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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183)화 (183/1,004)

183화 그분은 개의치 않을 겁니다

“네, 장군.”

암위는 육장봉의 뒤를 따르며 다른 일들을 계속 보고하려 했다. 그러나 막 한 걸음 내디디고 입을 열기도 전이었다. 육씨 저택의 집사가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대장군, 폐하께서 당장 입궁하시라고 합니다.”

육장봉은 아무 말 없이 뒤돌아섰다.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더니, 머리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두어 걸음 정도 걸었을까.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더니 암위에게 말했다.

“셋을 보내라. 월령안을 교대로 지켜라.”

황금 이십만 냥. 수많은 이가 목숨을 내걸 만한 금액이자, 동시에 월령안을 노릴 만한 금액이었다.

물론, 황금 이십만 냥이 없더라도 월령안을 노리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재신의 품에 안겨 자랐다는 월령안의 명성은 육장봉과 비견될 만했다.

“네, 장군.”

암위는 대답을 마치고 허리를 굽힌 채 물러갔다.

저녁 무렵의 변경은 행인이고 장사치들이고 모두 귀가한 뒤였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던 거리는 한산하기만 했다.

육장봉은 말을 몰아 거리를 지났다. 단순히 지나가기만 한 게 아니라, 사방을 기민하게 살피고 있었다. 거리 구석구석의 행인들을 모두 눈여겨보았다.

육장봉이 갑자기 속도를 늦추었다. 거리 한 모퉁이에 서 있는 구레나룻을 기른 사나이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장군?”

육일은 육장봉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 그는 기마술이 뛰어나 말을 빠르게 몰 수 있기도 했다. 육일이 가장 먼저 육장봉 옆으로 따라붙었다.

“야율제다. 추격해라!”

육장봉은 사나이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살짝 내리깐 시선에는 살기가 언뜻 스쳐 지나갔다.

“네, 대장군.”

육일은 육장봉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았다.

바로 그 순간, 육일과 야율제의 눈빛이 마주쳤다.

야율제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음험하게 웃더니,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육일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길모퉁이에서 바람같이 사라졌다.

“셋째, 넷째, 어서 추격해라!”

삽시간에 육일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말을 채찍질해 길모퉁이로 쫓아갔다. 절반쯤 쫓았을 때, 앞뒤 가리지 않고 달리던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야율제를 바싹 추격했다.

육삼, 육사는 한발 늦었다. 그러나 육일이 말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두 사람도 따라붙었다.

눈 깜짝할 사이, 거리에서는 세 사람이 사라져 버렸다. 천천히 멈추어 선 군마 세 필만 남았다.

“저건…… 황금 이십만 냥이잖아?”

육십이는 사라진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했다.

“어…….”

한순간 거리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육이 등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육십이를 바라보았다. 육십이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육십과 육십일은 슬그머니 속도를 내어 그와 거리를 두려 했다.

“왜 그래요? 제 말이 틀렸어요? 저놈이 이십만 냥짜리 아니에요?”

육십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을 채찍질해 따라붙었다.

“아니다.”

육십은 육십이의 단순하고 해맑은 눈을 보자, 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재촉하기만 했다.

“어서 가자. 더 늦었다가는 대장군을 놓치겠다.”

이때 육장봉은 선두에서 달리고 있었다. 육십이 등과는 적어도 말 십여 필을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육십이는 얼굴빛이 변했다. 더는 생각할 겨를이 없이 속도를 내어 뒤쫓기 시작했다.

* * *

육장봉은 궁의 문이 잠기기 전 황궁에 도착했다. 황제가 사무를 처리하고 일상 휴식을 취하는 난각으로 곧바로 찾아갔다.

육장봉이 난각에 들어서서 미처 예를 올리기도 전이었다. 황제는 곁에서 시중드는 내관더러 육장봉에게 상주서를 넘겨주게 했다.

“장봉아. 북요 사신이 반 시진 전에 부랴부랴 보내온 국서(國書 - 나라의 이름으로 보내는 외교 문서)다.”

육장봉은 상주서를 넘겨받기는 했으나, 펼쳐 보지는 않았다.

