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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190)화 (190/1,004)

190화 누구도 널 건드리지 못한다

그녀의 안위를 위해 조계안이 그렇게 많은 힘을 쏟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야율제가 지금까지 변경에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만약 조정에서 진심으로 야율제를 잡아낼 생각이었다면, 그는 전혀 숨지 못했을 것이다. 최소한 지금까지 수도에 숨어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야율제는 여전히 성안에 있고 조정에서는 아직도 사람을 찾아내지 못했다. 즉, 조정에서 큰 힘을 들여 찾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조정에서 고의로 아주 큰 판을 벌여 야율제가 소란을 피우도록 방임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그녀와는 상관이 없었다.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조계안이든 육장봉이든 모두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소위 ‘어쩔 수 없는 사정’과 ‘대의명분’이 수두룩했다.

야율제의 일에서는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과 그녀가 원하는 결과는 줄곧 일치하지 않았다.

조계안은 몸의 상처가 은은히 아파져 오는 것을 느꼈다. 좀 더 앉아 있고 싶었으나 황제와의 약속이 생각났다. 다시 윗자리에 앉아 있는 존재감이 확실한 육장봉을 흘끔 보았다. 그는 마음속의 모든 생각을 억누르고 고개를 돌려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육 대장군, 아직도 용건이 남은 건가?”

“조 대인, 바쁘시면 먼저 가시게.”

육장봉은 조계안의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고 쌀쌀맞게 말했다.

“나는 육 대장군과 함께 더 앉아 있을 수 있네. 육 대장군은 무슨 일이 또 있나?”

‘내 눈앞에서 네가 월령안과 단둘이 있게 내버려 둘 것 같냐?’

육장봉은 도발하는 조계안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냉담한 표정으로 월령안에게 물었다.

“수 맹주는 집에 있소?”

월령안이 대답했다.

“밖에 나갔어요.”

수횡천은 야율제를 찾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야율제를 찾는 일에 대해서라면 조정보다 수횡천이 더 열심이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수횡천은 변경에 세력이 없었다. 야율제를 찾으려는 마음만 굴뚝 같았지, 힘이 없었다.

“돌아오면 나를 만나러 오라고 전하시오.”

육장봉은 말을 마치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려는 것이 분명했다.

월령안도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육장봉에게 읍하였다.

“대장군, 걱정하지 마세요. 오라버니가 돌아오시거든 전하겠습니다.”

“알겠소.”

육장봉은 천천히 다가오더니 나가는 길에 조계안이 탁자 위에 놓은 서신을 챙겼다.

“이 일은 어떻게 할 셈이오?”

이번에 야율제는 본격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주나라 안에서는 월령안을 죽일 수 없으니, 그녀를 북요로 맞아들일 셈이었다.

야율제가 그래도 꽤 영리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월령안은 가볍게 웃었다.

“야율제가 저를 맞아들이겠다 하면요? 그럼 제가 꼭 시집가야 하나요? 나한테 장가들고 싶다고요? 되고말고요! 제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예물을 가져오라고 하세요.”

“예를 들면?”

조계안이 고개를 돌려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한쪽에 늘어뜨린 손가락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무척 궁금했다.

‘월령안은 무슨 예물을 요구할까?’

“저는 상인이에요. 돈을 가장 좋아하죠.”

월령안은 고개를 숙이고 조계안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예를 들자면 황금 이십만 냥의 가치가 있는 수급이라든가, 그런 게 좋겠네요.”

“야율제의 머리를?”

조계안은 눈을 반짝 빛내더니 곧이어 파안대소했다.

“너무 까다로운 거 아니냐. 야율제가 울화통이 터져 죽게 할 셈이구나.”

월령안이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놈이 화가 나면 날수록 좋죠.”

화가 나야 노발대발하다가 소란을 피울 것이다. 야율제가 소란을 피워야 그를 찾아낼 수 있다.

“북요 사신단은 보름 뒤면 변경에 도착하오. 야율제가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거요. 알고 있소?”

