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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198)화 (198/1,004)

198화 타락한 무림맹주

수횡천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령안이도 이 일에 연루되는 건 아니겠지? 령안이는 우리 강호인들과는 다르다. 일이 생기면 바로 달아날 수도 없어. 령안이는 딸린 사람도 많고 사업도 크니, 풍파를 견디지 못할 텐데.’

“네.”

주정은 대답했지만,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고개를 들었다가는 자신의 눈에 떠오른 경멸감을 수횡천에게 들킬까 두려웠다.

그럼에도 수횡천을 찾아온 이유는 그가 조금이나마 능력이 있었고, 무엇보다 수횡천은 낮에 장군부의 지하 감옥까지 들어갔다가 와서 사부가 갇힌 장소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수횡천 쪽에서 부탁했더라도 계획에 끼워 주지 않았을 것이다.

“자네…….”

수횡천은 잠깐 생각에 잠겼지만, 말없이 탄식만 내뱉었다. 아무래도 이들과 함께 다녀와야 할 것 같았다.

“잠깐 기다리게. 집주인에게 이야기하고 올 테니.”

수횡천의 말을 들은 주정은 즉시 불쾌함을 드러냈다.

“수 맹주, 이건 우리 무림의 일입니다. 어찌 일개 상인에게 일일이 말한단 말입니까?”

“내가 고용된 몸이라 그러네. 자리를 비우려면 당연히 고용주에게 허락을 받아야지.”

수횡천은 생각나는 대로 아무 핑계나 갖다 붙였다.

이 말을 들은 주정은 비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수 맹주, 당당한 무림맹주가 일개 여자 장사꾼에게 고용되더니, 우리 무림인의 체면을 완전히 던져 버렸군요. 이런 맹주의 모습이 만약 소문이라도 나면 남들이 우리 무림맹을, 강호인을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무슨 말인가? 당당한 무림맹주는 일하면 안 되는 건가? 무림맹주면 의식주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나? 돈이 필요 없을 만큼?”

비록 임시로 갖다 붙인 구실이지만, 주정의 말을 듣고 나니 수횡천 역시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남에게 고용되어 자신의 노동력으로 돈을 버는 행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수 맹주, 당신은 무림맹주입니다. 보통 사람이 아니라! 어찌 스스로 체면을 구기며 일개 여자 장사꾼의 지시를 받는단 말입니까.”

주정은 화가 난 나머지 수횡천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사실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말을 이어 나갔다.

“수 맹주도 저도 모두 무림인입니다. 출가자(出家者)처럼 속세에서 벗어나 세상사에 초연하지는 못하더라도, 어찌 종일 돈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과 한 패거리가 될 수 있습니까? 사부께서는 줄곧 금전을 하찮게 여기셨습니다. 사부께서는 무림인이라면 무학의 최고 경계를 추구하고, 의협심을 발휘하여 의로운 일을 행하고, 검 하나를 들고 천하를 누비는 소탈함과 자유분방함을 추구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강호인이, 하물며 무림맹주가 돈 때문에 남의 싸움꾼 노릇을 하다니요? 당신 같은 맹주가 있다니, 진정 무림의 수치입니다!”

주정은 옷소매까지 떨치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수횡천과 가까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강호를 누비며 돈을 쓰지 않는 데가 어디 있는가. 자네가 입은 그 검은 비단옷 한 벌도 수십 냥은 할 텐데. 그 말대로라면, 자네와 잠 선배는 줄곧 돈을 벌지 않았는데 대체 어디서 돈이 난 겐가?”

수횡천도 예전에는 입만 열면 돈 얘기를 하는 게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월령안과 함께한 시간이 길어지자, 그제야 과거에 고결한 척하던 자신이 얼마나 가식적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버는 것은 잘못이 없다. 고결하여 돈을 하찮게 여기는 것도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땡전 한 푼 없이 자신과 식구도 먹여 살리지 못하는 사람은 고결한 척할 자격이 없었다.

