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170)화 (170/1,004)

170화 몰랐다고 하면 무죄인가?

잠한성은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지금이 아직도 이십 년 전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지금의 강호가 이십 년 전처럼, 잠한성 한 사람 말에 모두가 따르던 그때의 강호인 줄 아는 건가?’

강호에서 잠한성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

지금의 강호는 수횡천의 것이다.

그러나 잠한성은 코웃음을 치고 오만하게 말했다.

“나는 조왕을 다치게 한 적이 없소.”

육장봉이 추궁했다.

“북요인인 야율제가 왜 천목신교 교주를 죽이겠다고 했는지 알려 주시오.”

오늘 그가 죽이지 않더라도, 잠한성의 어리석음으로는 언젠가 야율제에게 농락당해 죽게 될 것이다.

잠한성은 잠시 멈칫하다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사적인 은원이오. 내가 그쪽에게 알려 줄 필요는 없지.”

“잠 맹주는 천목신교의 교주를 본 적이 있소?”

육장봉이 재차 물었다.

“천목신교 교주 남상권은 무공이 출중하고, 검은 옷차림에 가면을 쓰고 있지. 강호에서 누가 모른단 말이오?”

물론, 그는 남상권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남상권을 죽이는 건 얼굴을 몰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누가 당신에게 무공이 출중하고, 가면을 쓴 검은 옷차림의 사람이 바로 천목신교 교주라고 했소?”

잠한성은 그 특징 하나만 가지고 공격했다. 이번만큼은 조계안도 정말 억울하게 당한 셈이었다.

“그럼 강호에서 남상권 말고도 다른 자가 감히 이런 차림새로 다닌단 말인가?”

잠한성이 되물었다.

“그래, 그런 자가 있네. 잠 맹주가 해친 사람이 바로 조왕이네!”

조계안은 강호인이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소!”

잠한성은 근거도 없이 부인했다.

그는 인정할 수 없었다.

당시 선황은 조정의 고수들을 보내 그를 죽이려 했다. 그가 실수로 현음 공주를 다치게 했기 때문이었다.

고작 공주 하나가 다쳤을 뿐인데, 조정의 끈질긴 추격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조왕을 다치게 했으니 지금의 황제도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난 그쪽을 속일 필요가 없네.”

육장봉은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뒤에 서 있던 수횡천이 모습을 드러내게 했다.

“수 맹주, 자네가 말해야 잠 맹주가 믿을 것 같군.”

“수횡천?”

잠한성은 수횡천을 본 순간, 잠시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수횡천은 존재감이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잠한성은 별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지금까지 수횡천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잠 선배.”

수횡천은 앞으로 나아가 잠한성에게 포권했다.

“자네가 여기 어쩐 일로?”

잠한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육 대장군이 강호의 일을 매듭짓는다고 오라고 했습니다.”

수횡천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강호의 일? 나 말인가?”

잠한성은 그제야 깨달았다.

육장봉은 이번에 그의 목숨만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바로 수횡천의 손에 죽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그가 수횡천의 손에 죽는다면, 조정의 손에 죽은 게 아니니 강호인들도 할 말이 없게 된다.

“네.”

수횡천이 대답했다. 그의 눈빛은 아무 감정이 없이 무덤덤해 보였다.

‘잠 선배는 여전히 그대로군. 여인 하나에 평생을 그르친 그 잠 선배 그대로야.’

“허, 조금 전에는 내가 조왕을 다치게 했다더니, 이제는 또 강호의 일을 매듭지으라고. 육 대장군, 그쪽도 변덕이 너무 심하군!”

잠한성도 내심 육장봉의 말이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그가 어제 다치게 한 사람은 천목신교 교주가 아니라, 주나라의 조왕이 확실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수횡천도 조정을 위해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횡천과 잠한성이 말을 나누는 사이, 육장봉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가볍게 말했다.

“습격자는 강호인이니, 난 수 맹주의 뜻을 존중하네. 그러니 수 맹주가 직접 처단하게.”

“처단이라고?”

잠한성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그럼…… 내 목숨을 원하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

육장봉은 손을 뻗더니 수횡천 앞에서 휙휙 흔들었다.