육장봉은 소란 피우지 말라고 경고하듯이 조계안을 힐끗 노려보았다.

조계안은 콧방귀만 뀌기는 했지만, 그래도 육장봉의 말을 마구 중단시키지는 않았다. 그도 어린애가 아닌 이상, 일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다.

“보름이면 충분해요.”

그 정도면 추수와 상천이 북요에서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충분했다.

그녀는 상천의 능력을 믿고 있었다.

“신중히 시작하고 정중하게 끝내면 어려움이 없을 것이오. 그곳이 북요라는 걸 잊지 마시오.”

육장봉은 월령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주의를 환기했다.

사실 월령안이 북요에서 아무리 크게 일을 벌여도, 육장봉으로서는 얼마든지 책임질 수 있었다. 다만 그녀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먼저 볼 셈이었다.

“대장군의 말씀, 감사합니다.”

월령안은 깊숙이 절을 했다. 성의는 가득해 보였지만, 어쩐지 거리감이 느껴졌다.

육장봉은 고개를 끄덕이고 조계안을 힐끗 보았다.

“조 대인, 안 가나?”

“내가! 가지!”

조계안은 육장봉을 사납게 쏘아보고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육장봉은 황형이 그를 감시하려고 딸려 보낸 것이었다. 만약 육장봉이 황형 앞에서 엉큼한 속셈을 품은 말을 했다가는, 황형은 또 모든 일을 월령안의 탓으로 돌릴지도 몰랐다.

그는 황형이 두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월령안은 아니었다.

“월령안, 걱정하지 마라. 내가 있는 한 누구도 널 건드리지 못한다.”

조계안이 긴 다리로 월령안의 곁에 성큼 다가갔다. 몸을 그녀 쪽으로 기울이더니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야율제의 머리는 내가 꼭 너 대신 가져오마.”

‘피 냄새?’

사람과 붙어 있는 것을 싫어하는 월령안은 잠깐 굳어졌다. 고개를 돌려 조계안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순간 의혹이 스쳐 지나갔다.

‘조계안이 다쳤나?’

이렇게 짙게 피 냄새를 풍길 정도면, 상처가 가볍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럼 오늘 이 두 사람이 함께 온 건 무슨 뜻일까? 이들은 무엇을 하려는 거지?’

월령안과 조계안의 눈이 마주쳤다. 서로의 눈망울에는 상대방의 작은 그림자만 비쳤다.

월령안이 흘깃 본 것뿐인데도, 조계안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몸이 월령안 쪽으로 더욱 기울었다. 입술이 그녀의 얼굴에 거의 닿을 정도였다.

“몸조리 잘하고 있거라. 다른 건 하나도 걱정할 필요 없다. 내가 좋은 소식을 가져오기만 기다리면 된다.”

“빨리 가지.”

육장봉의 눈빛에는 우울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성큼 앞으로 다가가더니 조계안의 뒤쪽 옷깃을 와락 잡아채어 월령안의 곁에서 그를 떼어냈다.

“육장봉, 미쳤나!”

방심하고 있던 조계안은 육장봉에게 끌려가자 휘청거렸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볼썽사납게 땅바닥에 쓰러질 뻔했다. 그는 후딱 돌아서더니 육장봉을 와락 밀쳤다.

‘이 자식이 월령안 앞에서 날 망신 주려는 건가? 소인배 같은 자식!’

육장봉은 제때 손을 놓고는 조계안을 냉랭하게 바라보았다.

“미친 건 그쪽이지.”

‘감히 월령안을 건드려?’

조계안은 두 발 물러나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도리어 고집스럽게 육장봉을 비꼬았다.

“내가 미치긴 뭘? 육 대장군, 내가 자네의 지금 신분을 일깨워 줘야 하나?”

‘네놈이 온 세상을 간섭한다고 해도, 나와 월령안에겐 간섭할 수 없어.’

“신분? 오히려 신분을 일깨워 줄 건 내 쪽인 거 같군. 조…….”

“육장봉, 그만해!”

조계안이 육장봉의 말을 사납게 중단시켰다.

