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드디어 끝났구나
월령안은 온몸을 긴장시켰다. 팔찌에 숨겼던 비도를 재빨리 날렸다.
챙!
날아간 비도는 사사가 막아내는 바람에 튕겨 나갔다.
월령안은 연신 후퇴하며 또다시 비도를 날렸다. 마찬가지로 사사들도 비도를 땅에 떨어트렸다.
월령안은 공격을 멈출 엄두가 나지 않았다. 팔찌 속의 비도를 연이어 날렸다.
하지만 사사는 미리 방어하고 있었다. 그녀가 날린 암기는 전혀 효과를 보지 못한 채 몽땅 땅에 떨어졌다. 그래도 더는 날릴 암기가 없을 때까지 연속으로 수십 개를 날렸다.
이 모습을 본 사사는 더욱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바로 그 순간, 나뭇조각 세 개가 허공을 가르며 슉,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 들어왔다.
사사들이 월령안의 앞 두 걸음까지 다가왔을 때였다. 나뭇조각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몸을 파고들었다.
사사 셋이 순간 굳어졌다.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랗게 뜨인 눈으로 지척에 있는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쓰러졌다.
“영감님!”
월령안은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야율제의 발에 차여 바퀴 의자와 함께 날아가는 노인을 보고 있으려니,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죽기 살기로 노인이 떨어질 방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쿵!
노인과 바퀴 의자가 함께 떨어졌다. 바퀴 의자가 노인의 몸 위로 떨어졌다. 우둑, 하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까지 들렸다.
“영감님!”
월령안이 달려갔다. 그녀의 오른쪽 손과 팔에는 전혀 힘이 실리지 않았다. 그래도 바퀴 의자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영감님, 괜찮으세요?”
“쿨럭쿨럭, 나도 늙었구나. 힘에 부치네.”
노인은 머리가 헝클어졌다. 얼굴은 하얗게 질렸지만, 평온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디를 다쳤는지는 몰라도, 다리에서 피가 끊임없이 흘러 그의 하반신을 흠뻑 적셨다.
이런 상황에서도, 야율제가 달려드는 것을 본 노인은 월령안을 와락 잡아당겨 등 뒤로 숨겼다.
“야율제!”
육장봉은 안뜰에 뛰어든 순간, 야율제가 노인과 함께 넘어져 있는 월령안에게 검을 휘두르는 광경을 보았다.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에 쥔 검을 던졌다.
야율제는 옆에서 날아드는 살기를 느꼈다. 어쩔 수 없이 검을 거두고 그 일격을 피해야만 했다.
슉, 하는 소리와 함께, 육장봉의 검이 야율제를 스치고 날아갔다.
야율제는 공격을 피하고 고개를 돌렸다. 촛불 아래에 서 있는 은빛 연갑 차림의 육장봉이 보였다. 순간 눈빛이 차가워졌다.
“육장봉! 어떻게 왔지?”
지금 이 시각, 육장봉은 신음산에 있어야 했다. 설령 신음산에 있지 않더라도, 잠한성에게 잡혀 있어야 했다.
‘잠한성이 이 정도로 쓸모가 없었나? 육장봉과 수횡천, 애송이 둘도 처리를 못 해?’
야율제가 수횡천을 떠올린 순간이었다. 육장봉과 간발의 차로, 수횡천도 모습을 드러냈다.
육장봉이 나타난 것만으로도 야율제는 분노했다. 하지만 곧이어 수횡천까지 나타나자, 하마터면 욕을 할 뻔했다.
‘잠한성도 완전히 한물갔군. 고작 두 놈도 잡아 두지 못하다니!’
야율제는 나지막이 욕을 했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검을 거두고 가버렸다.
“육장봉, 다시 만나지.”
육장봉 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수횡천까지 더해지면, 승산이 거의 없었다.
야율제는 월령안의 목숨을 단칼에 빼앗을 수 있었지만, 손을 쓰지 않았다. 대신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몸을 날려 달아났다.
육장봉과 수횡천이 함께 있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몸을 뺄 수가 없었다.
월령안을 죽일 기회는 분명 다시 돌아올 것이다. 목숨을 걸고 모험하고 싶지 않았다.
“야율제, 게 섰거라!”
