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오늘 밤이야말로 좋은 기회
내일이 춘일연이니, 오늘 밤은 천궁각에서 설치한 장치를 시험해 보기에 딱 좋은 때였다.
혹시 문제가 있더라도 천궁각의 사람들이 손볼 시간이 있었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인이 지금 준비하겠습니다.”
집사는 허리를 굽힌 채 물러갔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야율제가 잡을지 안 잡을지 모르겠네.”
월령안은 의자에 기대앉아 육장봉이 준 호각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항상 웃음을 머금고 있던 얼굴에는 음산하고 차가운 살기가 흘렀다.
어둠 속에 묻혀 월령안을 보호하던 암위는 저도 모르게 흠칫 떨고 말았다. 얼마 전에 신입들과 함께 훈련하게 된 동료가 떠올랐다.
그는 한참 주저하다 이 소식을 장군부에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동료 몇몇이 무엇을 잘못했길래 그렇게 엄하게 벌을 받는지는 잘 몰랐다. 하지만 월 낭자와 관련이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월 낭자와 관련된 일은 신중하게 다루는 게 좋을 듯싶었다.
* * *
저녁 무렵이 되어 육일은 암위에게서 소식을 받았다. 잠깐 주저했지만, 그래도 서재에 찾아가 육장봉을 만났다.
“대장군, 월 낭자에 관한 소식입니다.”
“무슨 일이냐?”
육장봉은 손에 공문을 든 채 고개도 들지 않았다. 전혀 무관심한 모습이었다.
한순간 육일은 이런 ‘사소한 일’ 하나만을 대장군에게 보고하는 게 괜히 침소봉대(針小棒大) 하는 꼴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이미 온 이상 그만두려고 해도 늦었다. 시치미를 떼고 보고하는 수밖에 없었다.
“장군, 월 낭자가 오늘 밤 명월산장에 방문을 알렸으며, 천궁각에서 설치한 장치를 시험한다는 보고입니다. 호위 없이 수횡천과 동행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자신을 미끼로 야율제를 유인하여 모습을 드러내게 하려는 모양입니다.”
육일은 생각 끝에 자신의 추론까지 더해 말했다. 무언가 덧붙이지 않으면 보고로서 격식을 갖추지 못하게 된다. 즉, 월 낭자의 행적을 일부러 알리러 왔다는 느낌을 줄 것이다.
물론 그게 사실이기는 했지만, 장군에게 그런 느낌을 주어서는 안 됐다.
“자신을 미끼로 삼았다고?”
육장봉은 손에 든 공문을 내려놓고 냉소했다.
“머리가 참 좋군. 자기가 내놓은 현상금을 자기가 벌어 갈 모양이야.”
“장군…….”
육일이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장군의 말은 월 낭자의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그래도 월 낭자가 현상금 때문에 목숨을 내거는 것은 분명 아닐 텐데. 그분이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됐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인데, 그냥 하지 마라.”
육장봉은 오른손으로 책상을 짚고서 윗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가서 장군부의 수비 절반을 철수시켜라. 그리고 수횡천이 오늘 잠한성을 만났고, 잠한성이 어디에 갇혀 있는지 알고 있다는 소식을 흘려라.”
‘한쪽은 존경하는 선배, 한쪽은 연을 맺은 지 얼마 안 되는 의동생. 가슴에 천하를 품고 있는 무림맹주가 어느 쪽을 선택할지 대단히 기대되는군.’
“네, 장군.”
육일은 마음속으로 수횡천을 위해 촛불을 켜 놓고 묵묵히 기도했다.
‘장군의 손에 걸려들다니, 수 맹주가 재수에 옴이 붙었군. 하지만 장군께 당하는 게 남에게 당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다. 장군은 적어도 수 맹주의 목숨을 노리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수 맹주가 자유를 잃고 평생 죄인으로 지내게 하지도 않으시겠지.’
무림맹주는 매우 위험한 자리였다. 전임 무림맹주 잠한성은 지금 감옥에 있었다. 잠한성의 전임 무림맹주는 비무 중에 죽었다. 그리고 위로 몇 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누구 하나 천수를 누리고 곱게 죽지는 못한 듯했다.
