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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191)화 (191/1,004)

191화 내가 마주해야 할 인생

육씨 가문에 시집갔던 첫해, 육 노부인과 함께 입궁하여 결혼 연회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월령안은 그때 처음으로 황제를 가까운 거리에서 보았다.

황제가 자신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혐오한다는 느낌을 분명하게 받았다.

자신이 황제가 혐오할 만한 무슨 일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황제 앞에서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조신하게 행동했다.

월령안이 나서서 설득하고, 조계안이 그녀의 체면을 봐주다 보니 이 싸움은 할 수 없게 되었다. 조계안은 육장봉에게 손짓하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육 대장군, 또 무엇을 기다리나? 가세.”

육장봉은 조계안에게 반응하지 않았다. 월령안 앞에 다가서더니, 손가락 길이만 한 군령용 호각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위험에 처하면 하늘에 대고 부시오. 육가군(陸家軍)이 신호를 듣는 대로 최대한 빨리 달려갈 것이오.”

“육장봉! 이 소인배 같은 놈!”

조계안은 바로 폭발했다. 눈을 부릅뜨고 육장봉을 노려보았다. 그가 이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육장봉 이놈이…… 이렇게 계획적으로 나오다니!’

육장봉의 이 한 수는 대놓고 그와 겨루겠다는 뜻이었다. 그가 맨입으로 한 약속은 육장봉의 이 한 수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하고 가소롭게 되었다.

당장 그가 월령안에게 영전(令箭 – 군대에서 명령을 전달할 때 쓰는 깃발) 같은 걸 준다 해도, 남의 방법을 그대로 따라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맨 처음 한 사람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도 없었다.

‘육장봉, 비열하기 그지없군. 나를 배신하고 이런 수작을 부리다니. 뻔뻔함 그 자체야.’

“내가 왜 소인배인가?”

육장봉이 고개를 돌려 조계안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눈빛을 보아하니 언짢은 게 분명했다.

“너…… 너……!”

조계안은 육장봉을 삿대질했다.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수천 마디가 넘는 질책이 스쳐 지나갔지만, 어느 한마디든 입 밖에 내기엔 적절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씩씩거리며 손을 내렸다.

“그래, 이번 판은 내가 졌다.”

조계안도 계략으로는 육장봉의 상대가 못 됐다. 두 손 들고 말았다.

“마음대로 하시지.”

육장봉은 조계안과 실랑이하지 않았다. 월령안에게 한마디 당부했다.

“잊지 말고, 수횡천에게 나를 만나러 오라고 전해 주시오.”

그 말만 남기고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몸을 돌려 나갔다.

조계안은 월령안의 손에 든 호각을 바라보았다. 콧방귀를 뀌더니 옷소매를 떨치고 따라 나갔다.

‘이번은 육장봉에게 져도 괜찮다. 다음 판에는 꼭 이길 테니까!’

월령안은 그 자리에 서서 손에 든 호각을 보며 웃었다.

웃다 보니 어느 순간 눈에는 물기가 반짝였다.

만약 다른 상황에서 육장봉이 이 호각을 주었다면 아마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육씨 가문에서 내쫓긴 치욕을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마냥 우습기만 했다.

늘 명석하고 이지적인 자신이 이렇게까지 싫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만약 이렇게 명석하지 않았다면, 육장봉이 그녀를 걱정해서 이 호각을 주었다고 자신을 속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육장봉은 조계안과 기 싸움을 하느라 호각을 주었을 뿐이다.

그녀는 두 사람이 기 싸움을 하는 데 쓰인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나도 참……. 딱하고 가소롭기도 하지.’

육장봉의 호각은 좋은 물건이었다. 언짢기는 했지만, 물건에 화풀이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묵묵히 호각을 틀어쥐었다. 손바닥이 배겨서 통증이 느껴져도 놓지 않았다.

한참 지나서야 겨우 손을 폈다. 호각에 배겨서 생긴 손바닥의 멍이 보였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자조적으로 피식 웃었다. 그리고 호각을 품속에 챙겨 넣었다.