뛰어 들어온 수횡천은 걸음을 잠깐 멈추고 주위를 한 번 재빨리 훑었다. 월령안과 소육자가 생명의 위험이 없는 것을 보고서야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수횡천이 다시 고개를 들자, 야율제가 달아나려는 모습이 보였다. 앞뒤 가리지 않고 바로 쫓아갔다.
육장봉은 쫓아가지 않았다. 앞으로 걸어가서 칼자루 하나를 밟았다. 칼이 슉, 하는 소리와 함께 튕겨 오르자 다리를 들어 힘껏 찼다.
대도는 슝, 하고 날아가 북요 사사의 등에 꽂혔다.
육장봉은 또다시 땅 위의 칼을 발로 차, 다른 사사에게 날렸다.
그 사사는 공격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휙 돌렸다. 당장 칼을 휘둘러 막아내려 했다. 하지만 그의 칼은 허공을 갈랐을 뿐이다.
푸슉!
대도가 사사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사사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다.
같은 시각, 육장봉과 수횡천이 나타난 것을 본 소육자는 마지막 힘을 끌어올렸다. 검을 세차게 휘둘러 마지막 남은 사사를 베었다.
하지만 마지막 일격을 날리고 나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소육자는 땅바닥에 풀썩 쓰러져 옴짝달싹 못 했다.
‘드디어 끝났구나.’
소육자는 길게 숨을 내쉬고, 대자로 드러누웠다.
너무나 힘들었다.
몸도 힘들었지만, 마음이 더 힘들었다.
이 시각, 월씨 저택에서 서 있는 사람은 육장봉 뿐이었다.
월령안은 노인에게 밀쳐졌으나, 다시 기어 일어나 그의 곁에 꿇어앉았다. 하지만 감히 노인을 만지지는 못했다. 대신 몸에 지니고 있던 모든 약을 꺼내 그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영감님, 어디를 다쳤어요? 무슨 약을 드리면 되나요?”
“고작 외상 가지고. 쿨럭쿨럭……. 괜찮다니까.”
노인은 땅에 누워 꼼짝할 수 없었다. 두 눈은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피를 이렇게 많이 흘렸는데요.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어요? 어딜 다쳤어요? 지혈해 드릴게요.”
월령안은 황급히 약병 더미에서 외상을 치료하는 약을 찾아냈다.
“설옥고. 저한테 아직 설옥고가 있어요. 영감님, 지금 움직일 수 있어요? 사람을 시켜 부축해 드릴게요.”
“제가 부축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육장봉이 앞으로 나와 노인 앞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의 뜻을 물었다.
노인의 몸이 잠시 굳었다. 고개를 들어 육장봉을 흘끔 보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네.”
남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하지만 월령안이 바보처럼 우는 모습을 보자, 그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당신, 당신 조심하세요.”
월령안은 거절하지 않았다. 아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영감님께서 방금 뼈를 다쳤어요. 조심해 주세요. 누르지 말아요.”
뜰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다쳤다. 멀쩡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가 직접 하자니 그녀는 노인을 안아 일으킬 힘이 없었다. 육장봉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소.”
육장봉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노인을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노인은 아주 가벼웠다. 육장봉은 노인을 안아 올리는 데 거의 힘을 쓰지 않았다.
노인은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벌써 십 년이 지났다. 폐인과 다름없는 자신을 여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월령안은 땅 위의 약들을 부랴부랴 챙기고, 뒤따라 일어섰다. 눈이 빨개진 채 말했다.
“바퀴 의자가 망가졌어요. 영감님을 동쪽 곁채로 모셔다드릴 수 있나요?”
“좋소.”
육장봉은 대답하더니, 그녀의 안내도 받지 않고 곁채로 걸어갔다.
곁채 안에서 늙은 하인이 급히 달려 나왔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월령안과 육장봉에게 안겨 있는 노인을 보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가씨, 어르신은……!”
“어서 가서 노(盧) 의원을 불러오게. 어르신께서 다치셨네.”
월씨 가문에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쓰러졌다. 평소 안뜰에서 시중을 드는, 명령이 없으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만이 다행히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지금 곧 가겠습니다.”
늙은 하인은 연신 머리를 끄덕이며 재빨리 밖으로 뛰어나갔다.