‘수 맹주가 장군에게 두어 번 더 당해 보고, 몇 번 더 뒤통수를 맞고 나면 조금이나마 더 교훈을 얻겠지. 이게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몰라. 적어도 장군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보통 사람에게는 쉽게 당하지 않을 테니까.’
육일은 이렇게 생각하고는 마음속에 있었던 자그마한 양심의 가책마저 던져 버렸다.
* * *
육일의 지휘에 따라 일은 육장봉이 바라는 대로 착착 진행되었다.
잠한성이 사라지자 그의 제자는 바로 잠한성의 추종자들에게 연락했다. 이들은 한데 모여 잠한성을 구출하려고 기회를 엿봤다.
그러나 성안에 여러 날을 머물렀는데도 일은 전혀 진척이 없었다.
장군부는 철옹성이었다. 잠한성을 구하기는커녕 그의 소식조차 알아낼 수가 없었다. 여태껏 어디에 갇혀 있는지조차도 알아내지 못했다.
장군부의 방어는 철통같았다. 무공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접근조차 하기 힘들었다. 장군부에 잠입하여 소식을 염탐하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포기하려는 순간, 실마리가 잡혔다.
“방금 알아낸 소식입니다. 오늘 밤 육 대장군이 성 밖으로 나가 경기(京畿) 일대의 방어 현황을 순찰한답니다. 장군부에서 절반 이상의 시위를 데리고 가며, 그자의 친위대도 따라간다고 합니다. 오늘 밤이 좋은 기회입니다.”
잠한성의 제자야말로 잠한성을 가장 구출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장군부의 조그마한 변화도 놓치려 하지 않았다.
잠한성의 제자는 갖은 방법을 다해 이 소식을 알아냈다.
“육장봉이 사람을 거느리고 성 밖으로 나간다고? 그야말로 좋은 기회로군. 절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오.”
당장 변경으로 달려와 잠한성을 구출하려는 사람은 모두 그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그들은 잠한성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뒤따랐다.
“우린 아직도 육장봉이 잠 맹주를 어디에 가두었는지 알아내지 못했소. 무모하게 장군부로 쳐들어갔다가 잠 맹주를 찾지 못하면, 되려 그들이 더 경계하도록 만드는 꼴이 아니오?”
잠한성을 옹호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인정을 받은 맹주는 오직 잠한성뿐이었다. 조정에 기대려는 수횡천은 조정의 무림맹주였다.
“제가 알아냈습니다. 사부께서 갇힌 다음 수횡천이 사부를 만났었답니다. 사부께서 어디에 갇히셨는지 알 테니, 수횡천을 찾아가면 될 겁니다.”
잠한성의 제자는 흥분하여 말했다.
‘하늘이 우리를 도우니 꼭 사부를 구출해 낼 수 있을 거야.’
“수횡천? 그 사람은 우리와 이념이 다르네. 줄곧 우리더러 조정을 따르라고 요구하고 있단 말일세. 그런 사람이 우리를 도우려고 하겠는가? 그리고 잠 맹주가 육장봉의 병사들에게 사로잡힌 것도 수횡천이 도왔다고 하더구먼. 그자가 육장봉과 한통속이 되었는데, 우리를 돕기는커녕 되려 팔아넘기면 어쩌란 말이오?”
“나도 수횡천을 믿을 수 없소. 수횡천은 우리 강호인들과 한마음이 아니오. 그놈은 조정의 앞잡이요.”
“맞소. 수횡천은 조정의 앞잡이요. 난 죽어도 그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지 않을 거요.”
많은 강호인은 수횡천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입을 열면 원망만 할 뿐 그를 전혀 신임하지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본 잠한성의 제자는 급히 말했다.
“여러분이 수 맹주를 오해하고 계신 겁니다. 사부께서는 수 맹주야말로 진정한 협객이라고 하셨습니다. 수 맹주는 마음속에 무림과 강호를 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조정의 앞잡이도 아니고, 신의를 저버리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믿고 부탁할 만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잠한성 제자의 말을 듣고, 몇 명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세웠다.
