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월령안의 감정 계산법
“제가 어디로 가는 줄 아시고요?”
월령안은 웃음기를 머금고 곁눈질로 한쪽에 있는 육장봉을 힐끔 보았다. 그녀가 속셈을 품고 있는 게 빤히 드러났다.
‘여우 같기는.’
육장봉은 월령안의 눈에 떠오른 교활함을 포착하고, 큰 소리로 경고했다.
“십이!”
안타깝게도, 육장봉의 외침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 육십이의 입은 누구보다도 더 빨랐다.
“월 낭자는 명월산장으로 가시는 게 아니었나요?”
“맞아요. 명월산장으로 가는 길이에요.”
월령안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정말 우연이네요. 가는 길에 여러분을 만날 줄은 몰랐어요.”
‘그러니까 육장봉이 일부러 성 밖에서 날 기다렸다는 뜻이지? 무슨 짓을 하려고?’
“아니…….”
육십이는 꾀라고는 전혀 없어, 또다시 입을 열었다. 육이가 재빠르게 앞으로 다가와 육십이의 말을 중단시키고는 엄숙하게 말했다.
“정말 우연입니다. 월 낭자, 해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 늦은 시간에 어떻게 성 밖으로 나왔습니까? 지금은 야간 통행이 금지된 시간입니다.”
“육이 장군, 지금 심문하시는 건가요?”
월령안은 의미심장하게 육이를 흘끔 보았다. 그리고 유난히 예쁘고 환하게 웃었다.
“저희는 공무를 집행 중입니다. 월 낭자께서도 진지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육이는 월령안의 눈빛을 마주하자 어색함을 느꼈다. 그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행히도 그는 원래 피부가 검은 데다가 횃불도 그렇게 밝지 않았다. 얼굴이 붉어져도 남들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소녀는 줄곧 공무를 중히 여기고 법을 지켜 왔습니다. 장군께서 공무를 집행하신다니 마땅히 협조할 겁니다.”
월령안은 육이에게 살포시 절을 하고서는 곧 소매 안에서 공문서를 꺼냈다.
“순천부에서 특별히 발급한 성 밖 출입을 허가한다는 증명서입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그녀가 한밤중에 법을 어겨 감옥에 갈 위험을 무릅쓰고 성 밖으로 나갈 리가 없었다. 그녀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다.
‘육장봉, 나한테서 트집을 잡으려고? 오늘은 안 될걸.’
‘순천부에서 발급한 증명서라고?’
육장봉은 월령안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앞으로 다가오더니 그녀의 손에서 공문서를 건네받아 훑어보았다.
“유 대인이 발급한 것이오?”
‘월령안은 역시 월령안이군.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만 하면 상대는 전혀 거절하지 못하는구나.’
유칙이 예전에 월령안을 어떤 태도로 대했는지 육장봉은 잘 알고 있었다. 뜻밖에도 월령안은 고작 두 번의 교제를 통해 자신에 대한 유칙의 인상을 바꾸어 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성 밖을 나갈 수 있는 증명서까지도 발급받았다.
“네, 맞습니다.”
말은 많을수록 실수가 잦아지고, 적을수록 실수가 적어진다. 월령안은 될수록 한 글자라도 적게 말하려 했다.
“성 밖으로 나가는 목적은 무엇이오?”
육장봉이 또 물었다.
“증명서에 쓰여 있습니다. 순천부의 공무를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월령안은 자신을 미끼로 삼는 방법을 제시해서 유 대인의 마음을 움직였고, 이 증명서를 발급하게 했다.
야율제가 한밤중에 사람을 거느리고 와서 월씨 저택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유칙은 순천부윤으로서 책임을 회피할 수가 없었다.
사건이 발생한 이튿날 황제는 유칙을 한바탕 엄하게 꾸짖었다. 유칙의 정적들도 이 일을 물고 늘어져, 직무 태만이라며 그를 연신 탄핵했다.
황제가 야율제를 사로잡는 일을 육장봉에게 전적으로 맡기기는 했으나, 그를 하루빨리 잡지 못하면 유칙은 그만큼 더 질책을 받아야만 했다.
게다가 육장봉이 야율제를 붙잡아도 유 대인이 잡은 것이 아니다. 직무를 게을리했다는 죄는 여전히 남고, 공을 세워 잘못을 씻을 수도 없다.
