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그런 말은 누구에게서 배웠소?
“어서 놓으시오.”
육장봉은 속도를 늦추었다.
허리에서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온기와 무게감은 육장봉을 아주 불편하게 했다.
누구도 감히 이토록 가깝게 그에게 다가선 적이 없었다. 특히 여인은 더욱 그러했다.
월령안이 처음이었다.
‘이 여인은 정말 간덩이가 부었군.’
“못 놔요.”
월령안은 손을 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힘을 주어 꼭 끌어안았다.
“손을 놨다가 제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장군께서 책임지시겠어요?”
“책임지겠소.”
말고삐를 잡은 육장봉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지금 대단히 불편했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자신에게 달라붙는 다른 여인을 대하듯 월령안을 내칠 수는 없었다.
이를 본 육이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육이 일행은 육장봉의 뒤를 바짝 따르고 있었다. 눈썰미가 좋은 그는 두 사람 사이에서 다시 흐르는 기류를 눈치챘다. 그러자마자 그는 황급히 속도를 늦추어 두 사람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뿐만 아니라, 뒤따르던 다른 사람들도 앞으로 다가가지 못하게 막았다.
그는 이제야 조금 전에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장군께서는 월 낭자에게만은 다르게 대하시는군! 월 낭자였기에 망정이지, 만약 다른 여인이었다면, 공주라 할지라도 분명 내치셨을 거야.’
“장군께서는 어떻게 책임지실 건가요? 저는 나이도 젊고 아름다워요. 게다가 부유하고 미혼이기까지 하지요. 제가 굴러떨어졌을 때, 정말 절 책임지실 능력은 되나요?”
월령안은 육장봉의 몸이 굳은 것을 느꼈다. 그가 화가 난 나머지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하였다.
‘하하하하. 육장봉도 오늘 같은 날이 있다니!’
여러 번을 싸운 끝에, 드디어 그녀가 우세를 차지하는 날이 왔다. 이번 기회에 육장봉을 제대로 괴롭혀 주지 않는다면 그동안 당한 설움을 풀 길이 없을 것이다.
“월령안!”
육장봉은 코웃음을 치며 협박했다.
“내가 당신을 뿌리칠 수도 있지. 못 믿겠소?”
“먼저 저에게 함께 말을 타자고 말한 건 장군이세요. 이렇게 될 거라고 진작 예상하셨어야죠.”
월령안은 믿을 구석이 있어 두려울 게 없다는 듯, 육장봉의 허리를 더듬더니 희롱하듯 말했다.
“장군의 허리는 늘씬하면서도 힘이 있네요. 군살도 전혀 없는데, 보여달라는 것도 아니고 만지지도 못하게 하나요? 그리고…… 손해를 따져 봐도, 둘이 말 하나를 타고 이렇게 가깝게 붙어 있으면 오히려 제가 손해를 보는 거잖아요. 그런데 왜 장군께서 화를 내시는데요?”
월령안은 육장봉이 정색할까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처음부터 본인이 자초한 일이었다. 그가 억지로 그녀와 한 말을 타지 않았더라면, 이토록 희롱당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희롱이라니! 취소! 난 육장봉을 희롱하지 않았어. 이 변경에서 남자든 여자든 내 손길 한번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싫어서 안 할 뿐이지.’
육장봉이 그녀에게 같은 말을 타도록 억지를 부리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그의 허리를 끌어안지는 않았을 것이다.
‘육장봉은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나야말로 꼭 당신이어야만 하는 게 아니라고!’
월령안의 목소리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마치 노래를 부르듯 듣기 좋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은 육장봉은 말고삐를 홱 잡아당기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월령안!”
히잉!
갑작스레 말고삐가 당겨지면서 고통을 느낀 말이 놀라서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앞발을 쳐들고 허공에 발길질하며 윗몸을 세웠다.
“꺅!”