“우리더러 북요 사신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는 내용입니까?”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보아하니, 너도 알고 있구나.”

“황금 이십만 냥의 힘은 얕잡아 볼 게 아닙니다.”

북요 사신의 국서가 날이 저물기 전에 날아든 데 대해 육장봉은 전혀 놀랍게 생각하지 않았다. 야율제가 변경에 숨어 있기 때문이리라.

황금 이십만 냥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걸지, 야율제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황제가 월령안을 압박하도록 요청하는 게 그의 최선책이었다.

“월령안도 참…… 대단하구나!”

황제는 머리를 저었다.

월령안이 야율제의 머리에 황금 이십만 냥을 내걸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황제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런 씀씀이는 제왕인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황제의 개인 금고에서는 도저히 낼 수 없는 액수였다. 그 안에 값진 물건이 많다지만, 물건을 현금으로 바꾸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국고에서도 낼 수 없는 돈이었다.

주나라의 국고는 넉넉했던 적이 없었다. 국고에서는 황금 이십만 냥을 내놓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내놓는다고 하더라도 감히 쓸 수가 없었다.

국고의 돈은 군대를 먹여 살리고, 지방 건설을 지원해야 했다. 모두 쓰일 곳이 정해져 있었기에, 돌려쓰기란 쉽지 않았다.

“야율제가 월령안의 목숨을 노리고 있습니다. 월령안이 먼저 손쓰는 게 잘못은 아니지요.”

육장봉은 북요에서 보내온 국서를 보지도 않고, 내관에게 도로 건네주었다.

이변이 없는 한 북요는 황제에게 계속해서 국서를 넣을 것이다. 월령안이 현상금을 내건 것을 철회할 때까지, 황제를 압박할 게 뻔했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르자, 황제의 얼굴빛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어젯밤의 일은 실마리가 잡혔느냐?”

야율제가 북요의 사사를 거느리고 월씨 저택에 쳐들어간 것은 황제에 대한 모욕이었다.

‘황성을 마음대로 드나들다니. 여기가 언제부터 북요 남원대왕의 뒷마당이 되었단 말이냐?

이런 식이면 나중에는 북요인들이 황궁까지 쳐들어와 황제의 목숨까지 노리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추 부도지휘사에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휴게실에서 죽었는데 겉으로는 타살로 보입니다. 그러나 제 부하들이 조사한 결과, 자살한 뒤에 타살 현장처럼 꾸민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건대, 전전사의 엽 부도지휘사는 이용당한 겁니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니 천천히 조사하고 심문하면 됩니다.”

하루 밤낮이면 필요한 정보를 조사하기에는 충분했다.

“제 부하들이 최근 추 부도지휘사와 왕래한 사람을 모두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추 부도지휘사의 아버지는 일찍 영녕후 휘하에서 한 달간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영녕후부가 어젯밤의 일에 참여했는지는 좀 더 확인해야 봐야 합니다.”

조사한 끝에 영녕후부까지 끌려 나왔다. 그러나 육장봉은 전혀 새삼스럽지 않았다.

야율제와 청희 장공주는 보통 사이가 아니었다. 어젯밤의 일을 청희 장공주가 직접 꾸민 게 아니라고 해도, 관련이 있을 게 분명했다.

“영녕후부라고?”

육장봉의 말에 황제는 눈썹을 찌푸렸다.

“이틀 전, 예부의 골샌님들이 또 상소문을 올렸느니라. 짐더러 예법에 따라 청희 장공주를 대장공주로 봉하라는 거다. 짐이 거부했다. 앞으로 며칠간은 조회에서 이 일을 툭하면 들먹일 거다. 그 골샌님들이 몇 년이 지난 일을 다시 들먹이는 것을 보니 우연은 아닌가 보구나.”

육장봉이 비웃음을 날렸다.

“무슨 우연이 그렇게 많겠습니까. 고의로 남들을 유도하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폐하께서 청희 장공주를 싫어하시고, 방해한다고 여기게 말입니다.”

“황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공주일 뿐이다. 그런데 짐이 방해할 필요가 있느냐?”