“강호에는 무림맹주가 두 명씩이나 필요 없네. 잠 맹주, 수 맹주, 오늘 두 사람 중 한 명만 살 수 있소!”

누가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잠한성을 죽인 수횡천은 조정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수횡천을 죽인 잠한성도 강호에서 자리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둘이 무슨 선택을 하던, 결국에는 조정이 이익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 무림인끼리 서로 죽이라는 소리인가?”

잠한성은 순간, 육장봉의 음흉한 속셈을 눈치챘다.

물론, 육장봉이 전혀 감추지 않은 탓도 있었다.

“강호의 일은 강호에서 매듭을 지어야지.”

육장봉은 입가를 살짝 올리며 가볍게 웃었다.

“이놈이!”

잠한성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우리 황제 폐하의 친아우를 다치게 했으니 잠 맹주는 오늘 그 대가를 치러야 하오. 이 점은 잠 맹주도 이십 년 전에 깨달았을 텐데?”

육장봉은 손을 들어 시위가 대문을 닫도록 명령했다.

뒤에 있던 대문이 천천히 닫혔다. 잠한성의 안색도 점차 어두워졌다.

“잠 맹주, 이십 년 전 온 무림이 당신 때문에 대가를 치렀소. 지금, 무림맹은 당신의 것이 아니오. 무림의 문파들도 더는 당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지. 아쉽지만, 잠 맹주가 직접 대가를 치러야겠소!”

육장봉은 진심으로 잠한성을 조금이나마 동정했다.

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하다니. 잠한성의 일생도 참 웃음거리 같았다.

“난 그자가 조왕인 줄 몰랐다!”

잠한성은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마음속에는 표현하기 힘든 슬픔이 슬그머니 들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 옛날 대전 밖에서의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선황의 앞에서 현음 공주를 다치게 하지 않았다고 해명했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그가 공격한 외족(外族) 요녀(妖女)가 현음 공주였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설마하니 그 사람이 현음 공주인 줄은 정말 몰랐었다.

“몰랐다고 해서 사람을 해칠 이유가 되지는 않소. 어제 당신이 공격한 한 자가 조왕이 아니라 정말 천목신교 교주인들 어쩌겠는가? 자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아시오? 당신이 그자의 생사를 결정할 자격이 있소? 그자가 당신을 이기지 못한다고, 당신 손에 다쳐도 그만, 죽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나?”

육장봉은 가차 없이 질책했다.

이게 그가 강호인을 싫어하는 이유였다.

조금이라도 의견이 맞지 않으면 손을 쓰고, 조금이라도 내키지 않으면 사람을 죽였다. 하나같이 법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무공만 믿고 사람을 해쳤다. 무고한 사람을 다치게 하고 ‘난 모르오’라는 한마디로 일관하며 발을 빼려 한다.

‘몰랐다고 하면 무죄인가? 잠한성은 이 세상 사람이 전부 자기 부모인 줄 아나? 무슨 잘못을 저지르든 모두가 이해하고 봐줘야 하나?’

육장봉이 연이어 쏘아붙이며 추궁했다. 잠한성의 안색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창백해졌다. 비틀거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나는…….”

하지만 육장봉은 잠한성이 뭐라고 하는지에 관심이 없었다. 잠한성의 정신이 무너진 것을 보자, 가볍게 말했다.

“수 맹주, 손을 쓸 때가 되었네!”

수횡천은 경악한 표정으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당신…… 일부러 이랬군?”

‘일부러 말로 잠 선배의 심리적 경계선을 무너뜨렸군.’

육장봉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런 의도가 없었다면, 아무리 시간이 남아돌아도 잠한성에게 이렇게 많은 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이건 공평하지 않아!”

수횡천은 분노에 차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나는 잠 선배와 공정하게 겨루고 싶네!”

이는 무술을 연마하는 사람의 자부심과 의지였다.

“나는 잠한성의 목숨을 원할 뿐이다.”

전장에서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은 본디 전술의 일종이다. 육장봉은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횡천에게 강요하지는 않고, 이렇게만 말했다.

“싫으면 손을 쓰지 않아도 되네. 하지만 그 대가를 치를 수는 있겠나?”

“무슨 대가?”

