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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171)화 (171/1,004)

171화 손에 들린 바둑돌

쉭!

여러 대의 화살이 육장봉에게 날아왔다. 하지만 그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육일이 나서려는 순간, 수횡천이 더 빠르게 손을 뻗었다. 육장봉에게 날아오던 화살을 부러뜨렸다.

“잠 선배, 선배는 육 대장군의 적수가 못 됩니다.”

잠한성은 모든 것을 가지고 싶어 하고 아무것도 버리지 못했다. 그런 약점투성이 남자는 피도 눈물도 없는 남자를 이길 수 없다.

“내가 강호를 휩쓸고 다닐 때, 저 육장봉은 어디에 있었느냐! 저놈에게는 아직 내 목숨을 가져갈 능력이 없다.”

잠한성은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감에 걸맞은 능력이 있기도 했다.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누구도 그의 목숨을 앗아갈 수는 없었다.

“난 그럴 수 있소.”

육장봉이 조소를 날렸다.

“잠 맹주, 청희 장공주를 생각해 보시오!”

잠한성은 순간 멈칫했다. 그 바람에 날아오는 화살에 맞을 뻔했다. 바로 화살을 피하고, 살기가 넘실대는 눈빛으로 물었다.

“육장봉, 혹시 청희한테 무슨 짓을 했나? 그래서 내가 마지막으로 청희의 모습을 못 보게 막는 건가?”

육장봉은 비웃는 시선으로 잠한성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려 수횡천에게 말했다.

“수 맹주, 지금이야말로 자네가 원하던 공평한 순간이네!”

“…….”

수횡천은 잠 선배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육장봉은 정말 비겁했다.

“시작하게, 수 맹주!”

육장봉은 눈을 감고 덤덤하게 재촉했다.

육이가 손을 들자, 궁수들이 당장 멈췄다.

빗발치는 화살이 사라지자, 잠한성은 숨을 고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제자리에 서자마자 수횡천이 말했다.

“잠 선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수횡천, 정말로 조정의 개가 되겠다는 것이냐?”

잠한성은 실망스럽고 비통한 마음으로 수횡천을 바라보았다.

육장봉의 강요보다 수횡천의 ‘배신’이 더욱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잠 선배, 육 대장군의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어제의 그 사람이 누구였던, 선배는 그 사람을 다치게 할 자격이 없습니다. 더구나 그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이유가 북요인을 위해서라면요. 잠 선배, 선배는 시비 구분을 못 하는 분이 아닙니다. 분명 알고 계실 겁니다.

북요 남원대왕 야율제가 계략을 동원해 죽이려는 사람이라면, 주나라에게는 중요한 사람이지만 북요에게는 제거해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요. 어제 선배가 한 행위는 나라를 배반한 것과 같습니다.”

이는 그가 잠한성을 처단하라는 육장봉의 말을 승낙한 이유이기도 했다.

‘잠 선배는 야율제를 위해 조왕을 공격했다. 조정에서 이 일을 조용히 넘기려고 잠 선배의 잘못을 추궁하지 않고 법망을 벗어나게 내버려 둔다면, 조정의 체면은 무엇이 되겠는가? 앞으로 무공이 강한 자라면 누구라도 황실의 사람을 해치지 않겠는가?’

“난 그 사람이 조왕인 줄 몰랐다. 난 그저 야율제를 도와 개인적인 원한을 해결했을 뿐이야. 두 나라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잠한성은 애써 해명을 하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북요 남원대왕과 우리 주나라 사람의 개인적인 원한도 나랏일입니다. 그 사람이 조왕이 아니라 천목신교 교주였다 해도, 선배와 북요인이 손을 잡고 그자를 해칠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수횡천은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잠한성이 총명한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오늘 만나보니 너무 실망스러웠다.

잠한성은 지금도 문제를 회피하고 있었다. 아직도 더 많은 것을 바치고, 희생한 쪽이 자신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사랑 때문에, 무림의 여러 문파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모르고 있었다.

자는 척하는 사람은 누구도 깨울 수 없다.

