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월령안의 몸값
그날 이후, 장군왕 세자는 온 변경을 누비며 악가 놈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악가 놈은 신선이나 되는 듯, 단 한 번만 나타나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온 변경을 들쑤시며 알아보았지만, 육장봉의 곁에 있는 악씨 성을 가진 도박 기술이 뛰어난 사람을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아주 우연히 한 늙은 상궁에게서 명월산장이 월령안의 수중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그놈이 ‘악’씨가 아니라 ‘월’씨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자, 저희 집에 일이 있었던 걸 아직 모르시나 보네요.”
월령안은 오른쪽 손과 팔을 들어 보였다.
“저는 지금 손을 움직일 수가 없어 세자와는 도박할 수가 없습니다. 애당초 저는 육 대장군을 대신해 도박한 거예요. 명월산장도 육 대장군의 수중에 있으니, 도로 따 가고 싶으시면 육 대장군을 찾아가세요.”
“이런 사소한 일 때문에 나더러 육장봉을 찾아가라고? 미쳤나?”
장군왕 세자는 화가 나서 월령안에게 눈을 희번덕거렸다.
“육장봉을 왜 건드려? 누구나 너처럼 목숨이 하찮은 줄 아는가. 목숨을 걸고 육장봉의 관대함을 시험하게? 네가 거리에서 육장봉의 말을 막고 나섰어도 말에 밟혀 죽지 않은 건, 운이 좋았기 때문이야! 내 목숨은 귀하단 말일세. 난 내 목숨을 걸고 내기하지 않겠네.”
‘참 말본새 하고는……. 아니, 그래서 내 목숨은 하찮으니까 막 걸어도 된다는 거야?’
월령안은 화가 나서 장군왕 세자를 내쫓고 싶었다. 때마침 하인이 과일 쟁반과 간식을 내왔다. 월령안의 노기가 잠시나마 사그라들었다.
“세자, 과일과 간식 좀 드시지요.”
하인은 과일과 간식을 내려놓고 공손하게 말했다.
“너희 저택에 무슨…….”
장군왕 세자는 하찮다는 듯이 힐끔 쳐다보았다. 순간 펄쩍 뛰며 노발대발했다.
“월령안, 너무하는 거 아닌가!”
장군왕 세자의 앞에 있는 작은 탁자 위에는 서리가 내려앉아 있는 빨간 감이 한 접시 놓여 있었다.
감은 작은 산 모양으로 쌓여 있었다. 붉은색과 흰색이 선명한 대비를 이루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지금은 감이 나는 철이 아니었다. 신선하고 촉촉하게 보존한 감은 이렇게 작은 한 접시 분량도 금값이었다.
하인이 보기에 장군왕 세자는 평범한 신분이 아니었다. 게다가 월령안도 특별히 잘 접대해야 한다고 분부까지 했다. 그래서 그를 귀빈으로 여겨 특별히 감을 내왔다.
월령안은 흘끔 보았지만, 장군왕 세자가 왜 저러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감(중국어로는 감을 뜻하는 단어인 시자柿子와 세자世子의 발음이 같다)’의 동음이의어를 떠올렸다.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작년에 얼려 놓았던 시자예요. 거금을 들여서 지금까지 보존했답니다. 세자 같은 귀빈이 오셨길래, 하인이 특별히 내온 것입니다. 어머, 세자께서는 시자 드시는 걸 싫어하세요?”
‘장군왕 세자는 참 재미있는 사람이네. 다 큰 어른이 마냥 어린애 같기는…….’
“너, 지금 이 세자더러 ‘시자’를 먹으라고? 시자를!”
장군왕 세자는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시자’이라는 단어를 일부러 되뇌며, 온몸으로 자신의 분노를 표현하고 있었다.
“뭐 잘못된 거라도 있나요?”
월령안은 장군왕 세자의 말뜻을 못 알아들은 척,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이건 시자잖아!”
장군왕 세자는 월령안이 진짜 모르는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눈앞에서 점차 녹아 가는 감을 가리키며 씩씩거리며 말했다.
“나도 세자란 말이다. 그런데 나더러 시자를 먹으라니,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장군왕 세자는 억울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월령안이 분명히 일부러 자신을 을러대고 협박한다고 여겼다.
“세자, 생각이 너무 지나치세요. 고작 시자 하나 가지고 그러세요. 세자께서 이 이름을 싫어하시면 바꾸면 그만이죠.”
