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유인책에 빠지다
육장봉은 육이를 데리고 신음산(神音山)에 도착했다.
어젯밤, 조계안이 신음산에서 잠한상과 야율제의 연합 공격에 다쳤다. 조계안의 무공이 뛰어나지 않았더라면, 어젯밤 바로 여기서 죽었을 것이다.
조계안이 알아낸 소식에 의하면, 신음산은 십중팔구 야율제가 성 밖에서 세운 거점이었다.
육장봉의 사람도 신음산을 조사해냈다. 그러나 조계안이 이곳을 조사한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자신의 수하들을 철수시켰다.
변경은 그의 세력 범위가 아니었다. 황제가 예전과 마찬가지로 그를 신뢰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는 황제에게 자기가 변경에 사람을 두었다는 사실을 여전히 알리고 싶지 않았다.
월령안의 일이 바로 그 교훈이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은, 제일 가깝고 믿는 형제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육장봉은 육일을 데리고 신음산으로 갔다. 그러나 그의 부장(副將)이 이미 병마를 이끌고 신음산으로 쳐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육장봉은 안색이 살짝 변했다. 재빨리 말에서 내려 산으로 뛰어갔다.
“산으로 간다!”
육일은 육장봉보다 조금 뒤처져 그를 바싹 뒤따랐다. 육장봉을 놓칠까 봐 한시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육장봉은 부장 하나가 신음산에 출정했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날 듯이 산으로 들어갔다. 육장봉에게 보고했던 부장은 어찌할 바를 몰라 그 자리에 아연하게 서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아직 우리 병력에는 아무 손실이 없는데, 신음산으로 돌격하시다니. 대장군께서는 왜 언짢아하시지?”
그의 옆 사람들도 의아한 얼굴로 하나같이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한 나이 든 부장이 탁, 하고 이마를 치며 외쳤다.
“아뿔싸! 계략에 빠졌구나!”
“계략이라고요? 하(何) 부장, 그게 무슨 소리요?”
다른 부장들은 그의 말을 듣고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그러게, 하 부장. 도대체 우리가 어쩌다 계략에 빠졌다는 말이오? 무슨 계략에 빠졌소?”
“생각해 보게. 오늘 밤, 우리 적수는 누구였나?”
하 부장이 무거운 얼굴로 물었다.
“남원대왕 야율제요.”
다른 몇몇 부장이 약속이나 한 듯 대답했다.
“야율제의 별명이 무엇이던가?”
하 부장이 또 물었다.
몇몇 부장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교활한 여우요!”
부장 하나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알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너무 쉬웠소. 오늘 밤, 우리는 너무 쉽게 이겼소. 야율제가 어떤 인물이요? 우리 장군과 적수가 될 만한 인물인데, 그만한 인물이 자기 근거지를 그렇게 쉽게 소탕하게 내버려 두었겠소?”
“아뿔싸! 진(秦) 부장이 매복에 당했을지도 몰라! 어서 병력을 동원해 산에 들어가 지원하세.”
육장봉에게 좋은 소식을 ‘보고’한 부장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당장 병사를 소집하러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움직이자마자, 하 부장이 붙잡았다.
“늦었네! 장군께서 이미 가셨네!”
나머지 부장들은 이 말을 듣자, 다들 침묵을 지켰다.
* * *
육장봉과 육일은 대군이 남긴 흔적을 따라, 가장 빠른 속도로 산에 올랐다.
산에 오르자, 땅바닥에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중에 아군은 없었다.
육장봉은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그러나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대장군!”
“대장군!”
길가에 있던 병사들이 육장봉에게 예를 올렸다. 다들 기쁜 표정에 뿌듯함이 가득했다.
육장봉은 그들을 훑어보며 지나갔다. 그들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쑥 내밀고, 그의 칭찬을 기다렸다.
그러나 육장봉은 그들을 칭찬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이 더 굳어졌다.
그는 원래 이게 야율제의 유인책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부하를 유인해서 죽이려는 목적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 보니, 야율제가 목적은 따로 있었다. 그것도 큰 것을 노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대장군.”
