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횡천, 부탁하네
두 사람은 얼마 안 되어 감옥 입구에 도착했다.
감옥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햇빛이 비쳐 들어오며, 조금 전까지의 어둠이 전부 걷혔다.
‘진짜 길이 맞았군. 육장봉이 수작을 부린 게 아니었구나.’
그 순간 수횡천은 육장봉을 너무 나쁘게 생각한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사람도 늘 계략만 꾸미는 건 아니었군.’
그러나 육장봉도 나름 괜찮다고 생각한 순간, 그가 갑자기 몸을 돌리며 비꼬듯 물었다.
“수 맹주, 똑똑히 기억했나?”
오는 내내 육장봉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수횡천도 주의를 기울였다. 하지만 육장봉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횡천이 무엇을 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 알면서 저지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수횡천의 얼굴이 삽시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육장봉을 똑바로 볼 엄두도 못 내고 민망한 듯 말했다.
“다, 당신…… 어떻게? 언제 알았소?”
줄곧 떳떳하고 바르게만 살아온 무림맹주는 낯가죽이 얇은 편이었다. 나쁜 일을 하다가 덜미를 잡힌 사람처럼 난처해하며 제 발이 저려 어쩔 줄 몰라 했다.
“흠.”
육장봉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고는 수횡천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감옥을 가리키며 말했다.
“잠한성은 가장 안쪽에 갇혀 있네. 이제 다른 사람이 자네를 데리고 들어갈 걸세. 수 맹주.”
“저기 육 대장군…….”
수횡천은 입을 달싹이기만 할 뿐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변명할수록 오히려 더 소인배같이 보이잖아.’
“쓸데없는 생각 마시게. 수 맹주.”
육장봉의 표정은 냉담했다. 수횡천이 얼마나 많은 의혹을 품고 있는지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곧 몸을 돌려 과감하게 지하 감옥을 빠져나갔다.
수횡천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육장봉이 내 됨됨이를 믿고 전혀 방어하지 않는 건가? 내가 잠 선배를 데리고 나가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건가?’
수횡천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음속에는 말할 수 없는 조급함이 밀려왔다.
잠 선배를 죽을 때까지 가둘 거라는 육장봉의 말을 듣는 순간, 그를 구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는 동안 길을 자세하게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육장봉이 또 이렇게 대담하게 그를 믿어 주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육장봉의 신뢰를 저버리기엔 미안했다. 그렇다고 잠 선배가 한평생 갇혀 있는 것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수횡천은 눈썹을 찌푸렸다. 얼굴에는 걱정과 고통이 가득 서려 있었다.
“수 맹주, 갑시다!”
수횡천이 진퇴양난에 빠져 있을 때였다. 지하 감옥을 지키는 시위가 앞으로 다가오더니 그에게 감옥 문을 열어 주고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수횡천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시위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통로 양옆에는 감방이 줄지어 있었다. 감방의 삼면은 모두 돌담이고, 통로 쪽만 쇠창살로 된 문이었다.
철문에는 검정 쇠사슬을 칭칭 감아, 감방문을 단단히 잠그고 있었다.
수횡천은 쇠창살 문 사이로 크지 않은 감방을 보았다. 감방에는 작은 침대 하나, 탁자와 의자가 하나씩 있었다. 안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땅바닥에도 청석을 깔아, 환경은 괜찮아 보였다.
벽 꼭대기에 박힌 팔뚝만큼 굵은 긴 쇠사슬 세 줄이 땅바닥에까지 드리워 있지 않았다면, 이곳이 감방인 줄도 몰랐을 것이다.
통로 양쪽의 감방을 합하면 거의 열 개쯤 되었다. 수횡천은 걸어가는 동안 양쪽 감방이 모두 비었으며, 가장 안쪽 감방에만 사람이 갇혀 있음을 알아차렸다.
갇혀 있는 사람은 잠 선배가 분명했다.
감방을 지키는 시위는 수횡천을 가장 안쪽 감방 밖으로 데려가더니 문을 열어 주었다.
