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령안이 이름을 자네가 왜 막 부르나
“이건 내상을 치료하는 약인데, 세 시진에 한 번씩 복용해야 해요. 이건 부기를 빼고 열을 내리는 약인데, 네 시진에 한 알씩 복용하면 되고요. 그리고 이건 열을 내리는 약이고, 이건 지혈시키는 약이고, 이건 설옥고…….
접골용 연고는 제게도 있는데, 이것도 약왕곡에서 가져온 거예요. 지금은 갖고 있지 않지만, 나중에 사람을 시켜 보내드릴게요. 노 의원, 우리 어르신 좀 잘 보살펴 주세요. 다른 사람들의 상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제가 사람을 시켜 보안당(保安堂)에서 의원을 부를 거예요. 어르신만 잘 보살펴 주면 돼요.”
월령안은 두서없이 부탁했다. 여전히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해야 할지 압니다.”
노 의원은 월령안이 그의 손에 억지로 안겨준 약을 보았다. 한동안 할 말을 잃고, 머리를 저으며 탄식할 뿐이었다.
‘월령안은 정말 부자구나!’
월씨 가문 어르신의 목숨은 이런 약들로 부지하고 있었다. 거금을 들여도 구하기 힘든 이런 약으로 장기간 보양하지 않았다면, 아마 벌써 저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빨리 나가거라. 여긴 네가 필요 없다니까.”
노인은 귀찮은 듯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살짝 쉬었으나, 기운이 넘쳤다.
하지만 월령안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영감님께 우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돼.’
그녀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서 어두운 곳에 숨으려고 했다. 그러다 그만 따뜻한 가슴에 부딪히고 말았다.
평소였으면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신경은 전부 노인에게만 쏠려 있었다. 자신이 육장봉의 품에 기대어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영감님. 이제 겨우 시작인데요. 벌써 저를 싫어하시면 어떻게 해요. 더 늙어서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면 제가 똥오줌을 받아 내야 할 텐데요.”
“똥오줌을 받아 내? 썩 나가지 못할까. 널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난다.”
노인은 언짢은 티를 그대로 드러냈다.
월령안은 노인이 힘겹게 버티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걱정하지 않도록, 억지로 건강한 모습을 꾸며내고 있을 뿐이다.
“요까짓 상처 때문에 제가 영감님 옆에 붙어 있을 줄 아세요. 저 그만 가요.”
노인이 피곤해할까 봐, 더는 머무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방문을 나서자마자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걸음도 멈추지 않고,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노인의 처소에서 잽싸게 벗어났다.
그녀로서는 노인의 뜻에 따라 줄 수밖에 없었다.
방 안에 남은 육장봉은 월령안을 뒤쫓아 가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서서 텅 빈 눈앞을 바라보았다. 가슴팍의 온기가 조금씩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음속에는 허전함이 감돌았다.
“육 장군, 자네는 왜 나가지 않나?”
그가 나가지 않자, 노인은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고 못마땅하다는 듯이 내쫓았다.
노인이 월령안을 못마땅해하는 것은 웃어른이 아랫사람을 놀리는 것이었다. 반면 육장봉을 못마땅해하는 것은 진심으로 싫어한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못마땅함을 감추려고도 하지도 않았다. 말투도 차갑기 그지없었다.
육장봉은 눈을 내리깔아, 모든 감정을 감췄다.
“월령안은 아주 영리합니다. 어르신은 전혀 속이지 못하셨을 겁니다.”
“쿨럭쿨럭…….”
노인이 기침했다. 몸은 허약한 상태였지만, 목소리는 아주 홀가분하게 들렸다.
“내가 언제 걔를 속이려 했다고 그러나. 다만 걔가 눈에 거슬려서 그러네.”
‘육장봉 이놈이 령안이를 안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감히 내 앞에서 이런 말을 해?’
