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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175)화 (175/1,004)

175화 너를 구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네놈은 정말이지…… 북요인들이 얼마나 역겨운지 제대로 보여 주는군.”

월령안은 혐오감을 그대로 드러내며, 손목을 가볍게 움직였다. 또다시 초승달 모양의 비도를 날리려는 듯했다.

야율제는 사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월령안이 움직이는 순간 훌쩍 날아오르며 날렵하게 피했다.

그러나 비도를 날리는 순간, 월령안은 갑자기 몸을 틀어 방향을 바꾸었다.

비도는 월씨 가문의 호원과 사투 중인 북요의 사사에게로 날아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사사의 가슴팍에 꽂혀 들어갔다.

월령안은 고개를 들었다. 야율제가 휘청거리며 착지해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모습을 보자, 기고만장하게 웃었다.

“봐라. 내가 말했지. 네 부하들에게는 날 죽일 능력이 없다고.”

“월령안, 죽으려고 발악하는구나. 그래, 네 몸에 암기가 도대체 얼마나 있는지 보자!”

야율제는 비도를 피하느라 아랫도리의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다. 얼굴빛이 백지장처럼 새햐앟게 질렸다. 식은땀을 비 오듯이 쏟았다.

월령안은 야율제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를 희미하게 들은 듯했다.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약왕 손불사가 말해 주었다. 남자의 가장 치명적인 곳은 가볍게 일격만 가해도 상대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나한테는 아직도 암기가 정말 많거든. 남원대왕이 한 번 시험해 보시든지요?”

월령안은 말하는 동시에 한쪽에 있는 사사에게 또 한 번 비도를 날렸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사사가 미리 방어하고 있어 빗나갔다.

월령안도 예상했던 대로였다. 암기라는 게 원래 상대방이 방어하지 않는 틈을 타서 날려야만 적중시킬 수 있다.

게다가 그녀의 실력도 보는 바와 같이, 그렇게 백발백중의 수준이 아니었다.

“어서, 빨리!”

야율제는 건방을 떨며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월령안은 말을 하고서 금방 후회했다.

‘아, 참. 이놈이 변태란 걸 왜 깜빡했지?’

“왜? 감히 못 하겠나?”

야율제가 한마디 재촉했다.

월령안은 대답하는 대신, 야율제를 뚫어져라 노려보기만 했다. 그가 손을 쓸까 두려워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주시하며 그가 손을 쓰지 않을 거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다음에야 슬그머니 곁눈질로 죽기 살기로 사사들에게 저항하는 호원들을 훑어보았다.

월씨 가문 호원들은 북요 사사들의 목숨을 건 공격을 전혀 막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역전승은 고사하고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지가 문제였다.

그나마 소육자 한 사람만이 겨우 버텨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혼자서 구원병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월령안은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꿈도 꾸지 마. 구원병은 오지 않을 테니까.”

야율제는 부상 때문에 크게 움직이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눈은 갈고리처럼 월령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는 입꼬리를 쳐들었다. 기고만장해서 득의양양해서 말했다.

“금군(禁軍)이고 관병이고, 오늘 저녁 무슨 소리를 듣든 월씨 저택에는 오지 않을 거다. 육장봉의 사람들은 지금 성 밖에서 내 근거지를 소탕하고 있을 테고, 수횡천은 잠한성한테 잡혀 있을 거거든. 너를 구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오늘이 곧 네 기일이 될 거다.”

“월 누님, 어서 도망가세요…….”

소육자는 사사와의 싸움에서 가까스로 몸을 뺐다. 당장 월령안을 호위하여 이곳을 떠나려 했다.

‘북요 사사 놈들은 완전히 미쳤어. 월 누님이 여기 남아 있으면 너무 위험해. 어서 누님을 데리고 이곳에서 빠져나가게 해.’

“가? 어디로? 조그마한 월씨 저택에 숨을 곳이라도 있나?”

야율제가 천천히 다가왔다. 걸음걸이는 느렸다. 걷는 자세도 조금 이상했지만, 보기 싫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형언할 수 없는 위험을 드러내고 있었다.