“수 맹주, 들어가십시오.”
잠한성은 두 발과 허리가 모두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벽의 위쪽에 달린 작은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미약한 햇빛에 의지해 책을 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평온했다. 얼굴에서는 의기소침함이나 분노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감옥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집에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잠한성은 문을 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수횡천이 밖에 서 있는 것을 보았지만,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손에 들었던 책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게. 내가 자네를 만나겠다고 했네.”
“수 맹주, 일이 있으면 부르십시오. 소인이 들을 수 있는 곳에 있겠습니다.”
감방을 지키는 시위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감방의 문을 열어 주고, 수횡천이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더니 가 버렸다. 심지어 감방문을 닫지도 않았다.
“잠 선배!”
수횡천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잠한성을 바라보았다.
잠한성의 상태는 멀쩡했다. 육장봉이 그를 괴롭히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그의 눈매는 원망하는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평온해 보였다. 전혀 자유를 잃은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안색은 더욱 좋아 보였다.
하지만 어쩐지 어딘가 잘못된 것 같았다. 아니, 모든 게 다 이상했다.
육장봉은 너무 무심하게 행동했다. 그를 아예 걱정하지도 않았다. 감방 전체에 곳곳에 빈틈이 가득했다. 도무지 무림 고수들을 가둬 둔 곳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마치 감방에 갇혀 있는 사람이 전 무림맹주가 아니고, 지금 보러 온 사람도 현임 무림맹주가 아닌 듯싶었다.
‘육장봉은 사전에 대비해 놓은 건가, 아니면 나와 잠 선배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건가?’
육장봉은 그와 잠한성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를 이용해 잠한성을 사로잡으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육장봉의 일 처리가 이렇게 무방비하다니. 아니면, 미리 대비해 두었으니 내가 성공하지 못하리라고 확신하는 걸까?’
하지만 사람이 잠복해 있는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 이 감방에도 별다른 점이 없었다.
수횡천은 속마음을 감출 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마음속 생각의 칠 할은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잠한성은 놀란 그의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너무 쉽게 들어왔다고 생각하나? 감시도 너무 느슨하고?”
“아니, 아닙니다.”
수횡천은 긍정하지 않고, 난처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정신을 차리고 포권을 하고는 물었다.
“잠 선배, 평안하십니까?”
“앉게. 난 아주 잘 지내네. 육장봉이 정인군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를 학대하지는 않을 거네.”
강자는 강자를 존중한다. 육장봉은 강자일 뿐만 아니라 원칙과 능력을 겸비한 강자였다. 기백이 넘치며, 흉금 또한 넓었다.
자신이 육장봉에게 사로잡혀 감옥에 갇히고 자유를 잃었다 해서, 양심을 속이고 그를 소인배라고 비난하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서로 적대 관계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후배 중에서도 육장봉을 가장 높이 평가했을 게 분명했다.
“잠 선배, 육장봉이 선배께서 저를 만나려 하신다고 하더군요. 무슨 일이십니까?”
수횡천은 잠한성의 맞은편에 앉았다. 잠한성이 물을 따라 주려는 것을 보자, 서둘러 주전자를 넘겨받아 잠한성과 자신에게 각각 한 잔씩 따랐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몇 없다네. 자네와 사귄 적은 없지만, 자네 됨됨이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네. 자네에게 한 가지 일을 부탁하려고 하네. 좀 위험한 일일세.”
잠한성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하면서 끝머리에 한마디 덧붙였다.
“거절해도 괜찮네.”
“잠 선배, 말씀하십시오.”
수횡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시 한번 포권을 했다. 줄곧 잠한성의 개인적인 행실이 어떻든지 간에, 인간으로서는 존중할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잠한성은 몇 해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조정에서 탄압을 받더라도 줄곧 양보했으며, 한 번도 변명한 적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 나서 달라고 무림인을 선동하지도 않았다. 이로 보건대 이기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수횡천은 개의치 않고 잠한성의 부탁을 들어주려고 했다. 이는 후배로서 선배를 존중하는 것이었다.
