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오늘 밤이 최적의 시기야!
“알았어요, 월 누님.”
소육자도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웃는 얼굴로 월령안을 떠밀며 침소로 가서 쉬라고 했다.
“월 누님, 늦었으니 얼른 쉬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있는 한, 누구도 누님을 건드리지 못할 거예요. 마음 놓고 편히 쉬세요.”
월령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서 소육자의 힘에 밀려 뜰 안으로 들어섰다.
뜰 안으로 들어선 월령안 얼굴에는 홀가분한 기색이 사라졌다. 회랑에서 잠시 멈췄다가, 몸을 돌려 옆에 있는 안서재로 들어갔다.
뜰에 있는 안서재는 월씨 저택의 금지 구역이었다. 월령안을 제외하면, 아무도 출입할 수 없었다.
안서재 밖에는 열두 시진 내내 지키는 사람이 있었다. 밖에는 늘 청동 자물쇠를 걸고 있었다. 오직 월령안만 그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월령안은 안서재의 문을 열고, 서재 안의 불을 밝혔다. 책장으로 다가가 눈에 띄지 않는 모서리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책을 펼치고, 그 안에서 황동 열쇠를 꺼냈다.
그러고 나서 책상 앞으로 다가가, 그 위에 놓인 작은 상자가 열었다.
상자 안에는 장부가 몇 권 들어 있었다. 장부를 꺼내고, 손바닥을 상자 바닥에 댄 뒤 가볍게 눌렀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연꽃 모양의 돌이 책상 가운데에서 튀어나왔다.
상자에서 손을 빼고, 연꽃 모양 돌 앞으로 걸어갔다. 연꽃잎을 한참 자세히 보다가 조심스럽게 그중 하나를 떼어 냈다.
연꽃에는 꽃잎이 수십 개 붙어 있었다. 그중에서 단 하나만 떼어 낼 수 있었다. 만약 조작을 잘못하면, 서재 안의 장치들이 가차 없이 작동된다.
월령안은 떼어 낸 연꽃잎을 뒤에 있는 책장에 꽂았다.
철컥!
책장이 양쪽으로 서서히 움직이자, 책장 뒤에 숨겨진 문이 드러났다.
월령안은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벗었다. 그리고 목걸이 줄에 달린 장신구를 입구의 작은 구멍에 넣었다.
그러자 돌문이 열렸다.
돌문 안에는 겨우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비밀 통로가 있었다. 비밀 통로라고는 해도 벽에는 궁등(宮燈)이 달려, 사실 안쪽은 전혀 어둡지 않았다. 궁등에는 늘 불이 밝혀져 있어, 한 번도 꺼진 적이 없었다.
월령안은 비밀 통로를 따라 나아가 밀실에 도착했다. 밀실 벽에는 커다란 선반이 세 개 있었다. 선반 위에는 크기와 재질이 다른 상자가 있었다.
맨 오른쪽 선반으로 다가갔다. 겉옷을 벗고, 선반에서 구리로 만든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고 그 안에서 매미의 날개처럼 얇고 투명한 잠사(蠶絲) 연갑을 꺼냈다.
연갑을 몸에 걸쳤다. 또 나무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서 팔찌 두 개를 꺼내어 손목에 찼다.
다시 맞은편의 선반으로 걸어갔다. 그 선반에서는 비수를 꺼내어 종아리 바깥쪽에 동여맸다.
병기를 고르고 나자, 오른쪽 선반 옆으로 갔다. 선반의 상자를 열고, 약병을 여러 개 꺼내어 몸에 지녔다. 또 선반의 귀퉁이에서 옥으로 만든 상자를 꺼냈다.
옥 상자를 열자, 소름 끼치는 한기를 품은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안에는 투명한 빙주(冰珠)가 여러 줄 놓여 있었다.
월령안은 손에 낀 반지를 빼더니, 반지에 붙은 장식을 열었다. 그 안에서도 똑같은 한기가 피어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반지의 오목하게 팬 곳에 옥 상자에서 꺼낸 투명한 빙주를 꽉 차게 집어넣었다.
갑옷, 병기, 암기와 약까지 모두 골랐다.