노인의 몸이 좋지 않은 관계로 의원이 항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월령안은 거금을 들여 나이 든 의원 한 분을 모셨다.
그 의원도 월씨 저택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벽 하나를 사이 두고 있어, 옆집에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밤에 월씨 저택에서 이런 소란이 있었으니, 그도 분명 들었을 터였다. 다만 그는 나이가 많아, 온다 해도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짐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노 의원도 이미 적응했다. 월씨 저택에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다. 싸우는 소리가 들리자, 당장 약상자를 챙기기 시작했다. 이쪽의 혼란한 상황이 끝나면 건너와서 도울 셈이었다.
노 의원이 곧 건너왔다. 그는 노인마저 다쳤을 줄은 생각지도 못해 놀랐다.
그늘진 얼굴로 들어오는 노 의원을 보자, 월령안은 급히 맞이했다.
“노 의원, 어르신이 어떤지 어서 봐 주세요. 피를 계속 흘리는데, 저한테는 손도 못 대게 하네요.”
노인은 여전히 원래 모습 그대로였다. 하반신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머리는 마구 헝클어져 더럽고, 보기 흉했다.
월령안이 노인을 닦아 주려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단지 노인이 건드리지 못하게 했을 뿐이다. 심지어 몇 번이고 자신을 상관하지 말고, 밖에 나가 뒷수습을 하라고 재촉했다. 자신은 살짝 다친 것뿐이니, 생명에는 위험이 없다고 했다.
월령안은 노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억지로 그를 챙겨 주려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노 의원이 진찰하고, 큰 문제가 없다고 확인할 때까지 자리를 지키려 했다.
결국, 두 황소고집은 서로 한 걸음씩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노 의원이 빨리 왔다.
“그만, 그만 진정하십시오. 제가 보지요.”
노 의원은 나이가 있다 보니, 동작이 빠를 수가 없었다. 월령안이 하도 재촉하자, 손을 내밀어 그녀의 부축을 거절했다. 그리고 자기 속도에 맞춰 천천히 침대로 걸어갔다.
월령안은 한쪽에 서서 속이 타들어 갔다. 그래도 노 의원을 다시 재촉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며 애만 태울 뿐이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어르신은 괜찮을 거요.”
육장봉은 앞으로 나가 월령안의 등 뒤에 섰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위로했다.
지금의 월령안은 보기 딱할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네.”
월령안은 외마디 대답을 했다.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허약함과 무력함이 배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육장봉은 가슴이 아릿했다.
여태껏 월령안이 이처럼 무력하고, 막막해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버림받았을 때도, 철광산에 대해 추궁당했을 때도, 소씨 가문에서 문전까지 찾아와 괴롭힐 때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녀는 항상 굳세고, 침착했다. 늘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떻게 해야만 이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지를 똑똑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타고난 상인이었다. 육씨 가문에 시집가는 것 역시 그녀에게는 유익한 거래였다.
그렇게 실리적인 사람이 지금 혈연관계도 없는 노인 때문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육장봉은 불가사의하다고 여겼다. 동시에 은근히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침대에 누워, 월령안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노인이 부러웠다.
노 의원은 월령안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곧 노인은 외상을 입었을 뿐이고, 복부의 상처가 조금 깊어 피를 많이 흘렸다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다리와 손이 부러졌으니, 뼈를 이어야 한다고 했다.
“급소는 다치지 않았습니다. 잘 요양하기만 하면 됩니다.”
노 의원은 월령안이 걱정할까 봐 한마디 덧붙였다.
“낭자에게 좋은 약이 많잖습니까. 어르신의 몸 상태가 그다지 좋지는 않지만, 석 달 동안 잘 요양하면 괜찮아질 겁니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영감님께서 괜찮으실 줄 알고 있었어요.”
노 의원의 말을 듣고 나자, 월령안은 홀가분한 미소를 억지로 지어 보였다. 아까 주머니에 쓸어 담았던 약을 전부 도로 꺼냈다.
“노 의원, 여기에 약들이 있어요. 모두 약왕곡에서 가져온 것이니 쓸 만한 게 있는지 보세요.”
월령안은 수중의 약병을 노 의원에게 몽땅 안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