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오라버니를 기다릴게요
“령안아, 그들은 기다리지 못할 거다. 내가 가지 않으면 분명 무모하게 행동할 거야. 그렇게 되면 육장봉의 손에 전멸당할 게 분명해. 심지어 이걸 빌미로 육장봉이 강호의 문파들을 괴롭힐지도 모른다.”
수횡천은 참을성 있게 월령안을 설득했다.
“그래서 오라버니는 저의 생사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건가요?”
월령안은 자신이 너그럽지도, 대범하지도 않으며 배려심도 부족함을 인정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녀는 원래 이런 성격이었다.
“오라버니. 설마 깜빡하신 건 아니죠? 오라버니는 저와 먼저 약속했었어요. 그러니까 순서를 놓고 따져도 저를 명월산장까지 데려다준 다음, 주정이 부탁한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요.”
“령안아, 그들은…….”
수횡천은 난감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내가 령안이를 명월산장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돌아오면 모든 게 다 끝나 있을 텐데.’
“야율제는 아직도 어둠 속에서 저를 노리고 있을 텐데….”
말을 마친 월령안은 눈을 감아 버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처해하는 수횡천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이 나약해질까 두려운 게 아니었다. 되려 자신의 마음이 더 냉담해질까 두려웠다.
수횡천은 눈썹을 찌푸렸다. 잠시 후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춘일연은 내일 진시(辰時 – 오전7시~9시)지? 그러면 진시 전까지만 가서 시험해 보면 될 거 아니냐. 령안아, 이렇게 하면 어떻겠니? 내가 일단 그들과 함께 가서 잠 선배를 구출하마. 넌 내가 오기를 기다려라. 내 꼭 날이 밝기 전에는 꼭 너와 함께 명월산장으로 가마.”
수횡천은 나름 원만한 해결 방법을 생각해 냈다. 하지만 월령안은 웃을 수가 없었다.
‘자기보다 남이 먼저인 오라버니라니. 하지만 어쩌겠어? 내가 인정한 오라버니인걸. 아무리 내가 우선이 아니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잖아.’
게다가 월령안은 잘 알고 있었다. 수 오라버니는 그녀의 안위를 위해 주정 일당을 모른 척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버림받을 쪽은 그녀일 게 뻔했다.
이렇게 된 이상, 이쯤에서 물러서야 했다. 더 말해 봤자 감정만 상할 뿐이었다.
월령안은 가볍게 탄식하고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라버니의 말에 따를게요. 먼저 일 보세요. 저는…… 오라버니를 기다릴게요.”
‘아마 기다려도 못 오겠지. 오라버니는 일을 너무 간단하게 생각하고 있어.’
이미 육장봉이 판을 짜 놓고 수횡천과 그들이 뛰어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수횡천의 실력을 고려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만에 하나 수횡천이 몸을 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녀는 남에게 버림받는 데는 익숙해져 있었다.
둘 중 하나를 고르든, 셋 중 둘을 고르든, 선택해야 할 때가 되면 매번 버림받는 쪽은 그녀였다.
그녀가 월령안인 걸 어쩌겠는가?
다만 그녀는 온통 꾀로 가득 차, 자기를 지킬 수단이 수없이 많았다. 혼자라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령안아,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꼭 돌아올게. 네 일을 망치지 않을 거야.”
월령안이 더는 고집하지 않자, 수횡천은 마음속으로 미안했지만,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그녀가 끝까지 고집을 부리면, 어찌해야 할지 정말 막막했으리라.
“좋아요.”
월령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웃음은 완벽한 나머지 손톱만큼의 흠집도 찾아낼 수 없었다. 심지어 그가 떠나기 전까지 안전에 주의하고, 혹시라도 골치 아픈 일이 생기거든 소식을 전하라고 자상하게 당부했다.
수횡천을 보낸 뒤, 월령안은 계단에 서서 머리 위로 높이 뜬 초승달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녀는 오라버니의 사랑을 받기만 하는 천진한 아가씨처럼 살아갈 수는 없었다.
수 오라버니는 어디까지나 정으로 맺은 의붓오라버니일 뿐이다. 그녀의 친 오라버니가 아니었다.