월령안은 그제야 함들을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그리고 한쪽에 걸어 두었던 겉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막 두어 걸음 걸었을 때, 문득 밖에서 그녀를 지키는 소육자가 떠올랐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왼쪽 선반의 상자에서 구리로 만든 갑옷을 꺼냈다.
갑옷은 제법 무게가 나갔다. 왼쪽에는 심장을 보호할 수 있도록 동경(銅鏡)이 붙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아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갑옷을 가지고 나갔다.
월령안은 비밀 통로에서 서재로 돌아왔다. 서재의 장치를 원래대로 되돌린 뒤, 서재의 문을 잠갔다.
“여봐라!”
월령안은 서둘러 떠나지 않고, 입구에 서 있었다.
“예, 아가씨!”
어둠 속에서 등이 굽은 사람이 월령안 앞에 나타났다. 작은 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이 갑옷을 남 공자에게 가져다주어라. 그리고 어르신께도 오늘 밤은 조용하지 않을 거라 말씀드리거라. 만약 무슨 동정이 있어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해 드려라. 만약 정말로 감당이 안 되면 수가 없다면, 어르신을 찾아가겠다고도 말씀드려라.”
‘오늘 밤만은 오라버니가 저택에 없다. 만약 오라버니가 낮에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누가 진짜로 날 해치려고 한다면……. 오늘 밤이 최적의 시기야!’
월령안은 홀몸인 여성 부호였다. 몸값이 대단히 비싸지만, 전투력을 전혀 갖추고 있지 않았다.
물론, 수많은 사람이 어두운 곳에서 늘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가난에 찌든 수많은 자가 그녀를 납치해 몸값을 받아 내, 하룻밤 사이에 벼락부자가 될 기회를 노린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 어디서든 늘 몸에 호신용 암기를 지니고 다녔다. 위험이 닥쳤을 때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였다.
소육자의 말을 듣자, 완전히 무장해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래서 번거롭게 여기지 않고, 밀실로 들어가 자신을 무장했다. 침대에 누워서도 갑옷, 암기, 비수와 독약을 몸에서 떼지 않았다.
오늘 밤, 위험이 닥칠지 어떨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위험한 상황이 되면, 몸에 지닌 이것들로 이각(二刻 – 30분)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이 이각 동안, 지원군이 올 수도 있었다.
월령안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그녀는 긴장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다.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겁을 먹지도 않았다.
부자의 생활은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호화롭고 사치스러웠다. 그와 동시에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는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여러 해 동안, 그녀는 수시로 사람들의 표적이 되는 데 익숙해졌다. 시시때때로 그녀에게 손을 쓰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때마다 긴장하고 두려워했다면, 진작에 피가 말라 죽었을 것이다.
침대에 누운 월령안은 곧 잠이 들었다.
꿈결에 밖에서 격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번쩍 눈을 뜨자마자, 바로 침대에서 굴러 내려왔다. 당장 신발을 신고, 방 밖으로 나갔다.
방 밖에서는 하인들의 다급한 고함이 들렸다.
“큰일 났다. 강도가 쳐들어왔다!”
“서둘러! 얼른 호원을 불러.”
“아가씨를 보호해!”
“이 강도들은 보통이 아니야. 우리가 이길 수 없어…… 어서 관아에 신고해. 어서!”
“어르신은? 어르신 쪽에는 누가 있느냐? 어서 가서 살펴봐라.”
쾅!
월령안이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방문이 벌컥 열리며 검은 그림자가 불쑥 들어왔다. 그는 손에 든 장검으로 월령안을 찔렀다.
“월령안!”
챙!
장검이 월령안의 몸을 찔렀다. 그러나 그녀의 몸에 걸친 갑옷에 막혀, 검날은 조금도 뚫고 들어오지 못했다. 검날이 휘더니 다시 튕겨 나갔다.
“호신용 연갑? 준비를 철저히도 했군!”
“넌 웬 놈이냐?”
월령안은 가슴팍을 움켜쥐고 아픔에 신음을 흘렸다.
이 검으로 그녀의 목숨을 해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충격으로 가슴에 통증이 일었다. 그녀는 연신 뒤로 물러섰다.
월령안은 참지 못하고 낮은 소리로 욕을 퍼부었다.
“낮에 널 봤다.”
그의 말투는 경박했다. 손에 든 장검의 방향을 바꾸어 월령안의 손목을 향해 휘둘렀다.