“하!”

주정은 거만하게 웃더니 턱을 쳐들고 득의양양해서 말했다.

“제 사부가 어떤 분이십니까? 어찌 돈이 모자랄 일이 있겠습니까. 해마다 세도가들이 사부께 돈을 바치는데 말입니다. 사부께서 꼭 받아 주신다는 보장이 없는데도요.”

수횡천이 담담하게 물었다.

“잠 선배께서 그들의 돈을 받았으니, 그들을 위해 번거로움을 해결해 주어야 하지 않나? 아니면 적절하게 그들을 보호해 준다거나. 그와 다를 바가 없네.”

이 세상에는 이유 없이 잘해 주는 경우도, 이유 없이 대가를 치르는 경우도 없다. 월령안의 말처럼 남들이 부모도 아닌데, 왜 조건 없이 의식주를 책임지고 돈을 주겠는가?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누구든 돈을 갖다 바칠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주는 게 많을수록 바라는 게 클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간사하지 않으면 상인이 되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월령안은 따지고 보면 그 세도가들이 상인보다 훨씬 더 지독하다고 했다.

세도가의 돈은 그렇게 쉽게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들에게서 이익을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들에게서 돈을 받았으면,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 일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했다.

“수 맹주, 무슨 뜻입니까?”

주정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신중하게 말했다.

“사부가 그들을 돕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 없는 일입니다. 하물며 사부는 그들과 다년간 사귀어 막역한 사이인데, 어찌 수 맹주와 같을 수 있습니까.”

“하하하하!”

수횡천은 큰 소리로 웃었다.

“잠 선배는 고결하신 분이시지. 우리 후배들의 모범이고 말고. 나는 그분의 발꿈치에도 못 미칠 걸세. 하지만 주정 후배, 나는 잠 선배와 다르네.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닐세. 그러니 나는 고용주에게 말하고 나가야 하네. 기다리고 싶으면 기다리고, 기다리기 싫으면 마음대로 하시게.”

수횡천은 말을 마치더니 주정에게 포권을 했다. 그리고 그의 곁을 지나쳐 걸어갔다.

주정은 수횡천을 막아서려고 했다. 그러나 손을 뻗는 순간 수횡천의 눈에 떠오른 살기에 깜짝 놀랐다. 그의 손은 허공에서 굳어 버린 채 꼼짝하지 못했다.

수횡천은 그를 무시하고 본채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바로 아무 하인이나 붙잡고, 월령안에게 자기가 용건이 있어 화청에서 기다린다고 전해 달라고 했다.

하인은 대답하고 뒤뜰로 달려갔다.

월령안은 막 뜰을 나선 참이었다. 마침 그녀를 찾아온 하인과 맞닥뜨리자, 다시 몸을 돌려 화청으로 갔다.

줄곧 침착하던 수횡천이 지금 이 시각에 급히 그녀를 만나려고 했다. 분명 중요한 일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수 오라버니.”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화청으로 갔다. 그녀가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수횡천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령안아, 일이 좀 생겼구나.”

수횡천이 월령안을 알게 된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녀에게 호감이 갔다. 무엇보다 그녀를 믿기에 주정이 그를 찾아온 사실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천궁각의 일도 빠트리지 않고 중점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는 월령안이 천궁각과 사이가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이번에 잠한성 구출 작전에 참여하는 사람이 그녀가 불러온 사람이라면, 그녀로서도 또한 책임을 면하기 어려웠다.

“천궁각의 소각주(少閣主)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긴 해요. 하지만 친분은 친분이고, 장사는 장사예요. 천궁각의 사람을 제가 관리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 일에 참견할 수는 없죠. 제가 천궁각에 일을 의뢰하기는 했지만, 그건 정상적인 거래일 뿐이에요. 돈을 내고 일을 시켰으니, 거래 외의 일은 저와 상관없어요. 상관하지도 않을 거고요.”

