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월령안의 몸값
야율제는 일 처리에 거침이 없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물론 청희 장공주의 생사도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그가 청희 장공주를 이용한 것도 처음이 아니었다.
“청희 장공주……. 자, 장공주가 북요인의 아이를 낳았다고?”
황제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맞습니다.”
육장봉은 오히려 담담했다.
“잠한성이 어리석기는 하지만, 대의를 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자가 야율제를 도운 건 바로 그것 때문일 겁니다.”
잠한성은 야율제가 청희 장공주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다. 야율제의 몸에 절반은 주나라의 피가 흐른다고 여겼다. 그러니 그가 주나라에 불리한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늑대 무리에서 자란 개는 사람과 친해질 수가 없는 법이다. 잠한성은 그걸 모르고 있었다.
야율제의 몸에는 주나라 피가 절반 흐르고 있었지만, 그는 뼛속까지 확실한 북요인이었다.
“짐이…… 진작 알아챘어야 했었는데.”
황제는 냉정함을 되찾고, 머리를 저었다.
“짐이 진작 알아챘어야 했다. 청희 장공주가 아무리 아둔하다고 한들, 어떻게 야율제가 자신의 별장에 마음대로 드나들게 했겠는가. 이제 보니 자기 아들이었구나.”
육장봉은 침묵을 지켰다.
그가 보건대 청희 장공주는 전혀 아둔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척이나 영리했다. 그녀가 정말 아둔했다면, 그렇게 많은 영웅호걸이 죽기 살기로 빠져들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선대 남원대왕이 주나라 혈통을 지닌 야율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했다.
이것만 보아도 청희 장공주는 분명 영리한 사람이었다.
“이 사실을 영녕후와 영녕후 세자는 아는지 모르겠구나?”
황제는 남의 집 불구경을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육장봉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녕후와 영녕후 세자가 아는지 모르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어젯밤 일에 영녕후부가 끼어 있다면, 그들이 사실을 알든 모르든 죽어야만 했다.
“일이 재미있게 되었구나. 장봉아, 이 일을 확실하게 조사하거라. 짐의 눈앞에 있는 이 수도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도깨비가 숨어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구나.”
황제의 말투는 온화했다. 심지어 웃음기마저 서려 있었다.
하지만 육장봉은 황제의 평온한 얼굴 뒤에 숨어 일렁거리는 살의를 알고 있었다.
황제는 청희 장공주와 영녕후부에 칼을 들이댈 생각이었다.
북요 남원대왕과 이렇게 가깝게 지냈다. 제왕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이, 북요 남원대왕에게 성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황제가 청희 장공주와 영녕후부에 칼을 대지 않으면, 제왕이라 할 수 없었다.
어젯밤 일이 청희 장공주, 영녕후부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황제는 북요 남원대왕과 이처럼 친밀한 관계가 있는 가족을 신임할 수 없었다.
‘영녕후부는 이제 끝났군.’
육장봉은 황제의 심산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혀 내색하지 않고 대답만 했다.
말을 마친 황제는 다시 온화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곧 화제를 바꾸었다.
“장봉아, 월령안에게 정말로 황금 이십만 냥이 있을 것 같으냐? 황금 이십만 냥이면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그런 돈이 어디서 났을꼬?”
“월령안에게는 황금 이십만 냥이 없는 게 분명합니다. 필요하지도 않을 거고요.”
육장봉이 시선을 내리깔고 가볍게 머리를 저었다.
황제가 무심하게 묻는 게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황제는 월령안을 쓰려고 하지만, 그녀를 믿지는 않았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월령안에게 철광산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월령안이 황금 이십만 냥을 내걸자, 황제는 여전히 실마리가 없는 철광산을 떠올렸다. 그리고 곧 월령안이 내건 돈이 철광산과 관련이 있는지 의심했다.
“월령안에게는 필요치 않다고?”
황제가 되물었다.
“폐하, 그녀는 월령안입니다.”
육장봉은 황제와 눈을 맞추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말투에는 미처 감추지 못한 자랑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월령안에게는 그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월령안에게 돈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월령안이었다.
