓰지 못할 거요. 그러니 당신은 성으로 돌아가도 되오.”
말을 마친 육장봉은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갔다.
“뭐 하고 있소? 안 따라오고.”
‘이 남자, 진짜 뭐야?!’
혼자서만 할 말을 다 하고, 그녀에게는 물어볼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이렇게 제멋대로라니. 자기가 무슨 황제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월령안은 화가 나서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눈 깜짝할 새에 육장봉은 멀어졌다. 월령안은 하는 수 없이 그 뒤를 뒤따라갔다.
육장봉의 발걸음은 아주 빨랐다. 가는 내내 말을 하려는 의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월령안은 뛰다시피 해야 겨우 따라갈 수 있었다. 걷는 도중에 그녀는 육장봉이 아까 한 말의 뜻을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입만 뻐끔거렸을 뿐, 결국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물어본들 또 어쩌겠어?’
그녀는 지금 월령안일 뿐만 아니라 청주 월씨 가문의 가주였다. 그녀의 어깨에는 월씨 가문의 미래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제멋대로 굴 자격이 없었다.
이번 생에 그녀와 육장봉은 가능성이 없었다.
아니, 설사 가능성이 있어도 그녀는 자신이 또다시 설렘을 느끼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한 번 다쳤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더는 육장봉 때문에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고작 반 각 동안 걷는 사이, 월령안의 마음속에는 온갖 감정이 솟구쳤다. 때로는 쓰다가, 때로는 떫었고, 또 때로는 시큼했다. 개중에 달콤함만이 없었다.
그녀가 육장봉을 쫓아서 앞뜰까지 왔을 무렵에는 마음도 많이 가라앉았다.
육장봉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가 진심이든지 가식이든지 모두 그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그저 자기 마음만 잘 지키면 됐다. 육장봉이 그녀에게 또다시 상처 입힐 여지만 주지 않으면 된다.
그녀가 육장봉을 좋아했던 것처럼, 설령 육장봉이 그녀의 감정에 대답한 적이 한 번도 없어도 여전히 연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던 것처럼, 지금 이 마음도 흔들리지만 않으면 된다.
* * *
육장봉이 말한 대로 야율제는 이미 성안에 없었다. 오늘 밤, 야율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육장봉을 두려워해서 고개도 못 내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에 대해 황금당의 사람은 놀라지도, 실망하지도 않았다.
육 대장군이 나타난 순간, 그들은 오늘 밤 헛수고를 하리라는 것을 예상했다.
야율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육장봉이 있는데 손을 쓸 리 없었다. 만약 그가 정신이 나가서 공격을 감행하더라도, 육장봉이 처리했을 것이다. 황금당 사람들이 황금 이십만 냥을 벌 기회는 없었으리라.
그렇게 그들은 오늘 밤 헛수고를 했지만, 아무 불만도 없었다.
* * *
월령안 일행은 육장봉의 호송을 받으며 성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는 동안 아무 사건 없이, 순조롭게 도착했다.
육장봉이 있으니 허가 문서도 필요가 없었다. 성문을 지키는 장군들은 육장봉의 얼굴을 보자,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문을 열고 일행이 성으로 들어갈 때까지 공손하게 배웅했다.
육장봉은 월령안을 월씨 저택까지 바래다주었다. 월씨 저택의 집사가 사람을 데리고 월령안을 맞이하러 나온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말에서 내리지 않고 월령안에게 손을 내저었다.
“들어가시오.”
“대장군께 감사드립니다.”
돌아올 때는 월령안 혼자 말을 탔다.
그녀는 말에서 내리더니 육장봉에게 읍을 했다. 그리고 아무 미련도 없이 돌아서서 들어갔다.
육장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