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예물로 뭘 주겠다던가요
화청 안. 분위기는 유난히 이상했다.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의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크지도 않은 화청에서 육장봉과 조계안은 각자 하나씩 자리를 차지하고서,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상대방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양, 서로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암암리에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일부러 온몸의 위압감을 드러내며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다.
‘둘 다 왜 이래?’
월령안은 화청에 들어서는 순간, 무형의 압박감이 확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소름이 쫙 돋았다. 당장 되돌아 나가고 싶었다.
그녀가 멈칫하며 들어가기를 주저하고 있을 때였다. 문 어귀 쪽에 앉아 있던 조계안이 이 모습을 보고 눈을 치켜떴다. 미처 거두지 못한 위압감을 그대로 드러내며 그녀를 훑어보았다.
“왜? 내가 사람이라도 잡아먹는다더냐?”
순간, 살의가 확 정면으로 와 닿았다.
월령안은 늘 자신의 간이 큰 편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순간 깜짝 놀라 심장이 멈출 뻔했다.
‘이 미친놈들 같으니! 평범한 사람들이 저 기운을 어떻게 버텨내라고?’
“대인도 참.”
월령안은 몰래 숨을 골랐다. 그리고 자세를 바로 하더니 습관적인 사교용 미소를 떠올렸다.
“오랜만입니다. 대인,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내게 신경이 쓰이느냐?”
조계안이 말꼬리를 살짝 올렸다. 목소리는 쉬고 가라앉아 있었지만, 사람의 마음을 자극하는 애틋함이 섞여 있었다.
월령안은 어딘가 잘못된 느낌이 들어, 조계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의 얼굴은 은빛 가면에 꼭꼭 가려져 있어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다만 어둡고 차가운 눈빛 속에서 위험한 불꽃이 튀는 것만 보였다.
“당연히 대인께 신경이 쓰이죠. 대인의 몸이 좀…… 여윈 듯합니다만.”
상인이라면 남의 눈치를 잘 살피고, 생존 욕구가 강한 법. 월령안의 미소가 저도 모르게 더욱 짙어졌다. 진심도 적당히 섞여 있었다.
상황 판단을 잘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라고 했다. 집사도 두려워서 감히 오지 못했는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녀가 두려워한들 체면이 깎이지는 않는다.
조계안은 도발하듯이 육장봉을 흘끔 바라보고는 득의양양하여 말했다.
“보아하니 내게 관심이 많은 모양이구나. 내가 몸이 조금 여위었는데도 알아보다니. 나를 항상 마음속에 새기고 한시도 잊지 않는 모양이구나.”
월령안으로서는 조계안이 또 무슨 바람이 들어 저런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얼굴에 미소를 유지하고서 말했다.
“대인께서 건강하셔야 저희처럼 대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도 편하지요.”
솔직히 말해서, 그냥 인사치레로 한 말이었다. 조계안은 얼굴에 가면을 쓴 데다, 옷도 품이 넉넉하게 입고 있었다. 눈썰미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야위었는지를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이 인사치레이지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음을 조계안도 알고 있을 게 뻔했다.
“신경 써 줘서 고맙군.”
조계안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자기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도 좀 여윈 것 같구나. 어서 앉아라. 네가 힘들면 내가 마음이 아프단다.”
“감사합니다, 대인.”
월령안은 입꼬리를 살짝 실룩거리며 조계안에게 예를 올렸다. 그다음 육장봉에게도 예를 올렸다.
“대장군.”
“음.”
육장봉은 냉담한 표정으로 짧게 응대했다. 그래도 조계안과 기 싸움을 하겠답시고 그녀를 못 앉게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계안처럼 친근한 척 말을 걸지도 않았다.
하지만 월령안이 자리에 앉자마자 육장봉은 서신 하나를 꺼내더니,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보시오.”
“이게 무엇입니까?”
월령안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육 대장군이 나를 쉽게 놔줄 리가 없지.’
“북요의 오황자가 보내온 서신이오.”
육장봉이 서신을 자신의 손 곁에 놓아두었다.
조계안이 고개를 돌려 육장봉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언제 일이냐? 난 왜 모르지?”
