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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180)화 (180/1,004)

180화 내가 당신 대신 복수해 주겠소

때마침 들어오던 금군(禁軍)은 이 말을 듣고 눈이 화등잔만 해져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대장군과 월 낭자가?’

‘대장군은 이미 아내를 내친 게 아니었나?’

‘혹시 두 사람이 또…….’

금군은 육장봉의 품에 꼭 안겨 있는 월령안을 보았다. 이제 그들은 서로 시선을 맞추며, 이심전심의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이제 알겠구먼.’

‘앞으로 월 낭자에 관한 일은 꼭 주의해야겠군.’

‘이런, 오늘 월 낭자가 큰 사고를 당한 건 우리의 직무 태만 때문인 거 같은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금군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기 바빴다. 더는 감히 허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수횡천과 대치하고 있는 육장봉에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저희가 늦었습니다. 대장군께서 벌을 내려 주십시오.”

육장봉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수횡천을 세차게 공격해 물러나게 했다. 또 월령안을 안고서 물러섬과 동시에 명령을 내렸다.

“무림맹주 수횡천, 변경에서 조정 관리를 공격했다. 무예로 금기를 범했으니 생포해라!”

“육장봉, 참 뻔뻔하구나!”

수횡천은 문 어귀까지 물러났다가 겨우 몸을 가누었다. 육장봉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육장봉, 어쩜 아까보다 더 뻔뻔할 수가 있지?’

“멍하니 뭣들 하는 게냐? 어서 빨리 수횡천을 사로잡지 못할까! 공을 세워 잘못을 씻어라.”

육장봉은 수횡천의 분노를 무시하고 금군에 명령을 내렸다.

“네, 대장군.”

금군은 육장봉의 말을 듣자 흠칫 떨었다. 더는 잡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후닥닥 몸을 일으켜 달려가서는 수횡천을 포위했다.

금군에게 에워싸인 수횡천은 공격할 수도, 공격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육장봉에게 욕을 퍼부었다.

“육장봉, 이 소인배!”

“흥!”

육장봉은 콧방귀를 뀌었다. 월령안을 안고서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무림지존이면 어떻단 말인가?

내 구역에서는 호랑이라도 엎드려야 하고, 용이라도 몸을 말아야 할 것이다!’

육장봉은 월령안을 안고, 처음으로 그녀의 규방에 들어섰다.

그의 상상처럼 화려하거나, 웅장하거나, 사치스럽거나, 향기가 코를 찌르지는 않았다. 월령안의 규방은 아주 소박했다. 장식품은 거의 없었다. 방 안에 가장 많은 것은 책이었다.

내실에 있는 침대를 보지 못했다면, 월령안의 서재라고 착각할 뻔했다.

방안은 차가운 색조 위주로 꾸며져 있었다. 보통 여인의 규방처럼 아름답고 화려하지 않았다. 여성 특유의 아기자기함도 없었다.

방 안에서 나는 향기도 짙지 않았다. 맑고 그윽했다. 월령안의 몸에서 나는 배꽃 향기처럼, 담담한 향기가 나는 듯 마는 듯했다.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향기를 실컷 들이마시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육장봉은 생각과 동시에 그대로 행동했다.

고개를 숙여 월령안의 목덜미에 코를 가까이하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역시, 그의 상상처럼 향기로웠다.

전에 몇 번이고 월령안의 곁을 지나칠 때마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배꽃 향기를 맡았었다. 하지만 그 향기는 맑고 옅었다. 맡자마자 곧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진짜로 그런 향이 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늘 그리던 향을 가까이서 맡고 나자,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그는 월령안을 안고 침상으로 갔다. 허리를 굽혀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뒤, 이불을 끌어다 잘 덮어 주었다.

“기다리시오. 내가 당신 대신 복수해 주겠소.”

말이 끝나자마자, 육장봉의 기세가 바뀌었다. 칼집에서 빠져나온 검처럼 살기등등하고, 날카로워졌다.

육장봉은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금군에 에워싸인 수횡천이 보였다.