“잠 맹주가 정말 그렇게 말한 거요?”
“잠 맹주가 수횡천을 그리 높게 평가한단 말이오?”
“물론입니다.”
잠한성의 제자는 몇 사람의 태도가 누그러지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께서 직접 말씀하신 겁니다. 믿지 못하시겠으면…… 오늘 밤 시험해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수 맹주가 무공이 강하니, 그분이 있으면 우리의 승산도 커집니다.
만약 수 맹주가 우리를 돕지 않으면, 장군부의 시위가 줄어든다고 해도 사부께서 어디에 갇혀 있는지 알지 못하니 구출해 낼 방법이 없습니다.”
“그럼…….”
무림인 몇몇은 서로 마주 보더니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럼 시도해 보도록 하세.”
몇 사람이 의논한 끝에, 잠한성의 제자가 여럿을 대표하여 수횡천에게 연락하기로 했다.
* * *
잠한성의 제자가 월씨 가문의 경비를 피해 수횡천을 찾아갔을 때는 마침 술시였다. 수횡천은 마구간에 가서 월령안을 기다리려던 참이었다.
그가 막 출발하려는 순간, 누군가에게 잡히고 말았다.
“수 맹주, 소생은 주정(周呈)이라고 합니다. 잠 맹주의 제자입니다.”
잠한성의 제자 주정은 수횡천에게 얻어맞고 내쫓길까 두려워 바로 신분부터 밝혔다.
주정의 말을 듣고 수횡천은 공격하려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주정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잠 선배의 제자인가? 나를 무슨 일로 찾았나?”
“사부가 갇힌 뒤에 수 맹주께서 만나 보셨다고 들었습니다. 수 맹주께서 후배를 도와 사부를 구해 주기를 부탁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주정은 정중하게 큰 예를 올렸다.
“사부의 안위에 강호의 평화가 달려 있습니다. 수 맹주께서 거절하지 않으신다면, 후배는 감격해 마지않을 겁니다.”
주정은 수횡천과 몇 살 차이 나지 않았다. 그는 전 무림맹주의 제자로서 평소에는 자부심이 넘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도움을 청하는 처지였다. 수횡천이 거절할까 두려워 일부러 후배라고 자청했다.
‘사부께서 수 맹주는 의협심과 정의로 똘똘 뭉치고, 웅대한 포부를 품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수 맹주가 나 같은 강호 후배의 부탁을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수횡천은 낮에 잠한성을 만나러 갈 때부터 그를 구출해 내려 했다. 하지만 도(道)가 한 자 높아지면 마(魔)는 한 장 높아지는 것을 어떡하랴.
육장봉은 그의 생각보다 더 교활하고 음험했다. 그가 잠한성을 장군부에서 구출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이 순간 주정의 부탁을 들은 수횡천은 탄식만 할 뿐이었다.
“주정, 낮에 장군부의 지하 감옥에 가서 잠 선배를 만난 건 확실하네. 나도 잠 선배를 구출하고 싶었네. 하지만 들어가 보았더니, 장군부의 지하 감옥은 비밀 장치로 뒤덮여 있더군. 장군부의 사람이 길을 안내하지 않으면 전혀 들어갈 수 없네. 잠 선배를 구출해 내는 건 더 말할 필요도 없지.”
그들은 육장봉을 너무 얕잡아보았다. 육장봉은 마교 교주 남상권보다 더 음험했다.
수횡천은 저도 모르게 또다시 육장봉이 곧 남상권일 것이라고 의심했다. 두 사람의 일 처리 방식은 너무나 닮아 있었다.
하지만 증거가 없었다.
“수 맹주, 이번에 사부를 구출하려는 사람 중에는 천궁각의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아낸 바에 의하면, 육장봉이 오늘 사람을 거느리고 경기 일대의 방어 현황을 야간 순찰한다고 합니다. 장군부의 호위 절반을 거느리고 간다고 하니, 오늘 밤이야말로 좋은 기회입니다.”
주정은 고개를 숙여 눈에 비친 경멸과 비웃음을 감추었다.
수횡천이 할 수 없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천궁각의 사람들? 설마…… 명월산장에서 온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