“내 일에는 간섭하지 않아도 되네.”

언젠가는 월령안에게 자기가 조왕이고 황제의 아우라는 사실을 직접 말해 줄 생각이었다.

“자신의 신분을 기억하고 있다니 다행이군.”

육장봉이 콧방귀를 뀌었다.

조계안은 기가 살짝 꺾였다. 하지만 겉으로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자기 신분을 잊은 건 그쪽 아닌가. 육장봉, 명심해라. 월령안은 내 사람이야. 당연히 월령안의 안전도 내가 책임질 거다. 네가 개입할 필요가 없어.”

“오호?”

육장봉은 비웃듯이 피식 웃으며 거만하고 냉담하게 물었다.

“조 대인, 책임질 수 있겠나?”

조계안은 월령안이 겪은 두 번의 위기 상황에서 자신이 전부 자리에 없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잠깐 침묵을 지키다가 대답했다.

“내 사람이고, 내 일이다. 설사 죽었다 해도 내 일이거든. 너하고 무슨 상관이냐?”

“흠.”

육장봉은 하찮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비웃음이 다분한 말투로 말했다.

“조 대인,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지 말게.”

조계안은 갑자기 화를 냈다.

“육장봉, 지금 싸우자는 건가?”

어제 육장봉에게 얻어맞은 사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다 낫지 않았다고, 못 싸울 것 같나?’

“조 대인께서 싸우고 싶다면 싸워야지.”

육장봉은 왼손을 등 뒤로 가져갔다.

“나는 한 손만 쓰지.”

“육장봉,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조계안은 두말없이 주먹을 쥐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바로 그때, 월령안이 갑자기 앞으로 나서며 조계안의 앞을 막았다.

“두 분 대인께서 싸우실 거라면, 자리를 옮기는 건 어떻겠습니까?”

반나절 내내 암암리에 기 싸움을 하던 두 사람이 떠나기 직전에 싸우려고 할 줄이야. 월령안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월령안, 비켜라!”

조계안은 그렇게 거세게 달려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월령안이 막고 나선 순간, 공격을 거두어들여 가까스로 멈추었다.

“대인, 여기는 월씨 저택입니다.”

월령안의 얼굴빛은 살짝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침착하게 입을 열어 설득했다.

“대인, 싸우시려거든 장소를 옮겨 주십시오.”

솔직히 그녀도 막아 나설 때는 무서워서 간이 콩알만 해졌다. 화가 난 조계안이 공격을 멈추지 못하고 얼굴을 때릴지도 몰랐다. 일 초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조계안에게 얼굴을 얻어맞아 상처라도 생기면, 춘일연에 참가하지 못할 테고, 그러면 도박판은 어쩌지?’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참 겁 없는 짓이었다.

월령안은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고개를 저었다.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 정신을 되찾아왔다.

“흥…….”

조계안은 하찮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눈에는 온통 사나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때 월령안이 갑자기 얼굴을 피며 미소를 지었다.

조계안은 온몸의 노기가 순식간에 사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무심하게 서 있는 육장봉을 보더니, 주먹을 내렸다.

“네 체면을 봐서 그만하마.”

월령안의 앞에서 육장봉에게 질 수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대인.”

월령안은 조계안에게 예를 올렸다. 이 순간, 진심으로 그에게 감사했다.

조계안은 자신의 다른 신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조계안의 공식적인 신분은 추밀원 부사이고, 비공식적인 신분은 암황이다. 이 두 자리 모두 제왕의 심복이 아니고서는 차지할 수 없는 자리였다.

또 성씨도 조씨이다. 황제에게 친형제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은 없다. 하지만 조계안은 황실 출신일 뿐만 아니라, 황제의 신임과 중용을 받는 인물이었다. 신분이 범상치 않을 게 확실했다.

조계안과 육장봉 두 사람 모두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두 사람이 그녀의 집에서 싸운다니. 혹시 누가 다치기라도 하면, 황제가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황제가 아무리 현명하고, 관대하더라도 결국 그녀에게 화풀이할 게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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