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역시 이심전심이시군요
육십이가 말하는 사이, 육장봉은 재빨리 한 바퀴 둘러보았다. 육십이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모두 마음이 동하는 표정이었다.
‘월령안, 인심을 사는 데는 능숙하군.’
육장봉은 냉랭하게 육십이를 바라보았다. 눈에는 위험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너는 돈 때문에 월령안을 보호하러 갈 생각이냐?”
큰돈을 벌 기대감에 부푼 육십이는 육장봉의 눈에 서린 한기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로 흥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 저를 보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목숨을 걸고 월 낭자를 보호하겠다고 맹세합니다. 누구든 월 낭자를 해치려면, 반드시 제 주검을 딛고 가야 할 겁니다. 제가 숨이 붙어 있는 한 누구도 월 낭자를 해치지 못할 겁니다. 장군, 저를 믿어 주십시오.”
‘근데 내가 월 낭자를 보호하다가 죽으면, 월 낭자가 위로금 은자 천 냥을 누구한테 줄까?
북요에 계시는 어머니께 보내 드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잘 지내고 계시는지 모르겠네. 걱정된다.’
“허!”
육장봉이 차갑게 웃었다.
“내가 월령안에게 말해주어야겠군. 너는 월 낭자의 생사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고, 오로지 돈에만 관심이 있다고 말이다.”
육장봉은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돌려 안쪽으로 걸어갔다.
육십이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다급하게 소리치며 쫓아갔다.
“아니, 아닙니다. 대장군, 저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제 말을 들어 보세요…….”
두 발짝이나 뛰었을까. 육장봉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차렷, 뒤로 돌아. 장군부 서른 바퀴 구보.”
육십이는 순간 멍해졌다가, 육장봉의 차가운 눈빛에 정신이 확 들었다. 당장 기합이 바싹 들어 기세 좋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장군!”
육십이는 말이 끝나자마자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양쪽에 있던 시위는 자신들이 부추긴 육십이가 대장군에게 심함 벌을 받는 광경을 목격했다. 하나같이 고개를 숙여 육장봉의 시선을 피했다.
육장봉은 그들을 힐끗 훑어보고는 일언반구도 없이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육십이가 이렇게 멍청하니 남에게 이용당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러고도 제대로 처신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몇 번은 더 당하게 둘 셈이었다. 장군부에서 당하는 것이 밖에서 당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장군, 돌아오셨습니까.”
장군부의 집사는 육장봉이 돌아온 것을 진작 보았다. 육십이가 당하는 과정 역시 낱낱이 보고 있었다.
노집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쪽에 서서 묵묵히 구경만 했다.
부인이 나간 다음부터 장군부의 분위기는 점점 더 어두워졌다. 나이가 있는 그로서는 육십이처럼 생기발랄한 젊은이가 보기 좋았다.
그들이 바보 같은 짓을 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자신도 몇 살은 젊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장군도 자기와 같은 생각이라고 믿었다. 그렇지 않으면 육십이가 제멋대로 구는 걸 가만두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이런 건 속으로만 알면 됐지, 말할 필요는 없었다. 입 밖으로 내면 장군이 겸연쩍어할 테니까.
집사는 육장봉의 뒤를 따르며 작은 목소리로 오늘의 사무를 보고했다.
“장군, 부인…… 아니, 월 낭자, 월 낭자께서 장군이 말을 좋아하시는 줄 알고, 특별히 명마 두 필을 보냈습니다. 소인이 일단 받아 두었습니다. 지금 마구간에 있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집사는 말을 하면서 육장봉의 반응을 몰래 살폈다. 그가 ‘실수’로 ‘부인’이라는 두 글자를 내뱉어도 육장봉은 화내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조만간 장군께서 부인을 달래서 다시 데려오시겠구먼.’
저택의 장식도 조만간 부인이 있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 원상 복귀될 것이다.
예전에 부인이 꾸밀 때도 모두 장군이 좋아하는 대로 꾸몄었다.
싫어하는 장식품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장시간 보게 되면 누구든 짜증이 나기 마련이다.
장군은 주나라 백성에게는 전신(戰神)으로, 북요인들에게는 악귀로 불렸다. 사실 그는 신도, 귀신도 아닌 보통 사람일 뿐이다.