그는 육장봉이 고의로 그랬다고 확신했다.
‘음험한 놈!’
“나랏일이다. 조…… 대인이 모르는 게 정상 아닌가.”
육장봉은 확실히 조계안과 달랐다. 일부러 월령안과 친한 척은 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분노를 조계안에게 직접 쏟아냈다.
어제 그는 황제에게 불려간 뒤 조계안을 기절시켜, 그의 출궁을 성공적으로 막았다.
오늘 조회가 끝나자마자 황제는 그더러 남으라고 했다. 그리고 조계안과 함께 월씨 저택에 가서 월령안을 만나보라고 했다.
이를 들은 육장봉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황제는 원칙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계안의 일에 한해서는 원칙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제도 육장봉이 단호하게 조계안을 기절시키지 않았다면, 결국 황제 쪽에서 타협했을 것이다.
“너…… 흥!”
조계안은 육장봉을 삿대질하다가 갑자기 손가락을 거두었다. 콧방귀를 뀌고는 몸을 일으켜 육장봉에게로 걸어갔다.
“북요의 오황자가 뭐라고 썼는지 좀 봐야겠다.”
조계안은 탁자 위에 서신을 빼앗아서 훑어보더니 냉소하고 말았다.
“야율제가 월령안에게 청혼한다고? 그 자식은 거울도 안 보고 사나? 자기가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야율제가 제게 청혼했다고요?”
월씨 저택의 화청은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다. 월령안은 아래쪽에 앉아 있었지만, 육장봉과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대화를 주고받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렇소.”
육장봉이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예물로 뭘 주겠다던가요?”
월령안은 당황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냉정하게 물었다.
“당신은 예물에만 관심 있는 거요?”
육장봉이 싸늘하게 물었다.
월령안이 대답했다.
“물론이죠. 저를 맞아들이려면 성의를 보여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게 아니면 관심 갈 게 뭐가 있어? 어차피 황제가 나를 야율제에게 시집보낼 것도 아닌데. 관심 가질 게 뭐가 있다고?’
“서신에는 쓰지 않았군.”
조계안은 몸을 돌려 월령안과 육장봉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서신을 들고 월령안의 앞으로 걸어갔다.
“한번 보겠느냐?”
“조 대인, 감사합니다.”
월령안은 서신을 건네받아 한 번 훑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제는 그래도 성 열여섯 개로 맞바꾸자고 하더니. 오늘은 예물이 무엇인지도 쓰지 않고, 감히 나를 맞아들이겠다고 하네요. 그 잘난 남원대왕이라는 신분만으로 나를 맞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성 열여섯 개는 내놓을 수 없지만, 남원대왕비라는 신분을 줄 수는 있으니까.”
어제 보낸 국서는 없던 일로 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이 편지를 보건대 야율제는 상당히 진지했다.
“본인이 일단 남원대왕이라야 남원대왕비라는 신분도 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만약 남원대왕이 아니라면요?”
월령안은 손에 든 서신을 만지작거리며 선한 웃음을 지었다.
“거긴 북요요. 함부로 손쓸 생각 하지 마시오.”
육장봉이 경고했다.
그와 월령안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조계안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조계안은 지금 부상을 입고 있기에 다른 수단은 쓰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사소한 행동으로 그의 속을 뒤집으려 했다.
육장봉은 조계안이 다친 걸 봐서, 지금은 넘어가기로 했다.
월령안이 말했다.
“북요니까 제가 손을 쓸 수 있는 거죠.”
만약 그녀가 주나라에서 함부로 손을 썼다고 해 보자. 왕위 계승이 아니라, 관리의 승진에 끼어들기만 해도, 황제는 그녀를 쉽게 죽일 수 있었다.
돈이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지만, 만능은 아니다.
월령안은 한담이라도 하듯 말했다.
“북요는 우리와 달라요. 거기는 민심이 사납고 혼란스럽죠. 최근 들어서는 북요 귀족들도 우리를 따라 아비가 죽으면 아들이 물려받고 있기는 해요. 하지만 여전히 강한 자를 숭상하고, 강탈하는 전통이 남아 있잖아요.