황금 이십만 냥이 아니라 이백만 냥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그녀에게 그만한 돈이 있다고 믿을 것이다.
* * *
황금 이십만 냥이 가져온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마치 뜨거운 기름이 물에 떨어지면 순식간에 무수한 물방울이 튀어 오르듯, 월령안이 현상금을 내걸자마자 수많은 이들이 주목했다.
물론 모든 것은 어두운 곳에서 암암리에 진행되었다. 겉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보통 백성들의 생활에도 아무 영향이 없었다.
변경은 여전히 원래 모습 그대로였다. 태평성대다운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거리에는 수레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오갔다. 기루는 학자와 문인들로 붐볐다.
변경의 대다수 사람에게 황금당의 현상금이란 자신들과 너무나 동떨어진 이야기였고, 평생 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적지 않은 소식통은 월령안이 황금 이십만 냥을 내걸었다는 정보를 접수했다. 직접 찾아가서 그녀의 의중을 떠보려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황금 이십만 냥을 내놓다니. 월령안에게는 도대체 돈이 얼마나 있는 걸까?
그럴 때마다 월령안은 충격을 받았다는 이유로 손님 방문을 사절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렇게 막아냈지만 장군왕부의 사람까지 거절하기는 쉽지 않았다.
집사는 하는 수 없이 월령안에게 보고했다.
“아가씨, 장군왕 세자께서 밖에 와 계십니다. 아가씨를 꼭 만나겠다고 합니다.”
상업계에서라면 월씨 가문의 집사도 어르신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장군왕 세자 앞에서는 체면을 내세울 수가 없었다.
“장군왕 세자 조홍후가? 무슨 일인지는 얘기하던가?”
월령안은 손에 들고 있던 장부를 덮고 물었다.
요즈음 무척이나 바빠서, 잡일을 처리할 여력이 없었다.
그녀는 약왕 손불사에게 변경으로 와서 어르신의 몸을 보살펴 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손불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패를 꺼낼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두어야 했다.
“세자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소인이 보기에는 좋은 의도로 오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집사가 걱정되어 말했다.
“후!”
월령안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바로 몸을 일으켰다.
“하인에게 잘 접대하라고 일러두게. 곧 나가 볼 테니까.”
‘아무리 좋은 의도로 온 게 아니라도, 야율제만큼은 아니겠지.’
그리고 장군왕부의 정보망으로서는 속사정을 알 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월령안은 장군왕 세자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옷만 갈아입고 화청으로 나가 손님을 맞이했다.
“세…….”
그녀가 화청에 들어서서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장군왕 세자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악가 놈아!”
장군왕 세자는 월령안을 삿대질하며 호통을 쳤다.
“그날 그게 바로 네가 한 짓이지! 맞지?”
“세자 전하,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해가 안 됩니다만.”
월령안은 굽혔던 무릎을 펴고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그녀는 장군왕 세자가 왜 찾아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아직도 시치미를 떼려고. 그날 길상 도박장에서 육장봉과 같이 있었던 게 바로 네가 아니더냐!”
조홍후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두 눈으로 월령안을 노려보았다. 마치 잡아먹기라도 할 듯한 기세였다.
“명월산장이 바로 네 손에 있잖느냐. 내가 다 알아봤다. 발뺌할 생각은 마라.”
“맞아요. 저예요. 저는 발뺌하지 않았고, 발뺌할 필요도 없어요.”
월령안은 장군왕 세자가 조만간 사실을 알아챌 거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쉽게 밝혀질 거짓말은 하는 법이 없었다.
“이게…… 정말…… 너무하는군! 육장봉과 함께 나를 함정에 빠뜨리다니! 게다가 나를 속였잖느냐! 남자로 변장해서 내가 온 황성을 다 돌아다니며 널 찾게 만들다니!”
장군왕 세자는 따질 말을 한가득 준비해 왔다. 월령안이 부인하기만 하면 바로 질책할 셈이었다.
하지만 예상 외로 그녀가 시원하게 인정하자, 그의 계획이 무너져 버렸다. 한가득 준비해 두었던 말들을 쏟아부을 데가 없었다.