월령안은 수횡천의 이야기를 듣고도 천궁각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수횡천에게 자기 입장을 밝힌 후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오라버니가 오늘 잠 선배를 만났죠? 그런데 바로 당일 저녁에 그 사람의 제자가 찾아와서 함께 구출하자고 하다니,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 절묘하지 않아요? 게다가 오늘 밤 장군부의 수비도 평소보다 절반이나 줄었어요. 오라버니, 이번 일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어떻게 봐도 잘 짜 놓은 판 같잖아. 강호인들을 덫에 빠뜨리려는 판.’

“령안아, 그럼 네 말은……?”

그녀의 말을 들은 수횡천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함정이에요.”

월령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육장봉은 경기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어요. 게다가 최근 야율제의 일 때문에 변경성(汴京城) 바깥 경비는 느슨한 대신 내부 경비는 삼엄해요. 갑자기 강호인이 떼 지어 나타났는데, 정말 육장봉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세요?”

수횡천의 낯빛이 확 변했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려 했다.

“이 일을 그들에게 알려야겠다. 함정에 빠지지 말라고 말이야.”

“수 오라버니.”

월령안이 손을 들어서 그를 막았다.

“한마디만 할게요. 미움받을 짓은 하지 마세요. 강호에서 오라버니의 명성은 이미 바닥이에요. 오라버니가 설득하려 해도, 그들은 오라버니가 나약하다고 생각하고 두려워하는 거로밖에 보이지 않을 거예요. 심지어 오라버니가 잠한성을 구출하기 싫으니까, 일부러 자신들에게 겁준다고 생각할 거예요.”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 봐야 아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겪지 않으면 교훈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들에게 이 일의 이해득실을 말해 줄 거란다. 그들이 당하는 것을 눈 뜨고 보고 있을 수만은 없지. 그들이 믿든지 안 믿든지, 결국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수횡천은 월령안의 손을 밀어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월령안이 탄식했다.

“오라버니, 만약 그들이 오라버니의 권유를 듣지 않고 기어이 잠한성을 구하러 가겠다면……, 함께 갈 건가요?”

그녀는 천궁각 소각주와 개인적으로 사이가 좋았다. 그래도 천궁각의 제자들을 찾아가서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그들이 한데 모여 잠한성을 구하려는 것은 의협심 때문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설득할 수가 없었다. 설령 설득해서 그들이 이해득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단 한 사람이라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소용없었다.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의협심 때문에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강호인이라면 다른 건 몰라도 의협심만은 포기해서는 안 되었다.

수횡천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갈 거다!”

그가 있다면 육장봉에게 일망타진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라버니, 저하고 약속했잖아요. 오늘 밤, 제가 명월산장에 가는 길을 지켜 준다고요.”

사실 그녀는 기뻐해야 했다. 수횡천처럼 대협의 기개와 풍모를 가진 사람은 언제나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했다. 그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버리고 강호인을 돕는다는 것은 그녀를 자기 사람으로 생각해 내외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수횡천의 사심 없고, 의리 있는 면을 높이 평가하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자신의 편으로서, 그가 좀 이기적으로 굴었으면 했다. 그 자신과 자기 곁의 사람부터 잘 보살피기를 바랐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횡천이 정말로 그녀처럼 이기적이고, 자기 이익만 고려한다면, 그녀가 높이 평가하는 수 오라버니라고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생각해도 참 모순적이었다. 하지만 인간이란 원래 이렇게 복잡하고 입체적인 법이다.

“령안아, 미안하게 됐구나.”

수횡천이 미안해하며 말했다.

“그들을 버려둘 수가 없구나. 너도 알지 않느냐.”

‘내가 알기는 뭘 안다고? 난 아무것도 몰라.’

월령안이 토라져서 말했다.

“그럼 저는요? 저는 아무래도 좋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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