그는 어린 월령안이 크는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영리한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노인의 부상이 얼마나 심한지를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노 의원의 말은 그녀를 속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월령안은 노인을 잘 알았다. 그는 울고불고 걸 하는 싫어했다. 자신을 염려하거나 걱정하는 말도 듣기 싫어했다. 또 그가 남들에게 허약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 주기를 가장 싫어했다.
그래서 그더러 걱정하지 말라는 뜻에서 그의 장단에 맞춰 주고는 했다.
그가 그녀의 마음을 다 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앞에서 모르는 척할 뿐이었다.
‘우리 령안이가 얼마나 사람 마음을 잘 헤아리는데…….’
육장봉이 말했다.
“령안이가 왜 영감님이라고 부르는지 알겠습니다.”
이 노인은 정말로 괴팍한 구석이 있었다.
“령안이 이름을 자네가 왜 막 부르나?”
육장봉이 이름을 부를 때, 남다른 친밀감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노인이 버럭 화를 냈다.
지금 몸이 좋지 않으니 망정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장 육장봉을 단단히 혼내 주었을 것이다.
‘육장봉 저놈은 자기가 뭐 그리 잘난 줄 아나? 우리 령안이와 친한 척하려고? 꿈도 야무지군!’
“어르신, 잊으셨습니까. 어르신의 목숨은 제가 구한 겁니다.”
저번만 해도 노인은 그에게 상당히 호감이 있어 보였다.
‘그런데 이제 며칠이 지났다고 나를 경계하다니? 이 영감님의 태도가 변한 건, 월령안이 날 대하는 태도가 변했다는 뜻인가?’
“허!”
노인이 비웃으며 말했다.
“오늘의 위험은 누가 초래했는데? 당당한 사내대장부가 능력이 없어 여인 하나에 의지해 먹고 산 건 그렇다 쳐. 그런데 그 여인을 보호하지도 못하다니. 자네 같은 사람이 어떻게 대장군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군?”
노인은 상처가 심한 탓에, 말을 마치자마자 숨이 차서 헐떡거렸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되었다.
“어르신, 힘을 아끼시지요. 가벼운 부상이 아닙니다. 정말로 가벼운 외상으로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죠?”
이 모습을 본 노 의원이 급히 환약을 꺼내 노인의 입에 밀어 넣었다.
노인이 약을 삼키고 한참이 지났다. 그제야 겨우 숨이 고르게 변했다.
그는 눈을 바로 뜨더니, 하찮다는 듯이 비웃었다.
“나는 저놈이 저렇게 항상 내려다보는 꼴이 보기 싫어. 자기가 도대체 뭐라고? 저놈이 지금처럼 잘 된 데, 우리 령안이의 공이 칠 할까지는 아니라도, 오 할은 될 게 아닌가? 그런데 자네가 저놈을 좀 보게나. 저놈이 우리 령안이를 위험에 빠뜨렸어. 그런데 무슨 낯짝으로 내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라고 말한단 말인가.”
육장봉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한마디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월령안이 그의 휘하 병사와 그를 삼 년 동안이나 먹여 살린 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가 자세한 사정을 몰랐던 것이나 그 나름대로 사전에 준비했던 것은 상관이 없었다. 그 사실은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는 월령안이라는 막후 공신을 보호하지 못했다. 또 야율제가 그녀의 존재를 알고, 그녀를 위험에 빠뜨리게 했다. 이 사실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변명할 수가 없었다.
“어르신, 편히 쉬십시오.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할 말이 없어진 육 대장군은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묵묵히 인정했다. 노인의 못마땅해하는 눈빛을 받으며, 자발적으로 물러 나왔다.
건물 바깥으로 나서자 찬 바람이 불어 닥쳤다. 육장봉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는 월령안에게 기대 삼 년 동안 먹고 살았다. 그런 주제에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마자 그녀를 내쳐 버렸다.
이제 이 사실은 어떻게도 변명할 수가 없게 된 듯했다.
‘다 조계안 그놈 때문이다. 이 빚은 나중에 다시 한번 제대로 따져야겠군.’