월령안은 묵묵히 뒤로 물러섰다.

“소육자, 난 상관하지 말아요. 먼저 자기 몸부터 챙겨요.”

노인이 이 소란을 듣기만 하면, 분명 달려올 것이다.

노인이 싸움에 뛰어들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감정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아니었다.

“꼬마야, 넌 저 여자를 지킬 수 없다.”

야율제는 월령안에게 다가가는 대신, 자신의 검을 주웠다. 그 와중에 사사에게 어서 소육자를 처리하라고 명령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사를 왜 사사라고 하겠는가. 명령에 따르기만, 할 뿐 스스로 판단할 줄 모르기 때문이었다.

야율제의 명령이 떨어지자, 사사들은 한 칼이면 당장 숨이 넘어갈 호원도, 자기 몸에 날아드는 칼도 상관하지 않았다. 몸을 돌려 소육자에게 칼을 휘둘렀다.

“이 개자식들!”

여러 명의 사사가 동시에 달려들자, 아무리 무예가 뛰어난 소육자라도 막아 낼 수가 없었다. 몸에 호신용 갑옷을 입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다른 호원들처럼 땅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갑옷은 가슴만 보호해 줄 뿐 온몸을 보호하지는 못했다. 얼마 되지 않아 소육자는 손, 어깨, 머리에까지 상처를 입었다.

피가 철철 흘렀다.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시선마저 가려졌다.

소육자는 휘청거리며 뒷걸음질 치다가 구석진 곳으로 몰렸다. 대충 얼굴을 훔치고 어떻게 이 상황에서 벗어날까 궁리하고 있을 때였다. 야율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갑옷이 온몸을 보호해 준다고 해도, 얼굴까지 보호해 줄 수 있겠느냐?”

불안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야율제가 주워 올린 검을 월령안에게 세차게 던졌다.

장검이 월령안의 얼굴을 노리고 거세고 날카롭게 날아갔다.

이 일격은 무예를 전혀 못 하는 월령안은 물론이고, 소육자도 피할 자신이 없었다.

“누님! 안 돼요!”

소육자는 당황해서 비명을 질렀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월령안에게로 달려들었다.

야율제의 검이 월령안에게 닿으려는 찰나였다.

바로 그 순간, 검은 그림자 하나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을 날려버렸다.

쿵!

검을 날려 버린 검은 그림자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착지했다.

월령안은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검은 그림자가 착지하고 나서야 정신을 다잡았다.

자신의 앞을 막고 나선 커다란 산 같은 노인이 보였다. 그녀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서럽다는 듯이 말했다.

“영감님, 드디어 오셨군요. 저 하마터면 여기서 꼴깍할 뻔한 거 알기나 하세요?”

“망할 계집애. 알아서 할 수 있다며?”

노인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월령안은 그가 지금 얼마나 언짢은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대꾸 한마디 못 하고 몸을 움츠렸다.

야율제가 이렇게 미친놈인 데다가, 수완이 완벽할 줄을 미처 몰랐다.

북요의 남원대왕이 소리 소문도 없이 사사를 거느리고 변경에 잠입했다. 게다가 그녀의 집까지 쳐들어왔다. 주나라 사람들의 체면이 완전히 구겨진 순간이었다.

그중에서도 야율제가 금군과 관병에게까지 손을 쓴 것 같다는 게 가장 불가사의했다.

늦은 밤에 그녀의 집에서 이처럼 오랫동안 소란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귀신조차 들여다보지 않았다. 정말이지 그 많은 돈을 주고 산 집이 전혀 돈값을 못 했다.

‘황제와 가까운 곳에 살수록 안전할 줄 알았더니…….’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는 다 똑같다.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다. 믿을 건 오직 자신뿐이었다.

“댁은 누구인가?”

야율제는 바퀴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가늘고 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자, 위험한 빛이 번뜩였다.

‘월씨 가문 사람들은 모조리 죽었던 게 아니던가? 어떻게 아직 이런 영감태기가 있지?’

“너 같은 놈은 내 이름을 알 자격이 없다.”