월령안의 곁에 있는 탁자 위에도 똑같은 감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감 하나를 집어 들더니, 위로 던졌다가 받아 쥐었다.
“세자, 시자를 먹는 게 잔인하다고 생각하시면, 홍과(紅果)라고 부르면 어떨까요? 이 시자가 빨갛게 익은 것이 참 예쁘네요.”
말을 마친 월령안은 감 껍질을 벗기고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이 감은 월씨 가문의 늙은 하인이 특수한 비법으로 보존한 것이었다. 일 년이나 보관했는데도 품질은 여전히 제철 그대로였다. 감미롭고, 상큼하며, 향이 짙은 것이 과연 일품이었다.
월령안은 입꼬리에 묻은 과즙을 핥았다. 그리고 손에 든 감을 흔들어 보였다.
“맛이 진짜 좋네요. 세자 드셔 보세요.”
“너, 너, 너……!”
장군왕 세자는 마냥 머리카락이 쭈뼛이 서는 감을 느껴 떨리는 손으로 월령안을 삿대질했다.
‘열 받아 죽겠네! 월령안이 감히 시자를 먹다니! 내 앞에서 시자를 먹었단 말이지!’
시자와 세자는 발음이 똑같았다. 그의 아버지가 그를 세자로 책봉해 달라고 주청한 뒤로는, 그의 앞에서 감을 먹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월령안은 지금 나를 위협하는 건가? 내가 더 지껄였다가는 나를 먹어 버리겠다는 뜻인가?
먹어? 나를 먹는다고?
내가 생각한…… 그런 뜻의 ‘먹다’인가?’
“무슨 여인네가 그리 뻔뻔한가!”
장군왕 세자의 얼굴은 삽시간에 홍시처럼 빨갛게 달아올랐으나, 가까스로 버티며 말했다.
“내 너 같은 여인하고는 실랑이하지 않겠다! 나, 나는 육장봉을 찾아가겠다!”
장군왕 세자는 거친 말을 남기고는 허겁지겁 달아났다.
월령안은 멀어져 가는 장군왕 세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웃음을 금치 못했다. 그러고는 손에 든 감을 한입에 먹어 버렸다.
‘장군왕 세자라면서 꼬락서니하고는. 내가 그냥 단숨에 먹어 치우고도 남겠네!’
문어귀에서 장군왕 세자는 문턱을 넘어서는 육장봉과 부딪칠 뻔했다. 순간 다리의 맥이 다 풀렸다. 육장봉이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변명하기 바빴다.
“육 대장군, 나, 내가……. 월씨 저택에 찾아온 건 월령안을 괴롭히려는 게 아닐세. 명월산장을 되돌려 달라는 것도 아닐세. 월령안에게 나하고 내기하자고도 하지 않았네. 나, 나는, 나는 그냥…….”
“그냥 뭡니까?”
육장봉은 계단에 서서 멍청하게 버벅거리는 장군왕 세자를 내려다보았다.
“나, 나는……!”
장군왕 세자는 당장 울고 싶었다.
‘내가 아까 뭐라고 했지?’
그의 칠칠치 못한 모습을 보아하니, 월령안에게 한 방 먹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육장봉은 귀찮은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만 가시죠.”
“대장군, 고맙네.”
장군왕 세자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았다. 대답과 함께 바람같이 도망쳤다. 한 걸음이라도 늦으면 육 대장군에게 잡혀 혼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장군왕 세자가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뛰어 봤자 벼룩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육장봉은 손을 들어 육이를 불렀다.
“가서 장군왕께 아뢰게. 아들 교육을 못 하신 건 상관없으나, 남에게 아들 교육을 대신 할 기회는 주지 말라고 말씀드려라.”
“네, 대장군.”
육이는 마음속으로 장군왕 세자를 위해 묵묵히 애도했다.
‘참 불쌍하기도 하지. 차라리 다른 사람 성미를 건드리는 게 나았을 텐데. 하필이면 우리 장군이 언짢으실 때 제 발로 찾아왔구나.’
육이는 저택에 따라 들어가지 않고 몸을 돌려 장군왕부로 갔다. 재빨리 말을 몰아서 가다 보니, 장군왕 세자보다 일각이나 먼저 장군왕부에 도착했다.
그 바람에 집에 돌아온 장군왕 세자는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장군왕에게 흠씬 얻어터졌다. 장군왕비가 소식을 전해 듣고 제때 찾아갔으니 망정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반년 동안은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했으리라.