야율제가 북요의 명의로 성 열여섯 개와 저를 맞바꾸려 한 데다가, 변경에서 이렇게 큰 사고를 쳤어요. 일단 계기만 생긴다면 그를 고꾸라뜨리려는 사람들이 나타날 얼마든지 거예요.”
야율제를 넘어뜨리면 남원대왕의 자리가 비게 된다. 그녀는 북요 귀족들이 이런 기회를 반드시 놓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육장봉이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어제 국서는 약물을 이용해 특수하게 제작된 것이오. 지금은 글자가 없어졌소.”
더는 증거로 쓸 수가 없었다.
월령안은 얼굴의 미소를 거두었다.
“국서를 가지고도 장난을 쳐요? 야율제, 그자가 미친 거 아닌가요?”
‘나라 간의 왕래에 이런 수단을 쓰다니. 야율제는 도대체 낯가죽이 얼마나 두꺼운 거야?’
야율제가 이렇게 하면 북요라는 나라의 신용이 어떻게 되겠는가.
앞으로 누가 야율제를, 나아가 북요를 신임하겠는가.
말에는 신용이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결과가 있어야 한다.
주나라 사람들은 신용을 무엇보다 중히 여겼다. 국서는 물론, 평범한 편지를 쓸 때도 글자 하나하나를 신중히 썼다. 쓴 다음에 고치는 법도 없었다.
하지만 북요에서는 이러한 ‘허례허식’을 따지지 않았다. ‘실질적인 이익’을 더욱 중시했다.
야율제가 보내온 국서는 물론, 두 나라의 제왕이 서명한 조약도 마찬가지였다. 북요인들은 손바닥 뒤집듯 승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파기도 서슴지 않았다. 신용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육장봉은 월령안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북요와 접촉할 일이 많지 않아서 모르는 거요. 북요는 원래부터 신용을 지키는 법이 없소. 이런 식으로 이랬다저랬다 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오.”
월령안은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래서 조정에서도 야율제를 어찌할 수 없는 건가요?”
“물론 아니야.”
조계안은 월령안의 윗자리에 앉더니 다리를 꼬았다.
“특별한 사람한테는 특별한 수단을 써야지.”
“대인, 무슨 말씀이신지요?”
월령안이 조계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북요인들이 낯이 두껍잖느냐? 하지만 낯이 두꺼운 거로는 나보다 더 두꺼운 사람은 없을 거다. 나도 내 낯 두께에 놀랄 정도니까.”
다리를 꼬고 앉은 조계안의 모습은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월령안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대인은 과연 보통 분이 아니십니다.”
자기 비하를 하는 사람을 처음 본 건 아니지만, 조계안처럼 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조계안, 조 대인도 조금 귀여운 구석이 있는 것 같단 말이야.’
“난 항상 진심이었거든. 누구처럼…… 가식적으로 굴지는 않아.”
조계안은 ‘누구처럼’이라고 말하면서, 일부러 육장봉을 흘끔 보았다.
월령안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 두 사람의 기 싸움에는 끼어들지 않았다.
조계안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손가락을 딱, 튕기더니 한량 티를 물씬 내며 말했다.
“네 사람들에게 북요에서 계속 활동하라고 해라. 야율제를 남원대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면 가장 좋지.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귀찮게만 해 줘도 괜찮다.
주나라 안에서는 내가…… 야율제를 도망칠 수 없게 할 거라고 약속하마. 어디에 숨든, 반드시 그놈의 행적이 하루 내에 황금당에 전해지도록 할 것이다. 그놈이 모습을 드러내기만 하면, 내가 한시도 편치 못하게 만들 것이니.”
조계안의 말투는 싸늘하면서도 살기등등했다.
하지만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겉으로 드러내던 살기를 말끔하게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몸을 월령안 쪽으로 기울이더니 기고만장하게 웃었다.
“너는 돈이 있고 나는 사람이 있다. 우리 둘이 협력하면 그까짓 야율제가 다 무엇이냐?”
“대인 말씀이 맞습니다.”
월령안은 조계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 중에서 진심이 얼마이고, 가식이 얼마인지는 몰랐다. 그래도 여전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육장봉이든 조계안이든 모두 믿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