물론, 금군이 수횡천을 포위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의 능력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수횡천이 금군에게 거세게 반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은 변경이었다. 무림인이 마음대로 손을 쓸 수 있는 강호가 아니었다. 설령 수횡천이라고 해도 변경에서는 규칙을 지켜야만 했다.

수횡천은 금군 때문에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육장봉이 나오는 모습을 보자, 구원군이라도 본 듯이 크게 소리쳤다.

“육장봉, 어서 당신 부하더러 멈추라고 하시오. 아니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요!”

“멈춰라!”

이번만큼은 육장봉도 그의 말에 선뜻 따라 주며 멈추라고 명령했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금군은 곧 한발 물러섰다. 더는 수횡천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들이야말로 수 맹주와 겨루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상대방과 진짜로 싸워 보자, 그제야 실력의 차이라는 게 어떤 건지 실감했다.

이 많은 사람이 한 사람과 대결했지만, 그들은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특히 얼굴은 멍으로 얼룩졌다.

반면 수 맹주는 시장을 거니는 것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조금 전, 그들은 수횡천을 사로잡기는커녕 그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그래서 육장봉이 멈추라고 하자마자, 금군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바로 멈추고 물러섰다. 한발이라도 늦었다가는 괜히 두어 대 더 맞을까 겁이 났다.

수횡천은 육장봉이 이렇게 협조적으로 나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한순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사이에 육장봉이 수횡천의 앞으로 다가오다가, 잠깐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나가라!”

“네, 대장군.”

금군은 명령을 받자마자, 신속하게 대오를 정리하고 월령안의 거처에서 물러갔다.

수횡천도 정신을 차렸다. 즉시 육장봉을 뒤따라 밖으로 걸어 나갔다.

육장봉은 성큼성큼 걸어서 앞뜰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금군을 바라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밤 당직을 선 부도지휘사(副都指揮使)는 누구냐?”

이 말을 들은 금군은 일제히 얼굴색이 변했다. 저도 모르게 자세를 더욱 똑바로 했다.

오늘 이 일은 쉽게 넘어가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확 들었다. 오늘 밤 당직을 선 사람은 모두 끝장이었다.

“다들 왜 말을 못 하나?”

육장봉은 그들 앞에 서서 서슬 시퍼런 위엄을 있는 대로 드러냈다. 육장봉의 위세에 보통 금군은 물론, 수횡천조차도 불편함을 느꼈다.

지금 이 순간, 금군 앞에 서 있는 육장봉의 모습은 전장에서 천군만마를 지휘하여 적진으로 돌진하는 육 대장군과 겹쳤다.

육장봉의 강한 기세와 위압감은 모든 이의 상상을 초월했다.

털썩!

수횡천을 제외한 금군은 끝내 육장봉의 위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너도나도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부도지휘사가 없으면, 도우후(都虞候)는 어디 있느냐?”

육장봉이 다시 물었다.

육장봉은 경성에 돌아온 후 금군의 도지휘사(都指揮使) 직을 겸임했다. 하지만 군사 업무가 바쁜 탓에 그저 겸임했을 뿐, 금군의 구체적인 사무는 여전히 각 부도지휘사가 책임지고 있었다.

북요 사사가 내성까지 잠입해 하마터면 월씨 가문 전체를 도살할 뻔했다. 그런데 순시해야 하는 금군이 나타나지 않았다.

금군이 이렇게 큰 과실을 범했으니,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반드시 부도지휘사가 제일 먼저 그의 앞에 나와서 사죄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부도지휘사는 그림자도 비추지 않았다.

육장봉은 부도지휘사에게 일이 생겼음을 묻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부도지휘사의 바로 아래 지위는 도우후였다. 부도지휘사가 자리에 없으면, 자연히 부책임자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오늘 밤 이 일은 누구도 책임을 떠넘길 수 없다. 오늘 밤, 책임이 있는 금군 중 한 사람이라도 빠뜨리면 내가 성을 갈겠다.’

육장봉에게 지명 당한 도우후는 울고 싶었다. 아주 조그맣게 줄어들어 이 자리에 없는 척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그는 반드시 나가서 육 대장군의 분노를 혼자 받아 내야만 했다.

“소인 두위(杜威)가 대장군을 뵙습니다.”

