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고자질을 하다니
“육 대장군, 제 기억이 맞는다면, 수도의 안전은 당신 책임이에요. 아닌가요?”
월령안은 새빨갛게 된 눈으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그 눈길에는 온통 규탄과 질책뿐이었다.
“맞소.”
육장봉이 미간을 찌푸린 채 대답했다.
“야율제가 사사를 거느리고 경성에 잠입했을 뿐만 아니라, 제 집으로 쳐들어와서 사람을 죽였어요. 그건 당신의 불찰이 아닌가요?”
월령안이 호되게 질책했다.
육장봉은 또다시 머리를 끄덕였다.
“맞소.”
“북요인들이 수도에서, 황성에서, 그것도 천자의 발치에서 월씨 저택에 쳐들어와 사람을 죽였다고요! 이렇게 큰 소란을 피웠지만, 반나절이 지나도록 관병은 한 사람도 오지 않았어요. 이것도 당신의 불찰이 아닌가요?”
월령안이 전보다 더 사나운 말투로 따져 물었다.
육장봉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또다시 머리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내가 해명하겠소.”
야율제가 수도를 제집 안방 누비듯이 자유자재로 드나들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을 게 분명했다.
이 일은 반드시 확실하게 조사해야만 했다.
“하하하!”
육장봉의 대답을 들은 월령안은 비웃듯이 크게 웃었다.
“해명? 육 대장군이 저에게 무슨 해명을 하세요? 해명한다고 해도, 우선 자기 자신에게 해명해야 할 텐데요?”
월령안은 육장봉에게 지금처럼 실망했던 적이 없었다.
“육 대장군의 눈앞에서 북요인들이 사사를 거느리고 수도에 쳐들어와 사람을 죽였어요. 육 대장군은 사전에 발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북요인들이 몸을 빼 보란 듯이 도망치게 했어요. 육 대장군, 저보다는 본인에게 더 해명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여기는 수도예요. 황성이고, 천자가 계시는 곳이라고요! 여기는 변방이 아니에요. 그런데 북요인들이 수도를 제집 안방처럼 드나들고 있어요. 육 대장군, 당신은 이러고도 나라를 지킨다고 해요?”
월령안은 울먹이더니, 끝내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저는…… 월령안은 주나라의 백성이 아닌가요? 당신의 보호 아래 있는 거 아닌가요?”
“월령안, 오늘 밤 일에 대해서는 내가 꼭 당신이 만족할 만한 답을 주겠소.”
월령안의 질책은 지당했다. 하지만 오늘 밤의 일은 예상 밖이었고, 특수한 경우였다.
그가 직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건 야율제와 결탁한 사람을 찾아내어, 더는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제가 만족할 만한 답이요? 좋아요, 그럼 피는 피로 갚아야 해요. 야율제의 시신을 가져다주세요. 그놈이 내 눈앞에서 비참하게 죽는 꼴을 봐야, 저는 만족할 거예요.”
월령안은 악에 받쳐 말했다.
육장봉은 엄숙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지. 내가…….”
그가 입을 열자마자, 월령안이 말을 잘랐다.
“육장봉, 쉽게 약속하지 마세요. 특히 당신이 해낼 수 있는지 없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 상황에서 말이에요.”
‘육장봉, 당신은 아나요? 당신이 한 말을 저는 모두 곧이곧대로 듣는다고요…….’
월령안은 그에게 배신당한 것처럼, 눈물을 머금고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육장봉의 마음속에 정체불명의 조급함이 밀려들어 왔다. 저도 모르게 어조가 거칠어졌다.
“내가 당신과 한 약속은 반드시 해낼 거요.”
상황을 모면하려고 어린 아가씨에게 거짓말을 할 만큼 그의 수준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월령안이 말하지 않아도, 그 역시 야율제를 가만둘 수가 없었다.
야율제는 오늘 밤 행동으로 주나라의 체면에 먹칠했다. 그뿐만 아니라 육장봉의 체면도 완전히 뭉개 버렸다.
“좋아요. 그럼 육 대장군이 좋은 소식을 전해 주시기를 기다리죠. 저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월령안은 삽시간에 모든 감정을 거두어들였다. 두 손을 겹쳐 육장봉에게 정중하게 읍하였다.