수횡천은 잠 선배가 모르는 게 아니라 회피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는 스스로를 속이고, 현실을 마주하려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해야만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바치고, 강호의 여러 문파에서 온갖 서러움을 겪고도 인내하는 무림 대협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수횡천과 무관했다.

실제로 잠한성을 만나서, 거듭되는 ‘억울하다’라는 변명을 들은 수횡천은 더는 그를 동정할 수 없었다. 다만 그러는 잠한성이 우스웠다.

사내대장부가 일을 저질러 놓고는 감당하지도 못하고, 질질 끌면서 전혀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그는 무림맹주로서의 자격이 전혀 없었다. 무림 문파들의 존경을 받을 자격도 없었다.

수횡천은 잠한성과 말을 섞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앞으로 다가가 잠한성에게 포권했다.

“잠 선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말을 마친 수횡천은 훌쩍 뛰어오르며 잠한성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퍽!

주먹이 잠한성의 가슴팍에 세게 내리꽂혔다. 소리만 듣고도 수횡천의 주먹에 힘이 가득 실렸음을 알 수 있었다.

육장봉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한성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많이 한 보람이 있군.’

잠한성이 신음을 울렸다. 그 주먹을 그대로 맞은 것이다. 피하지도, 반격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받아 냈을 뿐이다.

“이 주먹은 내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것이다. 난 죽음이 두렵지 않다. 만약 내 죽음과 무림의 평화를 바꿀 수만 있다면, 난 백 번이라도 죽을 수 있다. 하지만…….”

잠한성은 서글픈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 평생 유일하게 내려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청희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청희를 한 번 더 보고 싶다. 무사하다는 것만 확인하고 싶어……. 수 맹주, 미안하네.”

수횡천은 지긋지긋해졌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십시오. 잠 선배, 시작하시지요!”

역시 그에게는 아무런 기대도 걸지 말았어야 했다.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우유부단했다.

이런 사람은 무림맹주가 되지 말았어야 했다. 더더욱이 무공을 익히지도 말았어야 했다. 그 무공으로 사람을 해칠 힘을 얻었으니.

그는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 풍류가가 돼야 했었다.

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잠한성이 등 뒤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검을 감싸고 있던 낡은 천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었다.

잠한성을 감싸고 있던 기세도 변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평온함과 인내는 순식간에 강한 살기로 바뀌었다. 그는 수횡천에게 검을 휘둘렀다.

“수 맹주, 미안하게 됐군!”

수횡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재빨리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단검을 가로 잡고, 잠한성의 살기등등한 검을 막아 냈다.

챙!

소리와 함께 장검의 칼끝이 단검의 칼날에 박혔다. 잠한성은 비틀거리더니 칼날에 박힌 칼끝을 수횡천의 복부쪽으로 밀었다.

카캉!

칼끝과 칼날이 맞부딪히며 불꽃이 번쩍번쩍 일었다. 그와 동시에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육장봉과 열두 명의 친위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특히 친위대는 눈도 깜짝이지 않았다.

그들의 장군이 오늘 밤, 그들의 임무는 바로 견학이라고 했다.

강호의 신세대 고수와 옛 고수의 전투를 살펴보고 배우라고 했다. 또 그들과 강호의 일류 고수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구분하라고도 했다.

‘그렇군. 차이점이 있어!’

전장에서라면 그들 친위대의 실력은 가장 강했다. 가는 곳마다 적을 쓰러뜨려, 대적할 상대가 없었다.

하지만 그곳은 변방에 있는 전장이었다.

지금, 변방에서 돌아온 그들이 맞이할 전장은 강호였다,

강호의 고수들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보지 못했다.

그리고 강호의 고수들 간의 겨룸은, 전장에서 머릿수로 싸우는 것과 달랐다.

오늘 밤 수 맹주와 잠한성이 치르는 결투는, 육 장군이 잘 보고 배우라고 특별히 준비한 자리였다.

“강하고 날카로우면서도, 과감하게 실력을 드러내는군요. 강호에서 단검을 이토록 잘 쓰는 사람이 나타난 건 오랜만입니다. 수횡천이 확실히 비범한 구석이 있었군요. 과연 무림맹주가 될 만한 실력입니다.”