* * *
황궁. 난각에 누워서 요양하던 조계안은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
조계안은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동작이 너무 크다 보니 상처에 무리가 갔다. 아파서 이를 악물었지만, 어의를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의가 서둘러 달려왔다. 조계안의 복부 상처가 또 파열된 것을 보자,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조왕 전하, 어찌 된 겁니까? 멀쩡하던 상처가 어쩌다 다시 찢어졌습니까?”
그 많은 설옥고를 발라 이제 겨우 상처가 붙으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또 터졌다.
‘설옥고를 도대체 얼마나 써야 할꼬?’
어의는 곧 써야 할 설옥고를 떠올리자, 가슴이 따끔따끔 아팠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상처가 왜 터졌는지 내가 어찌 아느냐? 어서 빨리 약이나 바르도록 해라.”
조계안은 짜증스럽게 욕을 했다. 그저 말할 수 없이 초조하기만 했다.
‘육장봉, 이 자식은 꿈속에서도 나를 가만두지 않네. 아무래도 내가 전생에 그 자식에게 큰 빚을 진 모양이군!’
* * *
이날 밤, 월씨 저택은 끔찍한 피해를 입었다.
시신은 이리저리 한가득 널브러져 있었다. 공기는 온통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땅바닥은 피바다가 되어 발을 디딜 때마다 끈적끈적했다.
월령안은 뜰로 돌아왔다. 땅 위에 쓰러져 꼼짝하지 않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호원들을 보았다.
마음속은 울분으로 가득 찼다. 가슴속에서 불길이 치솟은 듯, 호흡마저 곤란할 정도로 아팠다.
한순간 마음이 아픈 것인지, 상처가 아픈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야율제, 해도 너무 하잖아!’
그녀의 빨개진 두 눈에는 눈물이 글썽했다.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부들부들 떠느라 언제든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곧 안정을 되찾았다.
심호흡을 크게 하며 한참 숨을 골랐다. 그다음에 다시 쪼그리고 앉아, 땅에 쓰러진 호원들의 생사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육장봉은 노인의 처소에서 나왔다. 월령안이 시체 사이를 휘청거리며 헤집고 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몸에 얇은 잠옷만을 걸치고 있었다. 잠옷은 피와 오물로 얼룩졌을 뿐만 아니라 몇 군데나 찢어져 있었다. 길게 늘어진 천 조각이 밤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더러웠다. 풀어헤친 긴 머리카락은 등 뒤로 아무렇게나 넘겨져 있었다. 피에 젖어 엉겨 붙은 머리카락이 더러는 얼굴에, 더러는 등에 찰싹 붙어 있었다. 피난민처럼 더럽고도 볼썽사나운 모습이었다.
월령안은 호원의 곁에 주저앉았다. 겁 많은 아이처럼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그들이 숨을 쉬는지 확인하고, 다시 떨리는 손을 거두어들였다.
잠시 후, 그녀는 또 가까스로 일어났다. 휘청휘청 다른 호원의 곁에 다가가서는 다시 주저앉았다.
느릿한 발걸음에 온몸이 좌우로 흔들렸다. 언제든 쓰러질 것만 같았다.
“죽었어. 다들 죽어 버렸어.”
월령안은 목이 메어 입을 열었다. 힘들게 기어 일어나 입술을 깨물었다. 그제야 터져 나오는 울음을 겨우 참을 수 있었다.
육장봉은 가슴이 아팠다. 몸이 머리보다 먼저 반응했다. 월령안이 힘들게 일어서는 순간,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의 팔을 부축했다.
“월령안, 괜찮소?”
“육장봉?”
월령안이 고개를 돌렸다. 순간 몸이 확 굳어지더니, 곧이어 그를 와락 밀쳐 버렸다. 하지만 그를 밀쳐 내기는커녕 본인이 중심을 잃고 뒤로 몇 발짝 밀려나고 말았다.
“월령안…….”
육장봉이 다가서자, 그녀는 손을 저어 뿌리쳤다. 그리고 그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육 대장군, 저 안 좋아요! 아주 안 좋다고요!”
“당신 지금…….”
월령안의 상태가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