육장봉 뒤에 앉은 월령안은 몸을 제어할 수 없어 뒤로 넘어질 뻔했다.
월령안은 깜짝 놀라서 안색이 창백해졌다. 서둘러 육장봉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 전체를 육장봉의 몸에 찰싹 붙인 채 공포에 질려 크게 외쳤다.
“육장봉! 미쳤어?!”
“당신에게 가르침을 좀 준 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육장봉은 최대한 빨리 손을 돌려 월령안을 붙잡아 자신의 몸 뒤에 고정했다.
다행히 육장봉이 말고삐를 놓자, 말은 높이 쳐들었던 앞발을 바로 땅에 내려놓으며 진정했다.
월령안의 몸이 앞으로 확 쏠리며, 얼굴이 육장봉의 등에 세게 부딪혔다. 순간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팠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말 위에서 안정감을 되찾자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정말 놀랐다. 지금 횃불을 그녀의 앞에 가져간다면,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장군의 이번 수법은 좀 멋진데!”
육장봉의 친위대는 그와 겨우 말 두 필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다. 육장봉이 갑자기 말고삐를 당기자, 육이를 비롯한 모두도 서둘러 멈춰 섰다.
육장봉의 말이 일어서자, 월령안은 겁을 먹고 육장봉에게 바짝 붙었다. 다른 사람들도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하나같이 동경의 눈빛을 반짝였다.
그들은 장군의 능력을 믿었기에, 월령안의 안전을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장군이 있는 한, 월 낭자는 위험해지고 싶어도 그럴 기회가 없을 것이다.
“아까 그런 말은 누구에게서 배웠소?”
육장봉은 몸을 틀어 한 손으로 월령안을 안았다. 그 순간, 허공에 몸을 띄우더니 발끝으로 말 등을 가볍게 딛고 허공에서 반 바퀴를 돌았다. 그렇게 그는 월령안을 안은 채 다시 말 위에 앉았다.
“앗…….”
월령안은 완전히 얼이 빠졌다. 그녀는 자신이 날아오른 것만 느꼈을 뿐이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녀는 육장봉과 자리를 바꾸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육장봉의 앞에 앉아 있었다. 그것도 육장봉과 마주 보는 자세였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월령안은 고개를 들고 육장봉의 굳어진 얼굴을 보았다. 마치 사람을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월령안은 더욱 멍해졌다.
‘육장봉은 뭘 잘못 먹었나? 갑자기 왜 이러지?’
“아까 그런 말은 누구에게서 배웠소?”
육장봉은 월령안이 멍한 얼굴로 눈만 깜박이자 그녀가 자기의 말을 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한번 반복했다.
“무슨 말이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그녀는 도저히 육장봉의 장단을 맞출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다는 거야?’
“나를 희롱하는 말 말이오!”
‘설마 유경장에게서 배웠나?’
육장봉은 월령안이 최근에 유경장과 만난 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었다.
“장군을 희롱해요?”
월령안은 잠시 어리둥절해졌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웃기 시작했다.
“아하……. 방금 장군의 허리가 늘씬한데 힘이 있고, 군살도 없다고 한 소리 말인가요?”
예상대로 육장봉의 안색이 더욱 나빠졌다. 월령안은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이런 말을 제가 배우다니요. 대장군, 잊으신 모양인데 전 기루 장사도 했었거든요?”
“기루라고?”
“네, 기루요. 장군께서는 기루에 들리시지 않나요?”
변경의 사내치고, 조금 신분이 있다 싶으면 기루의 단골손님이 아닌 사람이 없었다.
기녀와 어울리는 것은 변경의 풍속이기도 했다. 조그마한 모임이 있더라도 반드시 기루에 갔다.
물론, 기루에 간다고 해서 반드시 뭔가를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술과 차를 시키고 기녀들의 금 연주를 들으며 심신의 긴장을 풀었다.
월령안은 이런 풍속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배척하지도 않았다.