열두 명의 친위대는 견학 중이었다. 육장봉도 수횡천의 실력을 관찰하고 있었다.

수횡천은 원칙적인 문제 앞에서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또 입장도 확고했다. 조정에 대해서도 꽤 호의적이었다. 황제도 그를 만족스럽게 여겼다.

이변이 없다면, 월령안이 조정과 수횡천을 협력 관계로 이어 준 뒤에는 조정도 수횡천을 아낌없이 지지할 것이다. 수횡천이 더욱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밀어주고, 그의 힘을 빌려 강호를 장악하려는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강호에서는 그래도 주먹으로 말을 해야 했다. 잠한성이 이토록 어리석어도, 강호에서는 아직도 그의 지지자가 넘쳐났다. 인간적 매력이 아닌, 강한 무공 때문이었다.

협력자인 수횡천의 실력이 강할수록 그들에게는 유리했다.

수횡천도 육장봉을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 나는 듯한 속도로 잠한성과 수십 초를 겨뤘음에도 전혀 힘겨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싸울수록 더 용맹해졌다. 은근히 수세를 공세로 전환하려는 기미도 보였다.

다시 잠한성을 보았다.

전투 기교와 공력은 수횡천보다 한 수 위였다.

그러나 잠한성도 이제는 늙었다.

수횡천에 비하면 그가 더 침착했다. 하지만 날카로움과 돌격하는 힘이 부족했다. 초식도 깔끔하지 못했다. 분명 한 초면 궁지로 몰아붙일 수 있었는데도, 결정적인 순간에 공격을 거두었다. 그 광경에 보는 쪽이 지쳐 왔다.

이는 잠한성의 성격 때문이었다.

거의 백 초를 겨루었다. 잠한성과 수횡천의 싸움은 점점 더 격렬해졌다.

싸움이 여기까지 오자, 둘 다 더는 실력을 감출 수 없었다. 잠한성도 아까처럼 소극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마음껏 손발을 휘둘렀다. 그는 계속해서 몰아붙였고, 수횡천은 계속해서 밀려났다.

물론, 수횡천도 약하지 않았다.

잠한성의 연속된 공격에 수횡천의 반격도 점차 빛나기 시작했다. 잠재된 능력이 억지로 끌어내진 듯, 실력이 끊임없이 강해졌다.

장검과 단검이 계속해서 부딪혔다. 섬광이 번뜩이고, 불꽃이 튀었다.

싸움이 지금에 이르자, 전투는 그들이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이 쓰는 초식도 거두고 싶다고 거둘 수는 없었다.

이 순간, 잠한성이든, 수횡천이든 더는 망설이지 않고, 평생 배운 절학(絶學)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친위대원들은 멋진 장면을 하나라도 놓칠까 봐 눈을 깜빡이기도 아쉬웠다.

하지만 육장봉은 시선을 거두고 무심하게 말했다.

“하나는 예리하고 진취적이며, 다른 하나는 저무는 영웅이구나. 이번은 수횡천이 이겼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고, 신세대가 구세대의 자리를 차지한다.

강호를 드디어 재정비할 때가 왔다.

육장봉이 일어서자, 육일 등은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장군?”

“육일은 나를 따르고, 너희는 계속 지켜봐라.”

강호 절정 고수들의 접전은 백 년에 한 번 보기도 힘든 귀한 볼거리였다.

이는 좋은 기회였다. 그에게는 필요가 없었지만, 육이를 비롯한 친위대에게는 필요했다.

“예, 장군!”

육일이 앞으로 나왔다. 육장봉의 뒤를 따라 별장 밖으로 걸어갔다.

잠한성과 수횡천은 한창 격렬하게 겨루고 있었다. 둘은 전투에 온 정신을 몰두하고 있어, 육장봉이 떠나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물론, 알아챘어도 막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 밤의 모든 것, 즉 잠한성이든, 수횡천이든 전부 육장봉의 손에 들린 바둑돌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건 말건, 결국 육장봉의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육 대장군은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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