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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196)화 (196/1,004)

196화 상대할 수 없으면 피하라

주나라 관료 사회에서는 줄곧 문관의 세력이 컸다. 그동안 문관은 무장이 고개도 들지 못하게 억압해 왔다.

육장봉은 군공을 세워 지금의 자리에 앉았지만, 싸움만 잘해서는 앉을 수 없는 자리였다. 수완, 그것도 문관들이 그를 어찌할 수 없는 수완이 있어야 했다.

이로 보건대 육장봉은 상당히 뛰어난 수완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들어올 때 길을 기억해 두었습니다. 육장봉은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암묵적으로 허락한 것이 아닙니까.”

수횡천도 물론 육장봉이 까다로운 상대임을 알고 있었다. 이미 육장봉에게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적인 무력 앞에서는 어떤 계략도 소용이 없다 생각했다.

자신의 무공이 있는 한, 육장봉도 그를 어찌하지는 못한다. 기껏해야 약간 손해를 입히는 정도일 것이다.

“자네도 참……. 육장봉에게 또 당했구먼.”

잠한성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자네가 길을 기억해도 소용이 없네. 자네가 들어올 때 걸었던 그 작은 통로는 철판 조각으로 덮여 있지. 그 철판은 전부 움직일 수 있는 걸세. 그래서 매번 들어오는 길이 다르네. 그 길을 걸을 때 한 발짝이라도 잘못 디디면, 수많은 칼날에 찢기게 될 거야. 알겠는가?”

“그래서 제가 길을 기억한 걸 알면서도 육장봉이 화를 내지 않았군요?”

수횡천은 육장봉이 자리를 뜨기 전에 일부러 ‘똑똑히 기억했나’라고 물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는 육장봉이 불만스러워서 물었다고 생각했는데, 인제 보니 자신을 야유하고 비웃는 것이었다.

‘육장봉, 역시나 소인배였어!’

수횡천은 속으로 울분이 가득 차 얼굴이 시뻘겋게 되었다. 그러나 그 울분을 토해낼 길이 없었다.

“자네는 육장봉이 정말 그렇게 과감하다고 생각했나?”

잠한성은 수횡천이 아직 덜 깨달았다고 생각했는지 한마디 덧붙였다.

“육장봉이 왜 감방문도 닫지 않고 자네 혼자 이곳에 남아 있게 했다고 생각하나? 자네를 신임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있는 걸세.”

잠한성은 감방 주위를 가리키며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여기에는…… 모든 곳을 사람이 감시하고 있다네. 자네와 내가 나눈 모든 말과 행동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책자를 만들어 육장봉에게 바치겠지. 어쩌면 지금 육장봉이 어디에선가 우리를 보고 있을 수도 있어.”

그는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자기 허리에 감긴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이 쇠사슬이 파괴되는 순간, 이 감방에 설치된 암기가 순식간에 쏟아져 나올 거야. 그와 동시에 이 감방 바닥도 순식간에 아래로 꺼져 들어갈 걸세.”

잠한성은 발밑의 바닥을 디디더니 말을 이어 갔다.

“감방 바닥을 왜 청석(靑石)으로 깔았는지 아는가? 육장봉이 우리 같은 범인에게 자비를 베푼 게 아닐세. 흙이나 풀이 더러울까 봐 그랬겠나. 청석을 깔아야만 반응할 기회도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꺼져 들어가게 할 수 있어. 떨어져 내리는 순간, 자네나 나라도 다칠 수밖에 없네.”

‘수횡천은 내가 여기서 도망칠 생각을 안 해 본 줄 아나?’

그의 무공이 천하제일은 아니더라도, 강호에서는 최고의 고수였다. 이 세상에 그를 가둘 수 있는 곳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를 이곳에 가두었을 때, 속으로는 육장봉이 자신을 얕잡아 본다고 비웃었다.

하지만 숨을 고르고 도망칠 준비를 하려고 했을 때야 이 보잘것없는 감방에 빈틈없는 경계망이 처져 있음을 깨달았다. 도저히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 두 사람이 협력해도 이 감방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수횡천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싸움에서 진 수탉처럼 풀이 죽어 말했다.

잠한성은 가볍게 탄식했다.

“육장봉은 술책이 뛰어난 자일세. 나도 그자에게 패한 처지이다 보니, 자네에게 가르쳐 줄 만한 일이 없어. 앞으로 육장봉과는 최대한 적게 왕래 하는 게 좋을 걸세.”