하지만 감상에 젖은 것도 잠시, 월령안은 곧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계단에서 내려와 앞으로 꿋꿋하게 걸어갔다.
그녀는 수 오라버니가 아니었다. 기다려 봤자 소용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아가씨, 수 맹주께서…… 방금 나가셨습니다.”
월씨 가문의 집사는 수횡천이 나가는 모습을 보자, 총총걸음으로 월령안을 찾아왔다.
“약속 시각을 바꾸어야 할까요?”
“괜찮다. 오라버니가 없으면 황금당의 사람들이 있잖느냐.”
그녀는 이렇게 사람을 못 믿었다. 분명 수 오라버니가 명월산장에 함께 다녀오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런데도 황금당에 연락했다.
“하지만…… 만약에 위험에 빠지면 어떡합니까?”
집사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지.”
월령안은 걸음을 잠시 멈추고 되물었다.
“수 오라버니가 있으면 좀 더 안전하기는 하지만, 야율제가 감히 나타나겠어?”
“그래도 소인이 보기에는 너무 위험한 것 같습니다. 안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집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월령안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마음속으로 몰래 탄식할 뿐이었다.
‘수 맹주도 참……. 분명 약속해 놓고서는 손을 떼다니. 오히려 일을 만든 꼴이 되었잖나?’
월령안은 고개를 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사의 옆을 지나쳐 꿋꿋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모두가 남의 고충과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해 주는 건 아니다.
그녀가 가지 않는다면, 황금당 사람들은 그녀가 자신들을 농락했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 * *
월령안은 모든 것을 일찌감치 준비해 놓았다. 그래서 성문이 닫힌 시간에도 월씨 가문의 마차는 측문으로 순조롭게 나갈 수 있었다.
그들은 떳떳하게 나갔다.
오늘 밤 외출을 위해 그녀의 부하들은 심혈을 기울여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했다. 모든 방면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해, 매 단계가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약속 시각은 바꾸고 싶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수 오라버니는 일을 너무 간단하게 생각한단 말이야.’
월령안은 마차에 앉아 흔들림에 몸을 맡겼다. 마차는 칠흑같이 어두운 성 밖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성 밖으로 나간 뒤 마차가 전력으로 달린다고 하더라도, 최소 한 시진은 걸려야 명월산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월령안은 시간에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마차에서 잠시 휴식하려 했다.
내일이면 또 한 차례 전쟁을 치러야 했다. 반드시 잘 쉬어 두어야 했다.
하지만 눈을 감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차가 멈춰 섰다.
“어찌 된 일이냐?”
월령안은 깜짝 놀라 깨어났다. 눈에는 금방 잠에서 깨어난 흐리멍덩함은 전혀 없이, 날카로운 한기뿐이었다.
“아가씨, 야간 순찰을 하는 육 장군 일행과 마주쳤습니다.”
마부가 차 문을 사이에 두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육 장군? 이렇게 우연히?”
월령안은 가볍게 웃고서 기다란 속눈썹을 살며시 내려 눈에 비친 비웃음을 감추었다.
“육 장군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여쭈고, 최대한 협조할 거라고 해라.”
마부는 대답하고 마차에서 내려 물으러 갔다. 두어 마디 주고받더니 다시 돌아왔다.
“아가씨, 우리더러 마차에서 내려 조사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지.”
월령안은 마차 문을 열었다. 마부가 낮은 걸상을 발판으로 가져다주기도 전에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녀는 착지하고 몸을 가눈 뒤 고개를 들었다.
마차 앞에는 육장봉이 있었다. 어두운 밤인데도 그의 눈빛에서는 시퍼런 예기가 드러났다.
“대장군.”
월령안은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조사해라.”
육장봉이 손을 들어 올리자, 등 뒤에 있던 친위대가 즉시 앞으로 다가왔다.
육장봉의 곁에는 친위대 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다. 월령안은 흘끗 보고는 곧 눈길을 거두었다.
‘오늘의 모든 건 육장봉이 파 놓은 함정이다. 수 오라버니 일행은 아마도 위험할 거 같구나.’
월령안 일행은 마차 하나에 호위 수십 명이었다. 마차 외에는 따로 조사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마차는 월령안이 탔던 것이었다. 친위대로서도 조사할 엄두를 못 냈다.