병사를 지휘하던 진 부장은 부하의 보고를 받고 육장봉이 온 것을 알고, 다급히 뛰어왔다.
그도 기쁜 얼굴이었다. 말투에는 감출 수 없는 의기양양함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장군을 부른 순간, 육장봉의 굳을 얼굴을 보고 말았다. 저도 몰게 긴장이 되어,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대장군, 무,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너희가 신음산을 차지하는 데 얼마나 걸렸느냐?”
은빛 연갑을 입은 육장봉은 횃불 아래에서 더욱 눈에 띄었다. 또 이상할 정도로 싸늘했다.
진 부장은 긴장감이 들었다.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자랑스러움을 억누르고, 조심스럽게 답했다.
“대장군, 한 시진이었습니다.”
‘역시 당했구나.’
육장봉은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챘다. 그래도 한마디 더 물었다.
“야율제의 종적을 발견했느냐?”
“제가 지금 야율제의 행방을 찾고 있었습니다.”
오늘 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그들이 산에 오른 뒤 지금까지도 야율제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적을 너무 빨리 해치운 탓에, 산 증인을 하나도 확보하지 못했다.
“찾을 필요 없다. 철수하라!”
신음산이 야율제의 거점이 확실한지, 육장봉은 아직 단정을 지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야율제가 그들의 행동을 알아채고 미리 떠났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쓸모가 있는 사람들은 전부 데리고 떠났다. 신음산에 남겨진 이들은 전부 버리는 패였을 뿐이다.
야율제가 그들의 계획을 미리 안 것이 분명했다.
“대장군?”
진 부장은 의아한 눈빛으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찾지 않아도 됩니까?”
“찾기는 뭘 찾느냐?”
육장봉은 코웃음을 쳤다.
“야율제가 정성 들여 키운 고수들이 너희 손에 쉽게 죽을 리가 있겠느냐?”
육장봉은 말을 마치더니, 옷소매를 떨치면서 돌아서서 가 버렸다. 육일은 뒤따르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진 부장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얼굴색이 이미 창백해져 있었다.
‘이런, 속임수에 당했구나!’
야율제는 버린 사람들로 그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그사이 자신은 쓸 만한 수하들만 데리고 도망쳤다.
만약 정말 도망친 것이라면 그나마 괜찮았다. 그러나 그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가서 무슨 일을 벌였다면, 그들이 막으려고 해도 이미 늦었다.
“이런!”
진 부장은 영문을 알자, 더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당장 수하들을 거느리고 신음산에서 철수했다.
* * *
육장봉은 야율제의 목표가 그가 거느린 병력이 아님을 확정했다. 당장 육일을 데리고 최대한 빨리 청희 별장으로 돌아갔다.
쾅!
육장봉은 정문으로 들어갔다. 그는 시위가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말이 서기도 전에 말 등에서 훌쩍 뛰어내려 문 어귀에 떨어졌다. 바로 발을 들어 올리는가 싶더니 문짝을 날려버렸다.
별장 안의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일제히 문 입구를 바라보았다.
대문 두 짝의 파편이 잠한성과 수횡천을 향해 날아갔다. 한데 얽혀 싸우던 둘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육장봉?”
“육 대장군?”
잠한성과 수횡천은 싸움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육장봉을 바라보며, 의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둘은 수백 초를 겨뤘지만, 아직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둘 다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특히 수횡천의 외상이 더욱 심했다. 팔에 난 검에 베인 상처에서는 피가 끊임없이 솟구치고 있었다.
“야율제는 어디 있나?”
육장봉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몸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온몸에서는 사람을 짓누르는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뭐라고?”
잠한성은 잠시 멍해졌다.
“야율제가 신음산에 없었다. 어디로 갔나? 그놈의 수하들은? 모두 어디 갔지?”
오늘 밤 그의 작전은 신속하고도 은밀했다. 야율제가 미리 도망친 것은 그렇다 해도, 수하들까지 데리고 갔다. 누군가 미리 정보를 흘린 게 틀림없었다.
야율제와 청희 대장공주 사이에는 그들이 모르는 연락 방식이 있었을 것이다.
“사람을 데리고 갔다고?”
잠한성의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놀랐는지 잇달아 뒷걸음질을 쳤다.