자신의 마음속을 속속들이 알고 맞춰주는 걸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말 두 필? 조야옥사자인가?”
육장봉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본채로 걸어갔다. 눈매에는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집사는 육장봉의 표정을 미처 보지 못했다. 그의 말만 듣고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싱글벙글했다.
“장군과 부인은 역시 이심전심이시군요. 소인이 아직 말씀드리지도 않았는데 장군께서는 부인이 무슨 말을 보냈는지를 아시다니요.”
“하!”
육장봉은 비웃듯이 가볍게 소리를 냈다.
‘이심전심? 조야옥사자는 원래 내 것인데. 월령안이 조야옥사자를 지금 보내온 건 내게 대놓고 눈치를 주는 게 아닌가. 내가 조계안보다 노력하지 않는다고? 아니면, 야율제를 사로잡겠다고 약속하지 않아서? 그깟 얄팍한 말이 중요했던 건가? 사내가 되어 말로만 하는 약속이 무슨 소용이 있다고!’
육장봉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집사는 흠칫 떨었다. 자기가 한 말 중 어느 말을 잘못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그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는 것으로 이 화제를 묵묵히 끝맺었다. 다시금 엄숙한 모습으로 돌아와 조리 있게 말했다.
“장군, 월 낭자는 말 두 필 외에도 우리 장군부에서 보낸 호위병도 돌려보냈습니다. 월 낭자가 그들을 보살피지 않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돌아오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월 낭자는 월씨 가문의 규칙에 따라 호위병 세 명에게 넉넉한 위로금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감히 멋대로 처리할 수가 없어서, 받은 것들을 모두 보고했습니다. 장군께서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그들이 제 능력으로 얻은 것이니 자신의 것이다.”
육장봉은 집사가 말하는 넉넉한 위로금이 적지 않은 금액임을 알고 있었다. 이미 육십이에게서 귀가 먹먹할 정도로 들은 터였다. 남들이 시샘할 게 뻔했지만,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똑같은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각자의 운명은 다르게 타고났다. 이 세상에는 원래 공평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도 공평성을 유지하려고 일부러 애쓰지는 않았다.
게다가 월령안을 죽음을 각오하고 지키면 큰 보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의 부하들이 아는 건 좋은 일이었다.
최소한 월령안이 호각을 사용하기만 하면, 그의 부하들은 필사적으로 달려가 최선을 다해 그녀를 보호할 것이다.
“네, 장군.”
집사는 대답하고서 말을 이었다.
“장군, 비우 도련님이 한번 만나 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오전에만 세 번 왔었습니다. 지금 바깥은 서재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군께서 만나 주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만나지 않을 거다. 육씨 가문은 이미 분가했다고 전해라. 분가가 무슨 뜻인지 모르면 문장(門長)을 찾아가 물어보라고 해라.”
육장봉은 아무런 감정도 띠지 않고 말했다.
집사는 진작 이럴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볍게 대답했다.
“그놈 생모는 어떻게 됐지?”
육장봉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냉담하게 물었다.
집사가 대답했다.
“비우 도련님께서 성 밖에 장원 하나를 사서, 사흘 전에 그곳으로 보냈습니다.”
그 돈도 장군부에서 빌린 것이었다.
그리고 비우 도련님은 장원을 산 다음, 남은 돈을 모두 어머니 주(朱)씨에게 남겨 주고, 수중에는 한 푼도 없다.
‘이 며칠간 비우 도련님과 큰아가씨가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모르겠군.’
집사는 몰래 탄식했지만, 육장봉의 앞에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비림 아가씨가 딱했지만, 넷째 집안의 일은 말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불쌍한 사람은 미운 데가 있는 법이라는 말밖에는 따로 할 말이 없었다.
집사는 계속하여 보고했다.
“장군, 수횡천 맹주께서 바깥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 만나 보시겠습니까?”
육장봉은 잠깐 걸음을 멈추더니 말했다.
“지하 감옥으로 모시거라. 내가 곧 갈 것이다.”
집사의 보고를 듣고 난 육장봉은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장군 관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바꿔 입었다.