하지만 육장봉은 전혀 기뻐할 수가 없었다.
월령안이 또다시 그를 멀리하고, 내외하고 있었다. 그를 자기와 한편으로 여기지 않았다.
육장봉이 여러 가지 불만으로 가득할 때였다. 수횡천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돌아왔다.
“령안아!”
“오라버니.”
월령안은 고개를 들고 손을 내렸다.
수횡천은 육장봉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바로 월령안의 앞으로 다가가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자책하듯 말했다.
“미안하게 됐구나. 네가 위험에 처했을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
그는 육장봉이 낮에 자기와의 만남을 거절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만약 낮에 육장봉이 그를 만나 사전에 준비했다면, 오늘 밤 일은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령안이가 이 일들을 겪지 않을 수도 있었어.’
“오라버니,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오늘 밤 오라버니가 사전에 경계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벌써 죽었을 거예요.”
월령안은 마음속으로 수횡천에게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낮에 기미를 알아채지 못해서 소육자에게 당부하지도 않고, 그녀더러 준비하라고 하지 않았다고 해 보자. 그랬더라면 그녀는 야율제의 손에 이미 죽고 없었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가장 증오하는 북요인의 손에 죽었을 수도 있었다.
“내가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구나.”
수횡천은 머리를 저으며 자책했다.
“정말 미안하다. 야율제가 도망쳐 버렸어.”
야율제는 교활한 여우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았다. 간사하고,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갔다. 도망치는 재주도 또한 따를 자가 없었다.
월령안이 고개를 저으며 맥없이 말했다.
“야율제는 이미 계획이 있었는데, 저흰 대책이 없었죠. 이건 오라버니의 불찰이 아니에요.”
“아니야! 내 불찰이야!”
수횡천은 허약하고 창백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쪽에 서 있는 차갑고, 거만하며, 담담한 표정의 육장봉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그는 잠시 주저하는 듯하다가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육장봉은 수횡천이 입을 열기 전에 특별히 자기를 힐끔 보는 시선을 알아차렸다.
‘저 눈빛은…….’
육장봉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 직감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바로 수횡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령안아, 내가 성 밖에서 누군가가 너를 미행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다음 돌아와서 육 대장군과 연락했어. 좀 조사해 달라고 하려 했는데, 육 대장군이…….”
수횡천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육장봉을 한 번 보았다. 씁쓸하게 웃으며 다시 자책했다.
“나를 만나 주지를 않았다.”
‘수횡천이 고자질을 하다니.’
육장봉은 얼굴빛이 살짝 변했다.
“내가 낮에는 바쁘네.”
‘당당한 무림맹주가 당사자 앞에서 고자질하다니. 체면은 던져 버린 건가?’
“그렇군. 육 대장군은 무척이나 바쁘시군. 야율제를 사로잡으러 다니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나 보네.”
수횡천은 사정없이 비꼬았다.
그는 청희 별장에서 육장봉이 어떻게 자신을 위협했는지를 잊지 않고 있었다. 지금 육장봉을 비꼴 기회를 붙잡았으니, 절대 놓칠 수가 없었다.
“수횡천, 분명 자네가 뭔가 있는 척하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네. 만약 내게 무슨 일이라고 말했었다면, 내가 왜 자네를 만나지 않았겠나?”
육장봉은 수횡천이 일부러 이런다고 확신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낯가죽이 두꺼운 사람일 줄은 몰랐다.
“육 장군, 나는 분명 중요한 일이 있으니 만나 달라고 했소. 그쪽이 바쁜 줄 알지만, 나도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오. 중요한 일이 아니면 내가 당신을 만나러 갈 일도 없소. 하지만 당신은? 부하더러 나를 만나보라고 할 시간조차 없었지.”
‘육장봉은 자기가 얼마나 남의 불만을 사는지 모르는 건가? 중요한 일이 아니면, 내가 왜 자기를 찾아가서 만나자고 했겠냐고.’
육장봉은 이치를 따져 반박했다.
“나를 만나지 못했으면, 월령안한테 숨기지 말고 말해 줬어야 했네.”