월령안이 유칙을 찾아가 자기 자신을 미끼로 야율제를 유인하겠다고 하자, 그는 잠시 주저하다가 이 증명서를 발급해 주었다.
물론, 이 증명서가 없더라도 월령안은 오늘 밤 성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다만 육장봉처럼 꼬투리를 잡는 사람을 만나면 번거로울 뿐이었다.
몰래 하는 일은 결국 떳떳할 수 없다.
그래서 정상적인 경로로, 정문으로 드나들 수 있는 한, 그녀는 최대한 뒷거래를 한다거나 인정에 매달리려고 하지 않았다. 설령 후자가 더 편할 지라도 그랬다.
법을 잘 알고 지켜야만 오래갈 수 있다.
이는 월씨 가문 사람이라면 태어날 때부터 꼭 가슴에 새겨야 하는 규칙이었다.
증명서에 쓰여 있으므로 그녀가 성 밖으로 나가려는 목적은 육장봉도 알았다. 그가 물으려는 건 다른 것이었다.
“왜 사전에 나와 의논하지 않았지?”
월령안이 되물었다.
“순천부의 공무를 왜 장군과 의논해야 하지요?”
“내 앞에서 시치미를 떼려 하시오?”
육장봉이 가볍게 웃더니 손에 쥔 증명서를 손바닥에 움켜쥐고는 갑자기 힘을 주었다.
월령안은 육장봉을 중심으로 하여 정체 모를 힘이 밖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힘에 밀려 한 발짝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몸을 가눈 다음 육장봉이 손을 펴는 모습을 보았다. 그의 손에 있던 증명서는 어느새 조각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밤바람이 불자 조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지금 당신에게는 증명서가 없소.”
육장봉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대장군께서는 저더러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월령안은 낯빛이 살짝 변했다. 가슴이 끊임없이 벌렁거렸다. 입술을 힘껏 깨문 후에야 ‘담담한’ 미소를 억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수 오라버니가 육장봉에게 넘어간 건 아주 정상적인 거야. 육장봉, 이 자식은 사람이 아니고 천년 묵은 여우일 거야.’
조금 전 일로 인해 그녀는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앞으로 중요한 물건은 절대 육장봉의 손에 넘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 그만큼 이 남자의 파괴력은 너무 강했다.
“명월산장에 가려는 게 아니었소? 갑시다.”
육장봉은 몸을 돌려 그녀에게 따르라고 손짓했다.
그녀는 어리둥절했다. 이해할 수가 없어 가장 가까이 있는 육이에게 물었다.
“이건 무슨 상황인가요?”
‘육장봉, 이건 무슨 뜻이지? 내 증명서를 훼손한 건 나를 괴롭히려는 게 아니었나?’
육이가 앞으로 다가가 재빨리 해명했다.
“월 낭자, 우리 장군께서는 낭자의 안전을 걱정하시는 겁니다. 아무래도 수 맹주와 순천부의 사람들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기대하셔서는 안 됩니다. 다음번에 월 낭자께서 보호가 필요하시면 우리 장군을 찾으십시오. 장군께서 손을 거의 쓰시지는 않지만, 제가 머리를 걸고 약속합니다. 장군께서 절대…….”
“육이, 말이 많구나!”
육장봉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월령안과 육이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육이는 흠칫 떨더니 삽시간에 엄숙한 모습으로 되돌아가 월령안에게 군례를 올렸다.
“월 낭자, 가시지요.”
월령안은 침묵을 지켰다.
‘내가 거절할 수나 있나? 마차는 망가졌고 내 사람들은…….’
월령안은 일찌감치 육장봉의 친위대에 제압당한 호원을 바라보고는 묵묵히 따라갔다.
오늘 밤 육장봉은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온 게 분명했다. 심지어 수 오라버니를 빼돌린 것도 육장봉이 꾸민 일 같았다.
‘야율제 때문에 육 대장군이 대단히 심혈을 기울인 모양이군.’
다만 육장봉이 이번에는 야율제를 사로잡으려는 건지, 놓아주려는 건지를 알 수 없었다.
육장봉은 무리 밖으로 걸어 나가더니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월령안은 그에게서 세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멈추었다.
육장봉이 고개를 돌리더니 불쾌한 듯 말했다.
“왜 그리 멀리 섰소? 내가 당신을 잡아먹을까 두려운 거요? 이리로 오시오.”
“대장군.”
