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난 당신을 기다렸소
장 상궁은 요즘 미인방을 경영하다 보니, 상업계의 방식에도 적응했다.
신세를 진 것과 거래는 별개였다.
공부의 사람에게 부탁하여 월령안에게 공짜로 만들어 줄 수는 있었다. 그러면 나중에 신세를 갚아야 하는 사람은 장 상궁이었다.
하지만 월령안이 돈을 낸다면, 장 상궁이 공부의 사람에게 일을 소개해 준 셈이 된다. 공부의 한가한 사람들은 고마워하며, 오히려 장 상궁에게 신세를 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장 상궁 마마님, 걱정하지 마세요. 그들이 일만 잘해준다면, 품삯은 반드시 낼 거예요. 마침 저도 이 일은 남들이 모르게 조용히 처리했으면 합니다.”
사람들이 미리 안다면 놀라움이 줄어들 것이다.
“왜 이런 일을 하는지 물어도 되겠는가?”
장 상궁은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월령안의 요구가 너무 많아지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정작 월령안은 장 상궁이 물어보지 않을까 봐 걱정하던 참이었다. 때마침 물어보자, 전혀 감추지 않고 말했다.
“춘일연에 참석할 때 쓰려고 합니다.”
“낭자가…… 올해의 화신이 되려고?”
올해의 춘일연은 등요 공주가 주최한다. 명월산장도 어느 정도 준비가 끝난 상황이었다. 그런데 월령안은 신경을 써서 조화를 만들고, 유난히 요구 사항도 많았다. 아무래도 춘일연의 준비 때문에 그러는 것 같지만은 않았다.
“돈이 부족해서요. 돈을 벌려고 합니다.”
월령안은 장 상궁이 도박판에 대해 모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태후 마마께서는 올해 등요 공주마마께 부군을 골라 주시려 하네.”
예외가 없다면, 올해의 화신은 등요 공주일 것이다. 또 등요 공주여야만 했다.
월령안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물었다.
“저도…… 겨루면 안 되나요?”
“꼭 그래야 하겠는가?”
장 상궁은 월령안을 바라보면서, 그녀의 생각을 바꾸려고 했다.
“겨루지 않는다면, 제가 나중에 어떻게 변경에서 자리를 잡겠습니까?”
월령안은 씁쓸한 얼굴을 했다. 어느새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고작 꽃을 파는 하씨 가문에서도 저를 죽어라 짓밟으려 하는데요. 제가 겨루지 않는다면, 변경에서 누가 저를 사람으로 보겠습니까?”
“하씨 가문더러 도박판을 걷으라고 하면 되네.”
태후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태후의 친정인 위무의왕을 나서게 해서 하씨 가문을 혼내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하씨 가문은 찍소리도 못할 것이다.
“하씨 가문이 보이는 곳에서든 안 보이는 곳에서든 도박판을 없애기만 하면, 저도 절대 화신 자리를 넘보지 않을 거예요.”
월령안이 바로 흔쾌히 대답했다. 하지만 장 상궁은 멍해지더니, 정신을 차리고 한숨을 쉬었다.
“알겠네. 춘일연의 일은 내가 태후 마마께 말씀드리겠네. 하지만 결과는 내가 어찌할 수 없네.”
보이는 도박판은 없앨 수 있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몰래 벌이는 도박판은 어쩔 수 없었다.
장 상궁도 짐작이 갔다. 하씨 가문의 배후에 누가 있지 않고서야, 감히 이렇게 큰 판을 벌일 수는 없을 것이다.
태후가 한마디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태후는 월령안을 위해서 말을 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월령안의 체면이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장 상궁 마마님의 이 말씀만으로도 저는 만족합니다.”
월령안은 몸을 일으켰다. 장 상궁에게 정중한 자세로 대례를 올렸다.
일부러 장 상궁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나중에 태후 마마 앞에서 말을 좀 해 주십사, 하는 뜻이었다.
월령안이 직접 뭔가를 하느니, 장 상궁이 태후 앞에서 월령안의 칭찬을 해 주는 편이 훨씬 좋았다.
장 상궁은 손을 저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네. 선을 잘 지켜 주시게. 저번에 등요 공주마마의 일로 태후 마마께서도 심기가 언짢으시네.”
태후는 등요 공주에게 불만이 생겼다. 그뿐만 아니라 월령안에게도 불만이 생겼다.
등요 공주가 아무리 못나도 황실의 공주였다.
등요 공주가 잘못을 저지르면, 당연히 황실에서 가르쳐야 했다. 그런데 월령안은 감히 등요 공주를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었다. 이는 제왕의 위엄을 무시하고, 황실을 능멸하는 행위였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월령안은 전혀 머뭇거리지 않았다. 깔끔하게 잘못을 시인했다.
장 상궁은 웃음을 지었다.
“낭자가 영특한 사람이라는 건 내가 잘 아네.”
* * *
월령안은 미인방에서 나왔다. 약속 시각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녀는 거리를 둘러볼 심산이었다. 하지만 마차 문을 열자마자, 길가에 있던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월령안 말이야, 그날 무슨 색깔 옷을 입고 나타날까? 내가 미인방에서 며칠이나 기다렸는데도 옷 사러 오는 걸 못 봤다니까. 혹시 일부러 밖에 안 나오는 거 아냐?”
“소문 들었어? 도박장에서 또 새로운 판을 벌였다잖아. 월령안이 그날 무슨 옷을 입을지, 얼마짜리 장신구를 하고 나올지를 내기한다는데. 만약 맞추면 만 냥이나 번다더라고.”
“정말? 그런 것까지 내기한다고?”