‘내가 남들 뒤통수치고 다닐 적에, 네놈은 어디 구석에나 처박혀 무예나 닦고 있었겠지. 내 뒤통수를 치고 싶은 모양인데, 어림도 없다.’
“나는 의심했을 뿐, 확신할 수는 없었소. 그래서 사실을 확인해 달라고 육 대장군을 찾아간 거요. 변경은 당신의 구역이 아니오. 당신이 조사하는 게 우리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아무 근거도 없는 추측을 떠들었다가, 월령안이 놀라기라도 하면 어쩌란 말인가.
그리고 어쨌든 월령안은 여인이었다. 그들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굳이 말해서 그녀가 두려움에 떨게 할 필요가 없었다.
“수횡천, 월령안을 너무 얕잡아보는군. 월령안은 일이 닥치면 남자에게 의지하는 것 말고 울기만 하는 당신의 그 소사매가 아닐세. 월령안은 월씨 가문의 가주다. 자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고 유능하지.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월령안도 할 수 있네. 자네가 할 수 없는 일도 월령안은 할 수 있지.”
수횡천이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육장봉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수횡천은 너무 오랫동안 대협 노릇을 했다. 누구를 보더라도, 자신의 보호가 필요한 약자라고 여겼다.
“나도 당연히 령안이가 강하고, 유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소. 령안이를 내 소사매와 비교한 적은 한 번도 없소.
하지만 령안이가 아무리 강하고 유능하다고 한들. 내가 오라버니로서 보호하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소.”
수횡천은 미간을 찌푸렸다. 육장봉이 느닷없이 소사매를 들먹이는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육장봉의 저의를 단숨에 알아챌 수는 없었다.
“없으면 다행이군.”
육장봉은 한마디 대꾸하더니, 딱 거기서 멈추었다.
모든 일은 과유불급. 월령안처럼 영리한 이는 분명 그의 말속의 뜻을 알아챘을 것이다.
“수 맹주, 다음부터 월령안과 관련된 일이면 나를 찾아오게. 내가 아무리 바빠도 사람을 시켜 따르도록 하겠네. 만약 나를 찾지 못하면, 월령안에게 직접 말해도 되네. 걱정하지 말게. 월령안은 당신보다 영리하고 일 처리도 빈틈없으니까.”
육장봉은 수횡천이 말끝마다 ‘령안이’, ‘령안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무척이나 귀에 거슬렸다.
안타깝게도 그는 월씨 가문 어르신이 아니었다. 수횡천을 질책할 명분이 없었다.
“육 장군, 령안이는 내 누이동생이오. 이 오라버니가 있으니, 령안이의 일로 댁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을 거요.”
수횡천은 육장봉이 자기와 기 싸움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당연히 지지 않고 반격했다.
남자 둘이서 말 안팎으로 서슬을 감춘 채 주거니 받거니 하느라 바빴다. 월령안의 앞에서 티를 내지 않고 상대방을 깎아내리려 안달이었다.
하지만 당사자 중 하나인 월령안은 지금 날카롭게 오가는 대화를 들을 정신이 없었다.
몸이 무척 불편했다. 메스꺼워서 토하고 싶었다. 가슴이 칼로 에는 듯이 아팠다. 눈앞이 아른거렸다. 머리도 어지러워, 세상이 핑글핑글 도는 듯했다.
그녀는 육장봉과 수횡천이 말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입이 움직이는 것만 보일 뿐이었다. 귀가 윙윙거려, 대화 내용은 안간힘을 써도 들을 수가 없었다.
주먹을 쥐고서 머리를 세게 두드렸다. 그렇게나마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수횡천에게 힘드니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연 순간,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찌 된 영문이지?’
다시 한번 있는 힘껏 자신의 머리를 때려서 정신을 차리려 했다.
탁탁탁…….
그렇게 해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대신 그녀의 행동은 육장봉과 수횡천의 주의를 끌었다.
“월령안?”
“령안아, 너 왜…….”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둘 다 관심 어린 눈길로 월령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라버니, 저…….”
월령안은 자신의 상태를 수횡천에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겨우 입을 뗀 순간, 더는 버티지 못했다.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쓰러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