그들도 바보가 아니었다. 오늘 밤 갑작스럽게, 그것도 명월산장으로 가는 길목만 야간 순찰을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오직 아무것도 모르는 육십이만이 아무도 마차를 조사하지 않자 고분고분하게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마차에 기어오르자마자 육이가 와락 끌어내렸다.
“월 낭자의 마차는 장군께서 직접 조사할 거다.”
“어, 네.”
육십이는 순순히 대답했다. 바로 고개를 돌려 육장봉에게 소리쳤다.
“장군, 조사를 마쳤습니다. 월 낭자의 마차만 남았는데 장군께서…….”
육장봉은 묵묵부답이었다.
“입 다물어!”
육이의 표정이 대번에 변했다. 육십이의 엉덩이에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넌 언젠가 그 멍청함 때문에 죽을 거다.”
“으악……!”
육십이는 크게 비명을 지르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조심해!”
육이가 육십이를 확 붙들었다. 육이는 육십이를 제대로 붙잡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육십이는 육이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크게 휘둘렸다. 육십이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한 바퀴 핑그르르 돌았다.
그러자 그의 허리춤에 꽂혀 있던 칼집이 날아가더니 마차를 끌던 말의 배에 스쳤다.
히히힝!!
다그닥, 다그닥…….
깜짝 놀란 말이 울부짖더니 마차를 끌고 앞으로 내달렸다.
“마차, 마차가……!”
육십이는 몸을 가누자마자 말이 마차를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본능적으로 쫓아갔으나 한발 늦었다.
꽈당!
마차를 끌던 말은 자신을 모는 사람이 없자, 종횡무진 돌진하다 옆에 있던 나무를 들이박았다. 말이 마차와 함께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제, 제가,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닙니다……. 월 낭자, 진짜 아닙니다. 저는, 저는 장군께서 낮에 몇십 바퀴를 뛰라는 벌을 내려서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랬어요. 순간 몸을 가누지 못해서 넘어졌습니다. 정말 일부러 마차를 망가뜨리려 한 게 아닙니다.”
육십이는 깜짝 놀라 얼이 빠졌다. 두 손을 위로 번쩍 든 채, 월령안을 억울한 듯이 바라보며 다급하게 변명했다.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저, 저기……. 마차는 제가 배상하겠습니다.”
월 낭자의 마차는 보기엔 평범해도 사실은 가격이 어마어마하게 비싸다고 했다.
‘나를 판다 해도 망가진 마차를 물어낼 수나 있으려나? 그리고 말도 다친 것 같은데. 나를 몇 번이나 팔아야 배상할 수 있을까?’
“육이, 그래서 지금 내 잘못이란 거냐?”
육장봉이 어두운 표정으로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육십이가 아직도 교훈을 얻지 못한 걸 보면, 낮에 내린 벌이 약했던 모양이다.
“장군,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육십이는 금세 겁을 먹었다.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은 꼴이 볼품없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괜찮아요. 고작 마차 한 대 가지고요, 뭘. 배상할 필요 없어요.”
육십이가 잔뜩 겁을 먹은 꼬락서니를 보자, 월령안은 화가 나면서도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나오면 받아들였지만, 강하게 나오면 반발하는 성격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게 육십이처럼 ‘말랑말랑한’ 사람이었다. 육십이 같은 사람을 만나면 전혀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심지어 우습게만 여겨졌다.
“흑흑흑…….”
배상할 필요가 없다는 월령안의 말을 들은 육십이는 감격해서 어쩔 바를 몰랐다.
“월 낭자는 진짜 좋은 분이세요.”
‘몸을 팔지 않아도 되겠구나. 정말 다행이다.’
육십이는 감동의 시간이 지나자,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고개를 들어 월령안을 바라보며 기쁨에 겨워 말했다.
“월 낭자, 낭, 낭자의 마차가 망가졌잖아요. 호위가 필요하지 않으세요? 아니면, 아니면 제가 호위해 드릴까요?”
‘야율제의 부하가 월 낭자를 습격할 때, 내가 월 낭자를 보호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월 낭자가 내게도 넉넉한 위로금을 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