월령안은 두 걸음을 더 걸어 육장봉과 반 발짝 떨어진 거리에 가 섰다.
육장봉은 힐끗 보더니 다시 앞을 주시하며 더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이건 무슨 뜻이지? 옆으로 오라는 건가? 자기랑 같이 멀뚱히 서 있자는 거야?’
월령안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육장봉이 입을 열었다.
“수횡천은 당신의 버팀목도, 저력도 아니오. 결정적일 때 당신 옆에 서 있어 주지도 못할 거요.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강호의 의협심뿐, 사소한 정 같은 건 없소. 그자는 누구를 위해서 머물지도 않을 거요. 그런 자에게 시간과 마음을 낭비하지 마시오. 당신이 바라는 것은 얻을 수 없을 테니.”
“대장군, 오해하셨습니다. 수 오라버니는 저의 오라버니입니다. 저는 보답을 받으려고 오라버니에게 잘 대해 준 게 아닙니다. 그러니 낭비니, 아니니 하는 문제는 없습니다.”
월령안은 스스로를 너무 가식적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듣기 좋아한다.
“그런가?”
육장봉은 고개를 돌려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까만 눈망울에는 온통 비웃음뿐이었다. 그는 월령안을 잘 파악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 속의 비웃음과 날카로움에도 그녀는 전혀 놀라지 않고 태연하게 마주했다.
“대장군, 감정은 이익으로 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저도 사람이에요. 돈만 벌 줄 아는 짐승이 아닙니다.”
그녀는 인정했다. 수횡천이 그녀를 내버려 두고 주정 일당을 도와주는 쪽을 선택했을 때는 정말로 실망하고 분노했었다.
하지만 곧 냉정해졌다.
수횡천은 그녀에게 빚진 것이 없었다. 반대로 그녀가 그에게 목숨을 빚졌다.
그녀는 수횡천에게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 달라고 할 자격이 없었다. 당연히 그에게 불만을 품을 자격도 없었다.
게다가 그는 그녀에게 보답을 요구한 적도 없었다. 그녀가 그를 잘 대해 준 건 순전히 그녀 자신이 원해서였다.
그녀는 이 점을 늘 명심해야 했다.
육장봉이 말했다.
“당신의 감정? 당신이 남에게 삼 할 잘해 주면 상대방도 삼 할 돌려줘야 하는 게 아니었소?”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지 않는 거 아니었나? 그런 방식이라면 감정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래야 월령안이지. 아닌가?’
“아니요.”
월령안이 고개를 저으며 정색하여 말했다.
“저는, 제가 남에게 열을 잘해 주면 상대방도 제게 열을 잘해 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전 그냥 삼 할만 잘해 주죠.”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할 때면 속마음의 삼 할만 드러내야지, 진심을 전부 내보여서는 안 된다.
‘마음을 다해도 상대의 진심을 얻지 못한다면, 왜 내 진심을 줘서 짓밟히게 해야 해? 똑같은 진심을 얻을 수 없다면 삼 할만 주면 충분하지.’
진심을 주었다면 똑같은 무게의 진심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자신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 해야 한다.
월령안은 아직도 모든 일에서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그 월령안이었다. 하지만 또 어딘지 다른 것 같았다.
월령안은 신중했다. 조심 또 조심하며 경계심이 강했다. 그와 동시에, 진실하고 열정적이었다.
사실, 월령안은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데는 전혀 인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속에 걸어 들어올 기회를 주었다. 마치 노인이 그랬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요구는 한편으로는 너무 가혹했다. 보통 사람은 해낼 수 없었다.
그래서 보통 사람은 그녀의 진심을 얻지 못했다.
월령안을 바라보는 육장봉의 눈이 조금 가라앉았다.
늘 월령안을 충분히 알았다고 생각할 때쯤, 그녀의 또 다른 모습을 보고는 했다.
‘아주 흥미롭군.’
월령안을 바라보는 육장봉의 시선은 날카로움에서 탐구로, 탐구에서 또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의 변화에 따라 월령안은 점점 더 망연해지고 의문스러워졌다.
‘육장봉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둘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시선의 변화에 따라 둘 사이의 분위기도 서서히 미묘해졌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서 무르익는 것 같았다.
그때, 육이가 말을 끌고 다가왔다.
“장군, 장군의 말을 데려왔습니다!”
팟!
육이의 이 목소리는 뾰족한 바늘로 찌른 듯,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가차 없이 터트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