노인은 비록 바퀴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기세는 아주 당당했다. 야율제를 바라보는 눈빛이 음산하고 차가웠다.

“야율용광(耶律容光) 그 노친네가 어찌 너 같은 멍청이를 키워 냈단 말이냐?”

“내 부왕(父王)을 아는가?”

야율제는 앞으로 나가던 걸음을 멈췄다. 노인에 대한 경계심이 더 강해졌다.

“내 손에 패한 놈일 뿐이지.”

노인이 오만하게 말했다.

“하!”

야율제가 시건방지게 대꾸했다.

“주나라에서 내 부왕께 대적할 만한 자는 없다!”

노인은 하찮다는 듯이 비웃었다.

“미꾸라지국 먹고 용트림이나 하는 늙다리가 무슨.”

“내 부왕을 모욕하다니, 죽어라!”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 야율제는 노인에게 덮쳐들었다.

“하늘이 높을 줄 모르고 날뛰는 이 북요 개자식아, 오늘 내가 야율용광 그놈을 대신해 예의라는 게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마.”

노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두 손으로 바퀴 의자를 힘차게 내리쳤다. 바퀴 의자가 날아오르더니 야율제에게로 곧바로 날아갔다.

쾅!

두 사람은 허공에서 일격을 주고받았다. 노인의 바퀴 의자는 착지했다. 그러나 야율제는 몇 발짝 뒷걸음질하고 말았다.

단 한 번의 접전으로 야율제는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아챘다. 그는 가슴팍을 움켜잡았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달큼한 피비린내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도대체 정체가 뭐냐?”

“말했잖느냐. 넌 내 이름을 알 자격이 없다고.”

노인은 야율제에게 숨 고를 틈도 주지 않았다. 또다시 바퀴 의자를 움직여 앞으로 나갔다.

야율제는 노인을 감히 허투루 볼 수 없었다. 노인이 공격하는 순간, 즉시 맞받아쳤다. 모든 주의력을 노인과의 접전에 쏟느라, 전혀 한눈을 팔 수가 없었다.

월령안은 노인이 야율제와 접전을 벌이는 모습을 보았다.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일어서서 약병의 약 두 알을 쏟아내 입에 밀어 넣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서 소육자에게로 걸어갔다.

월씨 가문 호원들은 북요 사사들의 강력한 공세에 모두 땅에 쓰러져 싸울 힘이 전혀 남지 않았다. 오직 소육자 한 사람이 아직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북요의 사사들도 상황은 별반 좋지 않았다.

수십 명의 사사 가운데서 고작 여섯 명이 남았다. 게다가 모두 부상을 입었다.

지금 여섯 명이 소육자 한 명을 에워싸고 공격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 소육자가 혼자 힘으로 북요의 사사 여섯 명을 막아 내고 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방어선을 지켜, 월령안을 공격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월령안은 소육자도 한계에 달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녀가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기 전, 살그머니 수중의 암기를 발사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살상력이 강한 초승달 모양 비도가 아니었다. 반지에 감추어 두었던 빙주였다.

빙주는 살상력이 약했다. 하지만 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실수로 소육자에게 맞추더라도, 크게 다치지 않을 것이다.

월령안은 잽싸게 연속 다섯 알을 던졌다. 하지만 그중 사사에게 적중한 것은 세 알뿐이었다.

빙주에 맞은 사사는 동작을 잠깐 멈췄다. 소육자는 그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반격했다.

쉭!

소육자는 살인에 익숙해졌다. 조금 전까지의 당황과 두려움이 없었다. 검을 들어 사사를 베었다. 검이 떨어진 순간, 팔 하나가 잘려나갔다.

촤악!

뿜어져 나온 선혈이 소육자의 얼굴을 뒤덮었다.

소육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얼굴을 훔치고는 양손으로 검을 잡았다. 다른 한 사사가 움직이지 못하는 틈을 타 그자의 목을 쳤다.

소육자가 빙주에 맞은 사사 세 명을 해치우는 동안, 다른 사사 세 명은 기회를 틈타 몸을 뺐다. 그리고 월령안에게 덮쳐들며 칼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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