상대할 수 없으면 피하라.

그가 수횡천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잠 선배, 감사합니다. 꼭 기억하겠습니다.”

수횡천은 억지로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여전히 의기소침해 보였다.

잠한성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됐네. 젊은이……. 이 정도 당한 게 뭐 대수라고. 아직 앞길이 구만리 같은 사람이.”

잠한성은 그렇게 말하면서 펼친 책장에 손을 얹더니, 손끝으로 가볍게 세 번 두드렸다.

수횡천은 순간 온몸이 굳어졌다. 잠한성이 손을 얹은 책장을 슬쩍 훑고는 곧바로 눈길을 거두었다.

‘잠 선배가 계속 책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니, 책 속에 무언가를 숨겨 둔 걸까? 아까 내 손목을 세 번, 아홉 번 두드린 거는 또 무슨 뜻일까?’

수횡천의 머릿속은 의문투성이였다. 그러나 감방 곳곳에서 감시하고 있다는 잠한성의 말을 떠올렸다. 지금은 모든 의문을 접어 둘 수밖에 없었다.

* * *

잠한성의 예상대로, 육장봉은 그들의 위쪽에 있는 방에 앉아 있었다. 잠한성과 수횡천이 하는 대화와 잠한성의 모든 동작이 육장봉의 눈을 벗어나지 못했다.

잠한성이 나름 은밀하게 했을 두 번의 두드림도 놓치지 않았다.

수횡천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육장봉이 명령을 내렸다.

“잠한성의 고향에 사람을 보내, 고향 집에 소장한 무공 비급을 주의 깊게 살피도록 해라. 숫자 삼, 구와 관련되는 건 중점적으로 신경을 쓰되, 책자를 전부 베껴 오도록 해라. 또 사람을 보내 잠한성이 오늘 본 책의 책장을 뒤지게 해라. 삼과 구에 관한 모든 실마리를 찾아내라.”

육장봉은 눈을 살짝 감고,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끊임없이 두드렸다.

말을 끝낸 그는 잠시 침묵했다. 갑자기 팔걸이를 두드리던 동작을 멈추고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삼, 구와 연관된 무림 문파, 산맥도 모두 조사해라!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잠한성이 두 번 두드린 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몰랐지만 괜찮았다. 수횡천만 미행하면 된다.

수횡천이 그 뜻을 알아낸다면, 그도 알게 될 것이다.

“네, 장군.”

육일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됐다. 먼저 가서 처리해라.”

육장봉은 눈을 뜨더니 팔걸이를 짚고 그 반탄력으로 몸을 일으켰다.

“사람을 시켜 수 맹주를 내보내라.”

목적을 달성했다. 당분간 수횡천은 쓸모가 없었다. 당연히 그가 시간을 허비해 가면서 직접 수횡천을 배웅할 필요가 없었다.

“네, 장군.”

육일은 육장봉이 떠나는 것을 공손하게 배웅했다. 그리고 시위에게 수횡천을 내보내라고 분부했다.

수횡천은 감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길잡이로 나온 사람이 평범한 시위임을 보았다. 줄곧 허례허식 같은 것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그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깊은 상처를 받았다.

처음 왔을 때 육장봉이 직접 길을 안내하던 것과 비교가 되었다.

수횡천은 수도 사람들이 너무 현실적이라고 느꼈다. 사람을 이용하고는 체면치레조차도 하지 않고 그냥 버려 버렸다.

수횡천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마음을 묵묵히 다잡고 시위의 뒤를 따라 감방을 나섰다.

예상대로 나가는 길은 올 때의 길과 같았다. 그 바람에 저도 모르게 의욕이 생겼다. 잠 선배를 구출하고 싶다는 충동이 또다시 일었다.

하지만 감옥을 나서는 순간, 등 뒤에서 쇠 굴대가 돌아가면서 쇠사슬을 당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횡천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언뜻 보았다. 그의 높은 무공 실력으로 자신이 조금 전에 지나온 ‘통로’가 들어 올려져 공중에서 이동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역시 요행을 바라서는 안 됐다. 육장봉을 얕잡아 보아서도 안 됐다.