잠한성이 이런 때 수횡천을 만나고자 한 데는, 수횡천의 됨됨이로는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수횡천이 묻지도 않고 단박에 승낙하자, 기쁨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까지 사람 구실을 못 하고 살지는 않았구나. 적어도 무림의 후배는 내 낯을 봐주지 않는가.’
“젊은이, 역시 내가 자네를 잘못 보지 않았네그려.”
잠한성은 시원하게 웃고 나서 몸을 일으켰다.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와 수횡천의 어깨를 두드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횡천, 내 부모님의 유골이 천명사(天明寺) 뒷산에 묻혀 있네. 그때 내가 간소하게 매장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부모님의 무덤을 옮기려고 했었지. 지금 보아하니 내가 하지 못하겠구먼. 나 대신 부모님의 무덤을 망산(邙山)으로 옮겨 줄 수 없겠나. 망산은 내 고향일세.”
잠한성은 말을 끝내고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그리고 정중하게 수횡천에게 읍을 끝까지 했다.
“횡천, 부탁하네.”
“잠 선배, 사소한 일입니다. 이렇게까지 예의를 차리실 필요 없습니다.”
수횡천은 깜짝 놀라 급히 앞으로 다가가 잠한성을 부축했다. 하지만 잠한성에게 손이 닿는 순간,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잠한성은 손을 뒤집어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의 손목을 세 번 두드리더니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아홉 번을 두드렸다.
수횡천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잠한성은 그의 손을 놓았다. 다시 읍을 하면서 시원스럽게 말했다.
“횡천, 수고가 많을 텐데 이 절은 당연히 받을 만하네.”
“잠 선배, 과분한 말씀입니다. 수고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예의를 차리실 필요 없습니다.”
수횡천의 잔뜩 찌푸려진 미간은 아직도 펴지지 않았다. 잠한성에게 그 두 번의 두드림이 무슨 뜻인지 너무 묻고 싶었다.
하지만 함부로 물었다가 잠한성의 의도를 그르칠까 두려웠다. 억지로 그 물음을 되삼켰다.
“횡천, 앉게.”
잠한성도 자리에 앉더니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이 아마 우리의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네. 내 고향 망산의 옛집에는 적지 않은 무공 비급(秘笈 –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 귀한 책)이 있다네. 모두 내가 그동안 강호를 돌아다니면서 수집한 것으로, 무슨 대단한 무공이 수록된 건 아니지만 한번 볼 만할걸세.”
잠한성은 여기까지 말하고서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원래는 강호무공록(江湖武功錄) 한 권을 묶어 볼까 해서 일찍이 각 문파의 무공 비급을 수집했었지. 이제는 기회가 없게 되었구먼. 그 책들을 내 집에 두어도 언젠가는 먼지가 되어 사라지겠지. 자네가 갈 적에 잊지 말고 그 비급들도 가져가게나. 어떻게 처리할지는 자네 마음이네.”
“잠 선배,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수횡천은 괜히 마음이 쓰라렸다.
잠한성에게서 비애에 찬 영웅의 말로를 보는 것만 같았다.
잠한성은 고개를 저었다.
“일찍 처리해야만 하는 일도 있네. 이십여 년간 어리석게 살아왔는데 이제 더는 그렇게 살 수 없네.”
“잠 선배, 제가 모시고 나갈 수 있습니다.”
수횡천은 일시적인 충동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들어올 때부터 이 생각을 품고 있었다.
“횡천, 이곳은 대장군부의 지하 감옥이네. 자네는…… 그렇게 쉽게 드나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잠한성은 우습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횡천, 육장봉은 소인배가 아닐세. 하지만 자네 생각처럼 그렇게 탁 트이고 정정당당하기만 한 사람도 아니라네.”
만약 육장봉이 무엇이든 겉으로 드러내는 올곧은 성격이었다면, 젊은 나이에 일품 대장군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