환경이 이렇다 보니, 기루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나 이야기도 있었다.
월령안이 기루에 자주 드나든다는 것을 안 육장봉은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나는 절대로 기루에 가지 않소.”
“기루에 가지 않으신다고요?”
월령안은 고개를 숙이고 육장봉의 아랫배 쪽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 말했다.
“저런, 장군의 즐거움이 많이 줄어들었겠네요.”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소.”
육장봉은 월령안의 손목을 잡은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윽…….”
월령안은 아픈 나머지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녀는 소리를 지르는 대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무하시네요. 장군께서 먼저 시작하신 것 아닌가요?”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육장봉이 꺼낸 화제에 따라 대화를 이었을 뿐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죄를 물을 이유가 없었다.
“왜? 이젠 육장봉이라고 안 부르시오?”
‘조금 놀랐다고 내 이름을 막 부르다니. 어디서 배운 못된 버릇인지 모르겠군.’
“그건 제가 놀라서 그런 거잖아요. 장군께서는 저처럼 연약한 여인과 시시비비를 따지시나요?”
‘육장봉이라고 하는 게 뭐 어때서? 자기도 마찬가지로 매번 날 이름으로 부르면서. 날 ‘월 낭자’, ‘월 가주’라고 부르면 죽기라도 한담? 그런 주제에 내가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흥, 언제는 자기는 나를 존중했던 것처럼 얘기하네.’
월령안은 마음속 가득한 불만을 꾹 참았다. 그러면서 얼굴에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허.”
육장봉은 코웃음을 쳤지만, 안색은 많이 온화해졌다.
“장군, 계속 여기서…… 이야기 하실 건가요?”
월령안은 육장봉과 자신을 손으로 가리키며 길을 가기에는 적절한 자세가 아니라는 뜻을 드러냈다. 또 육장봉의 뒤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장군의 부하들도…… 기다리고 있군요.”
그녀는 육이를 비롯한 사람들도 그녀와 육장봉을 구경거리로 삼았을 거라고 여겼다.
육장봉은 고개를 돌리고 차가운 시선으로 그들을 보았다.
그들은 말 한 필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다. 날도 어두워서, 육장봉의 표정을 살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소름이 끼쳤다.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아뿔싸, 장군께서 기분이 언짢아지셨나?’
부하들이 앞으로 다가가 용서를 빌어야 하나,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육장봉은 다시 월령안을 안더니 돌려 앉히고, 자신의 품에 기대게 하였다.
“대장군께서 월 낭자를 안으셨어. 그것도 두 번이나!”
월령안이 육장봉에게 다시 안기자, 가장 간이 큰 육십이는 흥분해서 눈을 반짝였다.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육이는 다시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육이를 비롯한 다른 이들은 묵묵히 말고삐를 당기며 육십이와 멀리 떨어졌다.
“다 들리거든요!”
월령안은 또 한 번 무방비 상태에서 안겨지자 화가 났다. 그러다가 육십이가 흥분해서 조그맣게 감탄하는 소리를 듣자, 퉁명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육십이는 깜짝 놀라서 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그래도 월령안은 화가 풀리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고 등 뒤의 육장봉을 비웃으며 말했다.
“대장군께서 아랫사람들을 엄하게 다루신다고 들었는데, 참으로 엄하신 모양이네요.”
육장봉은 얼굴을 굳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서 장군부를 백이십 바퀴 돌도록.”
말 한마디에 백이십 바퀴면 제법 자비를 베푼 셈이었다.
“장, 장군님! 제가 잘못했어요!”
육십이는 다리가 나른해졌다. 그는 말 등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전원이 함께.”
육장봉은 이어 차갑게 덧붙였다.
순간, 육십이는 사방팔방에서 그를 향해 몰아치는 한기를 느꼈다. 그로서는 연약한 자신을 묵묵히 꼭 끌어안고 오들오들 떨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