수횡천은 다시금 탄식하고 말았다. 시위가 문 어귀까지 바래다줄 때까지 육장봉은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그는 무서울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육장봉 자신에게 쓸모가 있을 때만 얼굴을 내비치고, 쓸모가 없으면 그냥 시위를 보냈다.

수횡천은 고개를 돌려 장군부의 높은 담과 붉은 대문을 힐끗 보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성큼성큼 떠나갔다.

그런데 걸음이 너무 빠르다 보니, 장군부를 돌면서 뛰던 육십이와 하마터면 부딪칠 뻔했다.

그는 육장봉이 뒤로 손을 쓰는 줄 알고 급히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방어 태세를 취했다. 뜻밖에도 상대는 사과를 하더니 멈추지 않고 뛰어갔다. 목소리를 들어 보니 대단히 지친 모양이었다.

수횡천은 다시 한번 바라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장군부의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군. 저렇게 힘든 데도 계속 달리다니, 무슨 이상한 병에 걸렸나. 잠 선배 말씀이 맞아. 육장봉은 상대하기 어려우니 그냥 피하는 게 상책이야.”

수횡천은 날렵한 걸음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길모퉁이로 사라져 버렸다.

* * *

월씨 저택으로 돌아온 수횡천은 방 안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잠한성이 준 암시를 골똘히 연구했다.

“잠 선배는 천명사, 망산을 얘기했어. 그리고 책에 관해 중점적으로 얘기했고. 마지막으로 내 손을 세 번, 아홉 번 두드렸단 말이야. 이건 무슨 뜻일까?”

수횡천은 잊어버릴까 걱정되어 이 실마리를 일일이 종이에 적어 두었다. 하지만 반나절을 생각해도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맞다. 잠 선배가 맨 마지막에 탁자 위에 있는 책도 가리켰었지. 혹시 그 책에 단서가 있는 건가? 그런데 그 책에 뭐라고 쓰여 있었더라?”

이것도 종이에 적어 놓았지만, 여전히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잠 선배가 준 단서는 너무 단편적이야. 전혀 감이 안 잡히는데…….”

한참 동안 생각해 보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가볍게 탄식하고는 포기했다.

“그만두자. 날 괴롭힐 필요는 없지. 령안이의 일만 마무리되면, 잠 선배의 부탁대로 그분 부모님의 무덤을 이장해 드리자. 그때 가서 무슨 단서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는 자신을 혹사하는 법이 없었다. 실마리를 알아낼 수 없다면 잠 선배의 요구를 성실하게 따르면 그만이었다. 잠한성이 이렇게 부탁한 걸 보면 분명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다.

수횡천은 단서를 기록한 종이 두 장을 잘 챙겨서 몸에 간직했다. 지금은 생각나지 않지만, 언젠가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아무리 좋은 기억력이라도 낡은 붓보다 못한 법. 두어 가지를 더 적어 뒀다고 해서 손해 볼 건 없었다. 어차피 누구도 그의 몸에서 물건을 빼앗아 갈 수는 없으니까.

수횡천이 막 종이 두 장을 챙겼을 때였다. 월씨 가문 집사가 밖에서 물었다.

“수 맹주, 지금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무슨 일인가?”

수횡천이 문을 열고 걸어 나왔다.

집사는 수횡천에게 예를 올리고 물었다.

“수 맹주, 아가씨께서 오늘 밤 성 밖으로 나가려 하십니다. 저녁에 함께 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수횡천은 잠깐 생각하고 대답했다.

“갈 수 있네. 언제인가? 내가 마굿간에서 령안이를 기다리고 있겠네.”

“술시(戌時 – 오후 7시~9시) 일각인데, 괜찮겠습니까?”

집사가 예의를 갖춰 물었다.

수횡천은 두말없이 승낙했다.

“알겠네. 시간에 맞춰 가 있겠네.”

“수 맹주, 감사합니다.”

집사는 연신 감사를 표하며 미소를 띤 채 돌아갔다.

수 맹주가 함께 가 준다면, 성 밖에서 북요인을 만나도 아가씨의 안전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집사는 웃음꽃을 피운 채 월령안을 찾아가 수횡천의 대답을 전했다.

월령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명월산장 사람들에게 전하게. 황궁에서 보낸 사람들의 저녁밥에는 약을 좀 타 두라고. 그리고 내가 오늘 밤에 명월산장에 갔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서는 아니 되네.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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