* * *
육장봉은 화청에 들어서자마자, 월령안이 빨갛게 익은 감을 던졌다 받았다 하며 노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그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도 예를 올리지 않았다.
육장봉은 부드럽게 말했다.
“보아하니 몸이 많이 회복된 모양이오.”
그녀의 안색은 좋아 보였다. 표정도 담담했다. 전혀 충격을 받은 사람 같지 않았다.
“습관이 되어서요.”
월령안은 손에 든 감을 아무렇게나 쟁반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육장봉에게 무성의하게 예를 올렸다.
“대장군을 뵙습니다.”
육장봉이 말하기도 전에 월령안은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리고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대장군께서는…… 해명을 하시려고 온 건가요?”
“당신에게 내 해명이 필요하오?”
육장봉은 월령안과 탁자를 사이에 두고 윗자리에 앉았다.
“야율제가 이 사건의 주모자이기는 하지만, 누군가 그놈을 돕지 않았다면 순조롭게 성안에 진입할 수 없었겠죠. 야율제는 북요인이니까, 제가 황금으로 그놈의 머리를 살 수 있어요. 하지만 제가 이 수도에 있는 귀인의 머리를 산다면, 폐하께서 동의하시겠어요?”
월령안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육장봉은 월령안이 화가 나서 하는 말임을 알았다.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화제를 바꾸었다.
“어제저녁 무렵, 북요에서 긴급하게 국서를 보내왔소. 폐하께 사신을 보호해 달라고 청했지.”
‘월령안은 영리하니까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겠지.’
“대장군께서 이 돈이 필요하신가요?”
월령안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진심이 담기지 않은 가짜 웃음이었다.
육장봉은 눈빛이 어두워졌다.
월령안은 또 처음 봤을 만났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웃는 척하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바로 그때, 하인이 뜨거운 차를 내왔다. 그 덕에 육장봉의 불만스러운 감정이 잠시 거두어졌다.
육장봉은 찻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입에 맞는 차를 마시자, 마음속 울화가 살짝 누그러졌다. 그는 월령안을 흘겨보았다.
“그 돈을 내놓을 수나 있는 거요?”
월령안은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당신은 가져올 수 있나요?”
“야율제는 아직 수도에 있소.”
만약 이 소식이 새어 나가면, 야율제의 머리를 황금 이십만 냥과 바꾸려고 수많은 이가 변경으로 몰려들 것이다.
월령안은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입으로는 여전히 얕잡아보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대장군께서는 부하들이 부수입을 챙겼으면 하는 거군요? 전 괜찮습니다.”
“오늘 아침 일찍 북요에서 또 긴급으로 국서를 보내왔소.”
육장봉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월령안은 얼굴의 웃음기를 거두었다. 엄숙하고 진지하게 물었다.
“저와 관련된 일인가요?”
육장봉도 에두르지 않고 대놓고 말했다.
“북요에서 성 열여섯 개와 당신을 맞바꾸겠다고 했소.”
이 세상에는 돈깨나 있다고 위세를 부리는 사람이 월령안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성을 열여섯 개나요?”
월령안은 잠시 멍해 있다가, 곧 웃었다.
“저는 제가…… 저 월령안이 이렇게 비쌀 줄은 몰랐네요.”
육장봉은 월령안을 흘끔 바라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북요의 성 열여섯 개는 월령안의 황금 이십만 냥과 같은 쓰임새였다.
하지만 북요는 월령안처럼 깡패 같은 짓을 하지는 않았다. 성 열여섯 개를 월령안의 목에 내거는 대신, 우선 황제에게 국서를 보냈다.
북요는 다만 월령안을 물러서게 하려는 것일 뿐이었다. 정말로 성 열여섯 개와 월령안을 맞바꾸지는 않을 거라는 게 훤히 보였다.
하지만 월령안이 순순히 말을 듣지 않는다면, 북요는 정말로 성 한두 개를 월령안의 현상금으로 내걸지도 모른다.
월령안이 야율제의 수급에 황금을 건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북요를 얕잡아보고 체면을 짓밟는 짓이기도 했다.
월령안이 눈치가 있다면, 즉시 현상금을 철회해야 했다.
적어도 북요의 국서를 받은 황제의 뜻은 이러했다.
육장봉은 황제의 결정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월령안에게 이 일을 알려 주는 것은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결정권은 월령안에게 있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