“몸에는 연갑을 걸쳤지만, 손에도 있나?”
“미안하지만, 있어!”
월령안은 빠른 속도로 손을 들어 공격을 막았다.
챙!
또 한 번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검날이 월령안 손목의 철 팔찌에 떨어졌다.
연속 두 번이나 공격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화를 내지 않았다. 도리어 손목을 뒤집더니 손에서 힘을 뺐다. 검이 땅으로 떨어졌다.
검이 떨어지는 순간, 그는 허리를 숙이고 검을 낚아챘다. 그리고 월령안의 하반신을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월령안의 손목에서 나온 손가락만 한 초승달 모양의 검은 비도(飛刀)가 남자를 겨누고 날아갔다.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공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재빨리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바로 오른쪽으로 굴러서 날아오는 비도를 피했다.
월령안은 그 틈을 타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의 동작은 빨랐지만, 그의 행동도 느리지 않았다.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바닥에서 한 바퀴 뒹굴고 신속하게 일어났다. 월령안이 도망치려는 모습을 보더니 손에 든 검을 날렸다. 검은 슝,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가 문틀 위에 박혔다. 월령안의 앞길을 단단히 막아 버렸다.
“오늘 밤, 네 목숨은 내 것이다!”
검날이 월령안의 코끝을 스쳐 지났다. 월령안은 당장 발걸음을 멈추고 앞으로 기운 몸을 바로 세웠다. 그 덕분에 얼굴을 다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화를 냈다.
“북요는 가난뱅이인가? 당당한 남원대왕이 살수로 전락하신 모양이군!”
“수횡천이 말해 주었나?”
야율제가 앞으로 다가와 문틀에 박힌 검을 뽑았다.
‘아까 낮에, 역시 수횡천이 나를 알아챈 모양이군.’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월령안은 몸을 돌려 문을 등졌다.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야율제를 바라보았다.
‘야율제는 오자마자 날 죽이려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손을 쓰지 않는구나.’
손을 쓰지 않는다면, 흥정할 기회가 있다는 뜻이다.
흥정이 잘 안 되어도 괜찮았다. 적어도 시간을 조금이라도 끌 수가 있었다.
“네 목숨이다!”
말과는 달리, 야율제는 검을 거두었다. 다시 월령안에게 검을 들이대지 않았다.
월령안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
“내 목숨 말고는 다 된다.”
“그럼 널 가지면 되겠구나.”
야율제의 시선이 월령안을 거침없이 훑어보았다.
“너희 주나라 여인들은 순결을 잃으면, 그 남자를 하늘로 모신다지. 그 남자를 위해 희생하고 모든 것을 바친다면서. 오늘 밤 달빛이 참 아름답군. 월 낭자, 나와 좋은 밤을 보내지 않겠나?”
“내가 허락한들, 네가 감당할 수 있을까?”
월령안이 비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야율제는 손에 든 검으로 문밖을 가리켰다.
“밖에 나가서 한번 보라고. 밖의 사람들이 어떻게 죽었을까?”
야율제의 부하들이 담을 뛰어넘어 월씨 저택에 쳐들어왔지만, 바로 월씨 저택의 호위들에게 저지당했다. 양측은 밖에서 격렬하게 싸웠다.
방 안에 서 있는 월령안은 밖의 상황을 볼 수 없었다. 단지 점차 격렬해지는 싸움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날 지키기 위해 죽는 것은 그들의 영광이다!”
월령안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그녀는 야율제에게서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너희 주나라 여인들은 하나같이 연약하고 선량하지 않더냐? 보통은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자기가 수모를 당하고 치욕을 겪더라도 다른 사람의 안전을 지키려 들지 않나?”
야율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말하는 그들이……. 돼지가 아니고, 사람인 게 확실한가?”
월령안은 비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내가 고용했으니, 마땅히 날 보호해야 한다. 내가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 그들을 키웠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그들을 위해 희생하라니. 너희 북요인들은 모두 이렇게 멍청한가?”
“월령안, 네 말주변이 아무리 좋아도 네 목숨은 구하지 못한다. 네가 키운 호원들은 일반인을 상대할 수는 있어도, 내가 데려온 사사(死士)들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겠다. 내 여인이 된다면 널 살려 주겠다. 아니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