“설마 월령안에게 손을 썼나? 아니, 아니야……. 월령안에게 손대지 않겠다고 나와 약속했어.”
“령안이라고?”
수횡천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알겠군. 낮에 명월산장에서 우리를 지켜본 사람이 혹시 선배와 야율제였습니까?”
수횡천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 바로 고개를 돌려 밖으로 뛰쳐나갔다.
“육장봉, 서두르시오! 령안, 야율제의 목표는 령안이오. 우리가 어서……!”
수횡천이 막 두어 걸음 뛰어나갔을 때였다. 육장봉이 활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슉, 하고 끝없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자시(子時), 월씨 저택.
월령안은 수횡천을 배웅하고, 돌아가서 잠자리에 들려고 했다. 소육자는 그녀를 거처 밖까지 데려다주었다.
“월 누님, 편히 쉬세요. 제가 밖에서 지켜 드릴게요.”
그녀를 뜰 밖까지 데려다 준 뒤에도 소육자는 떠나지 않았다. 대신 검을 안고 뜰 밖에 서 있었다. 이상하게 흥분이 됐다.
‘오늘부터 나는 스스로 돈을 벌어서 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남소육이야!’
그는 칠월이 아주 기대됐다. 월 누님을 청주까지 호송해 준 뒤, 그녀가 선물한 말을 타고 문파로 돌아가게 되리라.
사형, 사저(師姐 – 한 스승에게서 배운 여자 선배)들이 얼마나 부러워하고, 질투할지 상상이 갔다.
생각만으로도 설렜다. 꿈에서조차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왜 바보처럼 웃고 그래요?”
월령안은 한참 말을 하는데도 소육자가 대답을 하지 않길래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소육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검을 안은 채 히죽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소육자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소육자, 정신 차려요!”
“네?”
소육자는 기민했다. 허겁지겁 얼굴의 웃음을 지웠다.
“월 누님, 저 부르셨어요?”
“얼른 가서 자라고 했잖아요. 여기서는 굳이 지킬 필요가 없어요. 한밤에, 그것도 수도에서 무슨 위험이 있겠어요.”
그녀의 저택에는 호원들이 당직을 서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상인이라도, 소육자 같은 어린애를 착취할 수는 없었다.
“안 됩니다!”
소육자는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
“제가 월 누님에게 고용됐으니, 월 누님을 잘 보호해 드려야죠. 오늘부터, 바로 지금부터요.”
“집 밖으로 나갈 때 조금 신경 써 주면 돼요. 집에서는 이렇게 긴장할 필요가 없어요.”
월령안은 웃으면서 말렸다.
‘소육자는 어린아이인데 날마다 나를 지키느라 밤늦게까지 잠을 못 자면 어떡하지? 소육자가 잘 자지 못해서, 키가 안 자라면 어떡하지?’
그랬다가는 자책감이 들 것 같았다.
소육자는 고개를 저었다.
“월 누님, 오늘 밤은 안 됩니다! 오늘 밤은 꼭 지켜야 해요. 맹주께서 떠나시기 전에 신신당부하셨어요. 오늘 밤, 조용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제가 꼭 누님을 잘 지키라고요. 한 발짝도 떨어지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맹주가 이 말을 할 때, 표정은 유난히 엄숙했고, 말투도 무척 엄격했다. 소육자도 아주 오랜만에 보는 맹주의 엄숙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월 누님이 보수를 땡전 한 푼 주지 않는다고 해도, 맹주의 명령대로 월 누님을 지켜야 했다.
“수 오라버니가 그렇게 말씀하셨다고요?”
월령안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혹시 낮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소육자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난처한 기색으로 말했다.
“저는 몰라요. 하지만 맹주께서…… 우리가 성 밖에 있을 때, 누군가 지켜보는 것 같았대요. 하지만 저는 느끼지 못했어요.”
맹주에 비하자면, 아직 그의 실력은 많이 부족했다.
“그럼 오늘 밤, 수고해 주세요. 제가 하인에게 의자를 가져다주라고 할게요. 밖에 앉아 있어요.”
월령안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인생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억울하게 죽기에는 아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