육장봉이 몸에 걸친 은회색 비단 두루마기는 그를 더욱 듬직하고 귀티나 보이게 했다. 적절하게 여며진 허리선과 살짝 너른 옷소매는 그의 좋은 몸매를 잘 드러냈다. 또 날렵하면서도 소탈한 맵시도 겸비해, 행동거지에서 형언할 수 없는 고귀함과 우아함이 엿보이게 했다. 그와 동시에 금욕적인 분위기까지 은은하게 내비치고 있었다.
사람과 옷이 서로를 돋보이게 해 주고 있었다.
육장봉 자신보다 월령안이 그를 더 잘 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은회색은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색상이 아니었다. 육장봉도 예전에는 거의 입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은회색 두루마기는 그에게 너무나 잘 어울렸다. 다른 사람이 입었다면, 이 두루마기의 멋스러움을 보여주지 못했을 것이다.
육장봉은 평상복으로 바꿔 입고, 수횡천이 기다리는 지하 감옥 입구로 갔다.
햇빛 아래, 고급스러운 질감의 은회색 두루마기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휘황찬란하게 반짝거려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육장봉이 나타나는 순간, 수횡천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손을 내리고 육장봉이 몸에 걸친 비싼 두루마기를 보았다. 그다음 자기가 입고 있는 하얗게 바랜 짧은 무명 웃옷을 보았다. 문득 청희 별장으로 되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그는 옷을 갈아입고 나가라던 월령안의 말을 듣지 않은 게 다시 한번 후회됐다.
장군부의 사람들이 옷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월령안이 말한 대로 손님을 만나러 가면서 제대로 차려입는 건 자신을 존중하고, 타인을 존중하는 행위였다.
‘다음에는 꼭 령안이 말을 들어야지. 내 누이동생이 나를 골탕 먹이지는 않을 거니까.’
수횡천은 내심 살짝 껄끄러웠다. 그래도 육장봉이 다가오자 앞으로 나아가 포권을 했다.
“육 대장군.”
“수 맹주.”
육장봉도 강호의 예로 답했다.
“육 대장군은 무슨 일로 나를 보자 하셨소?”
게다가 지하 감옥처럼 이상한 곳에서 만나자고 하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자네를 만나려는 게 아니네. 잠한성이 자네를 만나려 하는 거지.”
육장봉은 손을 들어 손가락을 까딱였다.
“열어라.”
“잠 선배, 그분은…….”
수횡천은 육장봉의 등 뒤에 서 있던 호위병이 앞으로 나아가 눈앞의 철문을 여는 광경을 보았다.
철문이 열리자, 앞에는 길고 어두컴컴해서 끝이 보이지 않는 통로가 뻗어 있었다.
‘여기가 감옥인가?’
“그자는 여기에 갇혀 있네.”
육장봉이 먼저 통로에 들어섰다.
“날 따라오게.”
수횡천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뒤따랐다. 잠시 주저하다 물었다.
“잠 선배는…… 이곳에 얼마나 갇혀 있어야 하오?”
친왕을 암살하려 한 건 죽을죄였다. 그런데 황제는 잠한성을 죽이지 않았다. 그러면 지하 감옥에서 살아서 나갈 기회가 있다는 뜻이다.
“얼마나 갇혀 있어야 하냐고?”
육장봉이 차갑게 웃었다.
“죽을 때까지.”
육 대장군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몸을 돌려 왼쪽으로 걸어갔다.
이 통로는 비밀 장치가 수두룩했다. 길잡이 없이 들어가게 되면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었다.
수횡천은 육장봉의 뒤를 따라 어두컴컴하고 굴곡진 지하 감옥을 걸었다. 걷는 내내 경계심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묵묵히 걸음 수를 세며, 언제 방향을 바꿨는지, 언제 모퉁이를 돌았는지를 마음속에 일일이 기억했다.
걸음마다 똑똑히 기억해 두었다. 길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조금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또한, 일부러 걸음 수를 기억하고 있음을 육장봉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한편으로는 정신을 분산하여 그에게도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만약 육장봉이 갑자기 말을 걸어오기라도 했을 때, 대답하지 못하면 곤란했다.
예상외로 육장봉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태도는 태연하고 대범했다. 수횡천이 길을 기억하더라도 두렵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