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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169)화 (169/1,004)

169화 이런 겉치레도 필요하구나

유경장은 안색을 살짝 흐리며 말했다.

“실은 나도 그렇게 벼슬자리가 탐나지는 않았소.”

적어도 오 년 전만큼은 아니었다.

저번 과거에서 낙방했을 때, 조금도 낙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아주 좋았다.

비로소 벼슬을 하고 싶다는 집념을 끊을 수 있었다. 더는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저한테 농담하는 거예요?”

삼 년 전, 평생 가장 큰 소원이 과거에 합격해 벼슬을 해서, 유씨 가문을 빛내는 것이라며, 그녀를 붙들고 운 사람이 누구였더라.

이제 와서 벼슬을 하기 싫다고 한다면, 그걸 믿을 리가 있겠는가.

“아니오. 난 진지하오.”

유경장은 얼굴의 웃음을 거두었다. 보기 드문 엄숙하고 진지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내가 벼슬을 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먼저 소씨 저택으로 들어가야 하오.

그러니 내가 귀찮아질 거라는 걱정은 하지 마시오. 춘일연 일은 내게 맡기면 되오. 화신의 칭호는 오직 당신만의 것이니까. 그리고…….”

유경장은 잠시 말을 끊더니, 비밀스럽게 덧붙였다.

“춘일연이 열리는 그날, 당신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소. 당신은 춘일연 날만 기다리시오.”

그날이 되면, 월령안은 화신뿐만 아니라, 변경 귀족 여인들이 제일 부러워하는 여인이 될 것이다.

* * *

때는 자시(子時 – 오후 11시~다음날 오전 1시)였다. 밤하늘은 맑았다. 주변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수횡천은 약속대로 시간을 맞춰 성 밖에 나타났다.

끝없이 펼쳐진 어둠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경계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육장봉을 신뢰하지 않았다. 하지만 변경에 있으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수 맹주, 우리 장군께서 전방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수횡천이 나타나자, 육삼이 조용하게 나타나 따라오라는 암시를 했다.

수횡천은 육삼을 힐끔 보았다. 아는 사람임을 확신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육삼을 따라 말을 타고 삼림 옆의 오솔길로 날 듯이 달렸다.

반 시진 뒤, 그들은 한 별장 밖에 멈춰 섰다.

수횡천은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분별할 수 있었다. 별장 높은 곳에 붙은 ‘청희’라는 두 글자가 보였다. 또 별장의 높고 웅장한 대문도 눈에 띄었다.

‘여기는…….’

수횡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육장봉은 역시 미리 준비해 두었군. 잠 선배는 오늘 무사하지 못하겠구나.’

“수 맹주, 드시지요!”

육삼이 말에서 내렸다. 수횡천의 옆으로 다가와 길을 안내했다.

수횡천은 여전히 말없이 육삼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두 사람은 옆문으로 들어갔다.

문을 여니 문밖과 문 안은 확연히 다른 세상이었다.

문밖은 칠흑같이 어두워 한 치 앞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문 안은 불을 잔뜩 밝혀 대낮보다 더 환했다. 너무 밝아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수횡천은 별장에 들어선 순간, 손을 들어 눈 앞을 가렸다. 손을 내리자 은빛으로 빛나는 연갑(軟甲 – 가볍고 질긴 재질로 만든 방어복)을 입은 육장봉이 보였다.

그는 늠름한 자태로 정중앙에 앉아 있었다. 그의 뒤로는 열두 명의 친위대가 양옆으로 늘어서 있었다.

육삼은 수횡천을 데리고 온 뒤, 육장봉의 뒤로 가서 섰다.

열두 명이 둘로 나뉘어 소나무처럼 곧게 서 있었다. 그래서인지 앞에 앉아 있는 육장봉은 더욱 위풍당당하고 기세가 남달라 보였다.

비교할 일이 없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다.

기세등등한 육장봉에 비해서, 무명옷 차림으로 홀로 온 수횡천은 더없이 초라하게 보였다.

사실 그는 체면을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정말이지 난감했다.

여기 오기 전, 월령안이 연갑을 꺼내 준 게 떠올랐다. 연갑은 매우 정교해서, 척 보아도 가격이 제법 나갈 듯했다.

하지만 그는 단칼에 거절했다.