무슨 이유이든 간에, 육장봉이 육가군을 부를 수 있는 호각을 그녀에게 준 이상, 이 물건은 이제 그녀의 것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목숨을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위 자부심이니, 자존감이니 하는 것 때문에 살겠다는 희망을 어리석게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월령안은 크게 심호흡을 해서 마음속의 울적함을 털어 버렸다. 그리고 이내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문턱을 넘어서자 집사가 마주 다가오더니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괜찮으신가요?”

그는 문밖에 서서 그 두 사람이 기 싸움을 하다가 하마터면 싸울 뻔했던 모습을 직접 지켜보았다.

주인 아가씨가 배짱이 좋은 분이라 제때 말렸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 둘은 정말로 싸웠을 것이다.

“괜찮네.”

월령안은 고개를 젓더니, 걸음을 멈추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문득 무엇이 생각났는지 걸음을 멈추고 집사를 바라보았다.

“조야옥사자를 아직 장군부에 보내지 않았느냐?”

“소인이…….”

집사는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곧 사죄했다.

“소인이 그만 깜빡했습니다. 아가씨, 용서해 주십시오.”

“지금 당장 보내게. 빠르면 빠를수록 좋네.”

월령안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육장봉의 성격에 이 일을 들먹이지 않은 것을 보고 집사가 아직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네, 아가씨.”

집사는 서둘러 대답하고, 마음속으로 기억해 두었다. 돌아가자마자 일 초도 지체하지 않고 당장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장군부에서 보낸 부상 당한 호위 세 명에게도 위로금을 주게. 또 육씨 저택으로 돌아가서 요양할지, 아니면 여기서 요양할지 물어보게.”

지금 그녀는 사람이든 일이든, 육장봉과 연관된 것이라면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났다. 그나마 품속의 호각은 대단히 중요한 물건이라서, 이성을 발휘해 던져 버리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마저도 던져버렸을 것이다.

“네, 아가씨.”

집사는 엄숙하게 대답했다. 이번에는 일 처리를 지체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돌아서자마자 장군부와 관련된 두 가지 일을 처리했다.

육장봉이 보내온 호위 세 명은 월씨 가문의 호원보다는 상처가 가벼운 편이었다. 며칠간 쉬고 나자, 팔 하나를 잃고 불구가 된 호위는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게 되었다. 다른 두 호위도 중상을 입기는 했지만, 침대에서 내려 몇 걸음은 걸어 다닐 수 있어 곁에서 시중들 필요가 없었다.

세 사람은 돌아가서 요양할 수 있다는 소리에 곧 대답했다.

“저희는 돌아가겠습니다.”

세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서둘러 돌아가려 하자, 집사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세 분께서 서둘러 돌아가시겠다 하시는데, 혹시 저희 월씨 가문에서 접대가 소홀했는지요?”

“아니, 아닙니다! 너무 잘 대해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세 사람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중 팔을 잃은 호위가 자신의 뱃가죽을 꼬집으며 말했다.

“고작 며칠 새에 살이 붙었지 뭡니까. 저희 장군께서 보시면 벌을 내릴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정말 편하게 지냈다. 월씨 가문의 식사는 아주 정갈했다. 하인은 너무 정성껏 시중을 들었다. 하지만 오래 있다가는 여기에 길들어 떠나기 싫을까 두려웠다.

초심을 지키고 충성심을 견지하려면, 월씨 가문의 부유함에 물들지 않도록 단호하게 유혹을 끊어야 했다.

그들은 가야만 했다.

물론, 서둘러 돌아가는 이유가 남들에게 자랑하기 위함과 동시에 군대 안의 다른 가난한 형제에게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서라고는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다.

보상금으로 받은 은자가 모두의 것을 합치면 칠팔백 냥, 좋은 밭과 집까지…….

그들이 평생 군인 노릇을 한들, 월 낭자 집에서 며칠간 호원 노릇을 해 주는 것만 못했다.

이렇게 좋은 자리는 당연히 형제들에게 얼른 알려서, 월 낭자를 호위할 기회를 붙잡으라고 해야 했다.

그들도 확실하게 알아보았다. 야율제는 아직 잡히지 않았다. 다시 월 낭자에게 손을 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야율제가 사람을 보내 월 낭자를 습격해 죽이려 할 때, 누군가 월 낭자를 보호하려다 다칠지도 모른다. 운이 좋으면 그 사람의 남은 반평생은 해결될 것이다.