수횡천은 마음속의 울화를 누르며 물었다.

육장봉은 아무런 감정의 기복이 없는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자네가 지금 행동하지 않는다면 나는 반드시 무림을 피로 물들일 걸세. 앞으로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한 번의 노고로 영원한 평화를 얻을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거네.”

수횡천을 협박하는 게 아니라, 알려 주는 것이었다. 금방 북요와 싸워 이긴 지금의 조정은 이렇게 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무림의 각 문파에는 고수가 아주 많았다. 그래서 조정에서도 상당히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들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수십만 대군의 포위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황제는 어진 사람이었지만, 일의 경중은 확실히 구분했다.

당시 황제는 북요와 전쟁을 치를 심산이었다. 그래서 잠한성에 대한 불만을 내려놓고, 무림인들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다.

지금, 무림인들은 이 평화를 깰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주나라 내부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황제는 봐주지 않을 것이다.

“수횡천에게 시킬 필요 없네. 내가 죽음으로 죄를 씻으면 그만 아닌가.”

육장봉의 말을 들은 잠한성은 침통한 얼굴을 했다.

여태까지 그는 줄곧 신분을 속이고, 강호의 일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강호 여러 문파의 처지는 잘 알고 있었다. 또 육장봉의 실력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육장봉이 무림을 피로 물들일 능력이 있음을 분명히 알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양쪽이 모두 크게 다치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는 굳이 시험해 보고 싶지 않았다.

“좋아. 그럼 지금 바로 자결하시오!”

육장봉은 종아리 옆에서 비수를 뽑더니 잠한성의 면전에 던졌다. 그에게 물러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

잠한성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땅에 떨어진 비수를 줍지는 않았다. 대신 육장봉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죽기 전에 청희를 한 번만 보고 싶소. 청희가…….”

“잠 맹주는 나와 흥정할 자격이 없소.”

육장봉이 비웃으며 잠한성의 말을 가로챘다.

“육장봉, 나는 한 말은 지키는 사람이네. 난 단지 청희를 멀리서 한 번만 보고 싶네. 청희가 무사한 것만 확인하면, 바로 자결하겠네.”

잠한성이 정중하게 말했다.

“나와 흥정을 하려 드나? 당신은…… 아직도 자신이 무림맹주라고 생각하시오?”

‘청희 장공주를 보고 나서야 자결하겠다니. 잠한성도 협박할 사람을 잘못 골랐군.’

육장봉은 냉소를 지으며 수횡천을 바라보았다.

“수 맹주, 정말 손을 쓰지 않겠나?”

“나는 공평한 상황에서 대결하기를 원하네.”

수횡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의 의사는 확고했다.

“그럼…… 나도 더는 봐주지 않겠네.”

육장봉은 수횡천을 힐끔 보고는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의 선택을 존중했다. 그들이 결과를 감당할 수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육장봉이 손을 들고 명령을 내렸다.

“쏴라!”

슉! 슉! 슉!

육장봉의 명령에 따라, 별장의 담장 꼭대기에서 궁수들이 두 줄로 줄을 지어 나타났다. 그들은 진작에 준비를 마친 듯했다. 육장봉이 명령하자마자, 날카로운 화살들이 잠한성에게로 빗발쳤다.

“육장봉, 난 네놈이 정정당당한 인물인 줄 알았다. 이토록 비겁할 줄은 몰랐구나.”

잠한성은 몸을 빙글 돌리자, 몸에 걸친 옷자락이 움직임에 따라 나부꼈다. 기가 그의 몸 주변을 감싸면서 보호막을 형성했다.

화살들은 그의 옷에 닿지도 못하고 바닥으로 후두두 떨어졌다. 그에게는 조금도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맞소.”

육장봉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잠한성의 평가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게 뻔했다.

잠한성이 맨손으로 화살을 잡고 반격하려 할 때였다. 육장봉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잠 맹주, 오늘 밤…… 내 병사 중 한 사람이라도 죽는다면, 난 그때 당신과 함께 조정에 대항하던 무림 문파 중에서 한 가족을 골라 몰살할 거요.”

“육장봉!”

잠한성은 화가 나서 이를 악물었다. 분개하면서 손에 든 화살을 육장봉에게 던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