도우후 두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면서 육 대장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땅을 짚고 있는 손이 주체할 수 없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두려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두위!”

육장봉은 두위를 힐끗 보고 나서 말했다.

“자네를 알고 있다. 두 장군의 손자이지.”

“네, 대장군.”

두위는 저도 모르게 머리카락이 쭈뼛했다. 어쩐지 오늘 밤에는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질 것만 같았다. 육 대장군뿐만 아니라, 그의 조부도 그를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의 조부는 육 대장군을 높게 평가할 뿐만 아니라 무척 좋아했다. 매번 육 대장군을 말할 때마다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 말투나 표정만 봐서는 육 대장군이 자신의 손자였으면 하는 눈치였다.

만약 육 대장군이 조부에게 뭐라고 말이라도 하는 날에는 분명 끝장이었다.

“두 장군이 가르친 손자가 고작 이 정도 수준인가?”

육장봉은 두위에 대한 불만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대장군께서 벌을 내려 주십시오.”

두위는 고개를 푹 떨궜다. 손이 더욱 심하게 떨렸다.

분명 육 대장군은 욕을 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덤덤한 가운데 실망감이 서려 있는 말투를 듣고 있으려니, 두위는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죄책감에 휩싸였다. 당장이라도 시간을 되돌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만회하고 싶었다.

그제야 두위는 조부가 육 대장군을 이야기할 때는 칭찬 일색이지만, 두위나 그 동년배를 대할 때면 온통 실망뿐인 이유를 드디어 알게 되었다.

그와 육 대장군은 나이가 비슷했다. 그러나 육 대장군 앞에서 그는 어린애에 지나지 않았다.

육 대장군은 남들 앞에 서 있기만 해도 고귀한 기품이 드러났다. 화를 내지 않아도 위엄이 드러났다.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어도, 감히 똑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이 기세는 일반인의 것이 아니었다. 대역무도한 말을 하자면, 황제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북요 사사들이 내성까지 잠입하여 반 시진이 지나도록 너희는 아무것도 몰랐다. 북요 사사가 월씨 저택에서 반나절이나 소란을 피웠는데, 너희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지. 오히려 성 밖에 있었던 나보다 더 늦게 도착했다. 직접 말해 봐라. 내가 너희에게 어떤 벌을 내려야 하겠느냐?”

육장봉은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덤덤한 목소리는 아무 기복이 없었다.

그러나 두위는 더욱 당황스러웠다.

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손을 사시나무 떨 뜻 부들부들 떨었다. 이가 덜덜 떨리는 가운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대, 대장군……. 소인이 근무를 소홀히 한 이유는…… 그, 그게, 추, 추(秋) 부도지휘사가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보, 보군사(步軍司) 안에서 죽었습니다. 엽(葉) 부도지휘사께서 이 자리에 있던 사람은 모두 혐의가 있다며, 아무도 자리를 뜨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소인과 저의 수하들은 보군사에 발이 묶여 늦게 도착했습니다.”

금군은 전전사(殿前司), 시위마군사(侍衛馬軍司), 시위보군사(侍衛步軍司)의 삼사(三司)로 나뉘어 있었다.

추 부도지휘사는 시위보군사의 부도지휘사로, 두위의 직속 상사였다. 엽 부도지휘사는 전전사의 부도지휘사였다.

추 부도지휘사가 갑자기 목숨을 잃었다. 육 대장군이 성안에 없는 상황에서, 전전사의 엽 대인이 달려와 대국을 주관하고 보군사의 사람들을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한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변명을 듣겠다는 게 아니다!”

그러나 육장봉은 내성 안전을 책임진 추 부도지휘사에게 사고가 생겼음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두위의 말을 듣고서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설령 추 부도지휘사는 죽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큰일이 터진 이상 결국 죽음으로 사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육장봉이 냉랭하게 말했다.

“추 부도지휘사가 죽었다고 해서, 너희가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용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너희 죄를 더 물어야 할 것이다.”

금군은 내성의 안전을 책임진다. 그런데 일개 부도지휘사의 죽음 때문에 내성의 안위를 돌보지 않았다. 두위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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