그들이 부유해졌다고 형제를 잊을 수는 없었다. 군대에 다른 건 없어도 가난한 형제는 수두룩했다.

“그렇다면 소인도 세 분을 잡을 수가 없군요.”

집사는 세 사람의 찡그린 얼굴을 보고 하마터면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월령안의 분부가 있었기에 집사는 세 사람을 잡지 않았다. 하인더러 그들의 짐을 싸게 하고, 월씨 가문의 규칙에 따라 세 사람 몫의 두둑한 예물을 마련했다. 그리고 조야옥사자까지 함께 장군부로 보냈다.

월령안이 육씨 가문 부인으로 있을 때, 집사는 장군부의 하인들과 자주 만났다. 집사는 익숙하게 장군부의 집사를 찾아가서 방문한 이유를 말했다.

“조야옥사자는 부인이…… 아이고, 이 입버릇 좀 보게. 아직 고치지 못했구먼 그려.”

장군부의 집사는 자기 뺨을 슬쩍 치고서 웃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이 조야옥사자는 진짜로 월 낭자가 우리 장군께 보낸 건가?”

‘부인께서 우리 장군을 용서해 주신 건가? 장군과 화해하셨나? 내 이럴 줄 알았지. 원래 부부싸움이란 게 일상다반사인걸. 예전에 우리 장군이 부인과 이혼했던 건 그냥 부인이 낯설어서 그랬던 거야.’

아니나 다를까, 장군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부인을 달래서 돌아서게 한 모양이었다. 부인이 장군에게 선물을 보내는 걸 보니, 곧 화해하고 다시 육씨 저택에 시집올 날이 머지않았다.

“저희 아가씨께서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월씨 가문 집사는 담담하게 말했다. 예전에 장군부 집사를 만날 때의 친절함과 공손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장군부의 집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여전히 따뜻하게 웃었다. 한집안 식구라는 생각에 부드러운 말투로 흐뭇하게 말했다.

“아가씨께서 너무 예의를 지키시네. 우리 장군께서는 달리 좋아하시는 건 없지만, 좋은 말과 무기를 좋아하시지. 장군께서 이 조야옥사자를 꼭 맘에 들어 하실 걸세.”

일전에 장군은 부인을 내칠 때 그녀의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부인이 먼저 장군에게 말을 보냈다. 부인 가문의 집사가 불쾌해하고 그에게 눈치를 주는 것도 정상이었다.

부인의 가문에서 조금 거만하게 나오더라도, 장군부의 집사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월씨 가문 집사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그래도 가까스로 품위를 지켜냈다.

“대장군께서 좋아하신다니 다행입니다.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는 돌아서자마자 저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장군부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들 정상이 아니야. 아가씨께 꼭 말씀드려야 해. 앞으로 왕래를 줄여야지, 원.”

집사는 저택에 돌아오자, 월령안에게 이 일을 보고했다.

“아가씨, 장군부에서는 말을 아주 당연하다는 식으로 받았습니다. 마지못해 받는 척하지도 않고, 심지어 어찌 된 영문인가 하고 한마디도 더 묻지 않았습니다.”

집사는 마음속으로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어찌 되었든 월씨 가문과 장군부는 이제 아무 상관도 없다. 월씨 가문에서 귀한 말을 두 필이나 보냈으면, 장군부에서는 인정으로 보나, 예의로 보나 잘 물어보고 받아야 했다.

그런데 장군부의 사람들은 어땠는가. 말 한마디 묻지 않고 그냥 받았다.

‘아주 그냥 한집안 식구인 줄 아는군.’

월령안은 집사의 불만을 알아채고서 웃으며 말했다.

“육 대장군은 지위가 높고 권세가 있잖나. 매일 장군부에 예물을 보내는 사람이 수두룩하네. 장군부에서 우리의 예물을 받아 준 것만으로도 우리의 체면을 봐준 셈일세.”

월령안은 반나절 혼자 앉아 있으면서 마음을 정리했다.

마음을 정리하지 않으면 또 어쩔까.

현실은 그녀의 의지에 따라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남을 바꿀 수도, 주위 환경을 바꿀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이 바뀌어 적응해 나가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말하자니 조금 소극적이기는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전부 그녀가 마주해야 할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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