황제는 하찮다는 듯이 말했다.

“폐하께서 즉위하신 뒤, 청희 장공주를 대장공주로 봉하는 것은 예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지금껏 상주서를 받아도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이게 청희 장공주와 영녕후부를 방해한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육장봉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어 갔다.

“이 몇 년간 영녕후부는 점차 몰락했습니다. 속사정이 어떠하든지 간에, 겉으로 보아서는 폐하께서 청희 장공주 때문에 화풀이하시느라 영녕후부를 억압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어젯밤 일도 영녕후부와 연관된다는 것을 조사해 낸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확실한 증거를 내놓지 못하시는 한, 영녕후부를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그 골샌님들이 폐하께서 영녕후부가 마음에 안 들어 고의로 누명을 씌운다고 질책할 것입니다. 영녕후도 나서서 억울함을 호소할 것이고요.”

“짐은 지금까지 청희 장공주를 방해한 적이 없다. 짐이 방해했던 건 예부의 골샌님들이야. 날마다 짐에게 예법을 들먹이지만, 너도 알잖느냐. 그들이 말하는 그 예법들…….”

황제는 씩씩거리며 말을 이었다.

“짐의 친고모도 아직 책봉하지 않았는데, 짐과 아무 상관이 없는 장공주를 왜 먼저 책봉해야 한단 말이냐? 짐은 그들이 몇 마디 하면 타협하고 양보하던 부황이 아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절대 타협하지 않을 거다. 예부에서 현음 고모님을 대장공주로 책봉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한, 청희 장공주도 평생 장공주로 있어야 할 것이다!”

“유명무실한 이름일 뿐입니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육장봉은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분은 개의치 않을 겁니다.”

“현음 고모님이 개의치 않아도 짐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짐의 친고모가 북요에서 주나라 강산을 위해 피땀을 흘리고 있어. 당당한 공주가 북요 야만인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주나라를 위해 모든 걸 희생했다. 수도에서 나서 자라고 매일 부귀영화만 누리며 한가하게 지낸 공주가 무슨 자격으로 책봉을 받는단 말이냐?”

황제의 눈이 살짝 붉어졌다. 탁자 위에 올려 둔 손이 꽉 쥐어졌다.

“이 일은 의논할 가치도 없다. 예부에서 현음 고모님을 대장공주로 책봉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 한, 짐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청희 장공주를 대장공주에 책봉하지 않을 테다. 짐더러 속이 좁고, 화풀이한다고 모두가 떠들어대도 상관없다. 짐은 이 일에 대해서라면 절대로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육장봉은 슬며시 미소를 머금고 황제에게 살짝 허리를 숙였다.

“폐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원하지 않으시면, 누구도 폐하를 압박하지 못할 것입니다.”

육장봉은 대장공주라는 유명무실한 이름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분도 전혀 개의치 않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손아랫사람들은 그분을 대신해 억울해하고, 그분을 안타까워했다.

“네가 있는 한 짐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줄 알고 있단다.”

황제의 분노가 곧 기쁨으로 바뀌었다.

“장봉아, 이 일은 마음 놓고 조사하거라. 정말로 영녕후부와 연관된다고 해도 중단할 필요가 없다. 영녕후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지만, 너도 이미 군대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았잖느냐. 우리가 그자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육장봉이 대답했다.

“폐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이 반드시 확실하게 조사해 내겠습니다.”

황제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손을 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월령안에게 답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절대로 적당히 넘어갈 수가 없었다.

“이 일은 짐이 너에게 전적으로 맡기겠다. 어서 제대로 조사하거라. 야율제를 사로잡는 게 가장 좋다.”

황제는 육장봉의 능력을 믿고 있었다. 더는 캐묻지 않고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

“맞다. 계안이가 말하기를 야율제와 청희 장공주가 보통 관계가 아니라고 하더구나. 짐이 물어도 한사코 대답은 안 해 주더군. 뭔가 알아낸 게 있느냐?”

“야율제는 아마 청희 장공주의 아들일 겁니다.”

그러니 어젯밤 사건에서 영녕후부의 흔적이 발견되어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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