그의 품위와 교양으로서는 차마 여인에게 손을 대거나, 욕설을 퍼부을 수는 없었다. 그저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월령안을 바라보는 눈빛은 사납기 그지없었다.
‘도박판에서 일개 여인에게 지다니, 속이 터지는군!’
월령안은 장군왕 세자가 그래도 조금 말이 통하는 것을 보고는 한마디 해명했다.
“저는 세자의 말씀을 인정할 수가 없군요.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세자를 속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남장을 한 건 그저 다니기 편하니 그런 겁니다. 세자께는 제 성이 월씨라고 소개했고요. 이 변경에서 육 대장군과 왕래가 있는 월씨라면, 세자께서도 제가 누구인 줄 충분히 눈치채시리라 생각했죠.”
“그래서 나를 속이지 않았다는 건가?”
장군왕 세자는 탁자를 탁, 치며 또 일어섰다.
“남장하고 주사위를 흔드는 모습이 사내보다 더 사내답더군. 어디를 봐서 여인답단 말인가? 그리고 월씨라고 하니까 생각나는군. 말이나 안 했으면 몰라도, 막상 또 말을 하니 화가 나는구나. 내가 ‘오악(五岳)’의 악인지 분명히 물었잖나? 그때 나한테 뭐라고 대답했지?”
“맞잖아요. 오월의 월, 전 세자를 속이지 않았다고요.”
월령안은 화가 나 씩씩거리는 장군왕 세자를 바라보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럼 세자께서 말씀하신 게 ‘월급’의 ‘월’이 아니었단 말씀이세요?”
“자네가…… 누가 오월, 유월, 이런 단어로 자기 성씨를 소개한단 말인가.”
장군왕 세자는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그러나 월령안의 빈틈을 찾을 수가 없어, 사납게 흘겨볼 뿐이었다.
월령안은 시원하게 잘못을 인정했다.
“죄송합니다, 세자. 상인이라 배움이 짧은 탓에 그런 것들을 잘 몰랐습니다. 다음번에는 꼭 주의하지요.”
“이……. 이 여자가 날 열 받아 죽게 만들 셈이군.”
장군왕 세자는 월령안이 변명하면 어떻게 욕을 할 지 궁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월령안이 또 선뜻 인정해 버렸다.
반나절이나 준비했던 말들을 한마디도 써먹지 못하게 되자, 속만 답답해졌다.
그는 이런 사람과 말싸움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이겨도 찝찝했기 때문이다.
월령안은 가볍게 웃으며 윗자리에 앉아 물었다.
“세자께서 오늘 찾아온 게 이 일 때문인가요?”
“물론 아니지.”
장군왕 세자는 자기가 찾아온 목적을 떠올리고 정신을 바싹 차렸다. 그러고는 손을 내밀고 당당하게 말했다.
“명월산장을 돌려주게.”
“세자, 명월산장은 제가 육 대장군에게서 빌린 겁니다. 저희는 정식으로 계약까지 맺었어요. 명월산장을 되찾으려면 육 대장군을 찾아가세요. 저를 찾아오셔도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명월산장의 주인이 아니라서, 세자께 돌려드릴 권리가 없네요.”
월령안 눈을 내리깔며 눈빛에 담긴 비웃음을 감추었다.
‘역시, 만만한 사람을 고르는군. 장군왕부에서는 육장봉은 못 건드리니까 날 괴롭히러 왔구나.’
예전에 그녀에게 딴죽을 걸었던 사람들에게 그녀가 어떤 식으로 복수해 주었는지를 다들 잊은 모양이었다.
“나도 네가 결정할 수 없다는 걸 안다. 너를 난처하게 할 생각도 없어. 명월산장은 네가 내 손에서 땄으니, 지금 내가 다시 네 손에서 따면 되지 않겠느냐. 월령안, 나와 다시 한번 내기를 하지 않겠는가?”
장군왕 세자는 ‘내기’라는 말을 한 순간, 투지를 불태웠다.
“월령안, 이번에는 반드시 지지 않을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