“싸우러 가는데 뭘 입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이기는 것이 중요하지.”

무림인들의 싸움이란 제법 잔혹했다. 한 번 싸우고 나면 몸에 걸친 옷은 거의 망가졌다.

만약 싸우러 나갈 때마다 화려하고 비싼 옷을 입는다면, 나중에는 입에 풀칠조차 하기 힘들 것이다.

물론, 수횡천은 이런 이야기를 월령안에게 해 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육장봉의 위풍당당한 기세와 그의 몸에 걸친 은빛 연갑을 보고 말았다. 심지어 그의 뒤에 선 친위대조차 자기보다 잘 차려입었다. 수횡천은 그걸 보자 돌아가고 싶어졌다. 과거로 돌아가서 월령안을 거절하던 자신을 때리고 싶었다.

그는 월령안의 호의를 거절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리고 소육자도 데리고 왔어야 했다.

‘그 둘만 있었어도! 육장봉보다는 못해도 이렇게 궁상맞아 보이지는 않았을 텐데.’

육장봉을 보라. 저 자리에 자리 잡은 그의 모습은 위풍당당하고, 존귀하며,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굳이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절로 존경스럽고 감탄하는 마음이 들었다.

분명 초라하기 짝이 없는 공터였지만, 육장봉이 앉아 있으니 장엄하고 엄숙해졌다. 그 바람에 작은 별장이 웅장한 궁궐로 탈바꿈한 기분이었다.

육장봉을 보고 다시 수횡천, 자신을 보라.

많이 낡은 베옷에, 너무 빨아 색이 바랜 신발을 신은 그는 별장의 등불 아래서 더욱 초라해 보였다.

육장봉과 비교했을 때, 자신은 그저 강호를 떠돌면서 뜻을 이루지 못한 중년 아저씨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몰랐지만, 수횡천은 육장봉과 나이가 비슷했다. 그러나 수횡천이 육장봉보다 많이 겉늙어 보였다.

수횡천은 속으로 더없이 짜증이 났다. 그래도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그는 태연자약하게 육장봉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육장봉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를 무시하고, 평소처럼 태연하게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육장봉에게 포권했다.

“육 대장군.”

“앉게.”

육장봉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횡천이 뭐라고 하기도 전이었다. 시위가 나무 의자를 들고 와서 육장봉의 아래쪽에 놓았다.

‘이 기세는…….’

수횡천은 육장봉을 힐끔 보고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드디어 일부 강호 문파에서 왜 겉치레를 중히 여기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이 매번 데리고 나오는 제자들은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하나같이 번듯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럼으로써 한눈에 큰 문파, 큰 세가(世家)에서 왔음을 알아보게 하였다.

‘때에 따라서는 이런 겉치레도 정말 필요하구나.’

수횡천은 월령안이 준비한 연갑을 입지 않고, 소육자를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을 다시 한번 후회했다.

분명 같은 의자에 앉아 있지만, 자신은 초가집에 앉아 있는 것처럼 육장봉의 기세에 밀려 흐릿해졌다.

그는 늘 마음이 넓었다. 이러한 겉모습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가슴이 아주 답답해졌다. 이 순간, 공기조차 사람을 숨 막히게 했다.

그는 자신의 적수가 육장봉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육장봉의 기세에 꼼짝없이 눌렸으니, 싸울 때 겁먹은 티를 낼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수횡천은 의자에 앉아, 될수록 우스운 꼴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부자연스러운 모습은 육장봉의 시선을 끌고 말았다.

육장봉은 하찮다는 듯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한 손을 팔걸이에 걸치고, 수횡천에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 맹주, 잠시만 기다리게. 잠 맹주가 곧 도착할 걸세.”

수횡천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잠 선배가 오신다고?”

‘잠 선배가 스스로 그물에 걸려들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을 텐데?’

이는 함정이 확실했다.

“물론이지. 여기는 청희 별장일세!”

그러니 잠한성은 반드시 올 것이다. 함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올 것이다.

잠한성은 그런 사람이었다.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었다.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했다.

수횡천은 침묵을 지켰다.

그도 잠한성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육장봉이 청희 별장에서 만나자고 했으니, 반드시 올 것이다.

육장봉과 수횡천은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지나지 않아, 별장의 대문이 열렸다.

검은 그림자가 문가에 나타났다.

화르륵…….

대문이 열리면서 문가에 걸어 두었던 등불 두 줄이 하나하나 켜졌다. 그와 동시에 잠한성의 감출 수 없는 초췌하고 겉늙은 얼굴도 비추었다.

‘잠 선배가 어쩌다 이렇게 많이 늙었지?’

잠한성의 여위고 늙은 얼굴을 보면서, 수횡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 선배도 이 몇 년간 잘 지내지 못했나 보군.’

그의 얼굴에는 패배자의 실망감이 잔뜩 어려 있었다.

잠한성은 문 어귀에서 잠시 멈췄다. 곧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뎌 별장의 중앙까지 왔다.

“육 대장군, 나 잠한성이 왔소이다!”

그는 등 뒤에 장검을 차고 있었다. 장검은 낡은 천에 싸여 있었다. 검의 손잡이는 낡고 빛을 잃었다. 오랫동안 주인의 손을 타지 않은 것 같았다.

“잠 맹주께서는 역시 시간을 잘 지키시는군!”

육장봉은 의자에 앉은 채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또 잠한성에게 의자를 내어 주도록, 시위에게 분부하지도 않았다. 그저 잠한성이 그곳에 서 있게 내버려 두었다.

이를 본 수횡천은 이상하게 약간 기쁜 마음이 들었다.

‘육장봉이 나한테 의자를 주었다고 흐뭇해하다니!’

그는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육 대장군께서는 약속대로 연약한 여인을 괴롭히지 않으시기를 바라네.”

잠한성은 여위었지만, 온몸에는 기운이 넘쳤다. 그는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자세로 서 있었다. 하지만 내뱉는 말마다 살기가 충만했다.

“허!”

육장봉이 비웃으며 일어났다.

“잠 맹주께서는 걱정하시지 마시오. 나는 말하면 지키는 사람이오. 기왕 잠 맹주께서 오셨으니 오늘 한 번 제대로 싸워 보시오. 괜히 잠 맹주께서 우리의 접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조왕에게 화풀이하는 일이 없게 말이오.”

잠한성이 온 이상, 떠날 생각을 말아야 했다.

“조왕?”

육장봉의 말을 듣자, 잠한성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늘 일이 조왕과 무슨 상관인가?”

‘조정에서 억지로 트집을 잡아, 날 곤경에 빠뜨리려는 것이 아니었나?’

“보아하니, 잠 맹주께서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셨나 보군.”

육장봉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동정 어린 시선으로 잠한성을 바라보았다.

‘잠한성처럼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자는, 오늘 여기서 죽어도 억울할 게 없지.’

“하! 조정에서 날 용납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잠한성이 비웃으며 말했다.

여태까지 조정이 그에게 어떤 누명을 씌우더라도, 나서지도, 반박하지도 않았다. 조정이 자신을 모함해도 내버려 두었다.

그동안 그는 성과 이름을 감추고, 세상일을 묻지 않았다. 또한, 강호의 일에도 끼어들지 않았다. 조정의 핍박에 계속해서 물러나기만 했다.

그래도 조정에서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요즘에야 간간이 얼굴을 드러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청희 장공주를 빌미로 그가 모습을 드러내도록 협박했다.

“잠 맹주께서 생각이 지나치시군. 무림의 전 맹주인 당신은 물론이고, 현 맹주도 조정에서는 용납할 수 있소!”

‘조정의 불공평한 처사와 핍박에 맞서 굳센 의지로 홀로 묵묵히 인내하는’ 잠한성을 보자, 육장봉은 비웃었다.

“어제, 당신이 해친 사람은 우리 주나라의 조왕이오!”

“조왕? 그럴 리가! 어제 나와 겨룬 사람은 천목신교의 교주였다! 육장봉, 여기는 다른 사람이 없네. 그러니 조정이 날 용납할 수 없어 내 목숨을 노린다고 당당하게 말하게.”

잠한성은 옷소매를 떨치며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여태까지, 조정이 내게 씌운 누명이 한두 개인가?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육장봉,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안다! 네 말을 믿는 자가 누가 있겠나!”

“내가 당신을 죽이는데 무슨 죄명을 붙일 필요가 있나? 잠 맹주, 자신을 너무 대단하게 여기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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