“못 할 거야 없지. 어떤 부잣집 도련님들은 모여서 월령안의 속옷 색깔도 맞춘다니까. 이런 시시한 내기가 또 있었는데. 그날 월령안과 하룻밤을 보낼 수 있을지 없을지도 내기를 한다더라.”
“그 도련님들도 참 잘들 논다. 아쉽게도 우리는 춘일연에 참석할 수가 없잖아. 월령안의 옷을 헤집어 속옷 색깔을 확인할 수도 없고 말이야. 아니면 우리도 돈을 걸 수 있는데 말이야.”
마차 안에 앉은 월령안도 똑똑히 들었다. 마차 밖에 있는 소육자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소육자는 화가 폭발했다. 당장 주먹을 꽉 움켜쥐고 뛰어내렸다.
“이놈들, 입이 어쩜 그렇게……!”
“소육자, 그러지 말아요.”
월령안은 소육자의 어깨를 눌렀다.
“우리 바로 봉상다루로 가요.”
“하지만 저놈들이…….”
소육자는 두 눈을 붉힌 채 월령안의 소문을 수군거리는 남자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진짜 악당은 저자들이 아니에요. 소육자가 혼내 준다고 달라질까요?”
월령안은 소육자를 꽉 붙잡았다.
“제 말을 들으세요.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해야죠. 저자들은 고작 건달들이니까, 마음에 두지 마세요.”
소육자는 움켜쥔 주먹을 펴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월 누님, 저자들이 누님을 저렇게 얘기하는데 화가 나지 않으세요?”
“당연히 화가 나죠. 하지만 싸운다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요. 가요.”
월령안은 소육자의 어깨를 다독여, 소리 없이 위로를 건넸다.
그녀는 화가 났다고 해서 싸운 적은 없었다. 보통은 돈을 날리게 했다.
* * *
신시 전이었지만, 월령안은 봉상다루에 도착했다. 원래는 잠시 기다려야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별실의 문을 열자, 차를 우리는 유경장이 보였다.
유경장은 준수한 얼굴에,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는 표현하기 힘든 우아함과 고상함이 느껴졌다.
차를 우리는 능숙한 손놀림은 우아했다. 마치 흘러가는 물처럼 막힘이 없었다. 일거수일투족이 여유로우면서도 자연스러웠다.
백의재자(白衣才子) 유경장이라는 이름 그대로였다.
월령안은 발걸음을 멈추고 웃음을 지었다.
“경…….”
“령안?”
유경장은 고개를 홱 들었다. 손에 든 찻잔이 달카닥하고 탁자 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바보가 된 듯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월령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자유분방하고 풍류가 넘치던 재자(才子)로서의 풍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령안…….”
‘보고 싶었소.’
그는 붉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파르르 떨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소리를 내지 못했다. 단지 마음속으로 월령안의 이름을 부를 뿐이었다.
“앉으라는 말도 안 하나요?”
삼 년이나 지나 유경장을 다시 만났다. 지금 월령안의 마음속에는 탄식만 남아 있었다.
삼 년 전, 그들이 맨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유경장은 술김에 이런 말을 했었다.
“당신을 깊이 연모하지만, 당신과 혼인할 수는 없소. 당신이 육장봉과 혼인한다는 소식을 들었소. 걱정도 되었지만, 기쁘기도 하다오. 드디어 해탈할 수 있어 기쁘오. 다시는 가망 없는 감정에 매달리지 않을 수 있어서 기쁘오.”
그때의 유경장은 술 냄새를 가득 풍겼다. 그러나 둘 다 유경장이 취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정신이 또렷했다.
그게 아니라면, 유경장이 그 뒤로 줄곧 그녀를 피해 다녔을 리가 없었다.
삼 년이나 지났으니 그날 밤의 일은 바람처럼 흘러갔을 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유경장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경장을 본 순간, 그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느꼈다. 적어도 유경장한테는 끝난 일이 아니었다.
“제가 때를 잘못 맞춰 왔나요?”
기왕 왔고 얼굴까지 마주했다. 지금 떠난다면 더욱 어색해질 것 같았다. 월령안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유경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니오. 당신은 언제 오더라도 제때 오는 거요.”
유경장은 눈앞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마음속의 긴장과 흥분을 천천히 가라앉혔다. 다만 두 눈은 깜빡이지 않고 월령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당신이 오지 않을 줄 알았소.”
“배첩은 제가 보냈는데, 왜 오지 않겠어요?”
월령안은 마음이 답답해졌다.
‘오늘은 도대체 무슨 날인가? 왜 하나같이 이상하게 굴지?’
“난 당신을 기다렸소. 오래도록…….”
월령안의 혼롓날, 그는 월씨 저택 문밖에서 한참이나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월령안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뻐하며 육씨 가문으로 시집가서 육장봉의 아내가 되었다.
월령안이 육씨 가문에 있던 삼 년 동안, 그는 매일 저녁 월씨 저택 맞은편 길거리에서 일각 동안 기다리고는 했다.
그는 월령안이 돌아오기를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다.
“죄송해요, 제가 늦게 왔네요.”
월령안은 유경장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탁자 위의 다구를 가리켰다.
“육안과편인가요? 제게도 한 잔 줄래요?”
유경장의 시선은 너무 노골적이고 뜨거웠다. 그를 만나기로 한 게 잘못된 결정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녀는 유경장을 만난 것을 후회했다. 둘은 평생 다시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처음으로 우려 보는 것이라 조금 서투오.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유경장은 월령안의 회피하는 시선을 알아차렸다. 그의 눈에 서글픈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몰래 숨을 들이쉬어, 넘실대는 감정을 꾹꾹 억눌렀다. 애써 평온함을 유지하며 차를 따라 그녀에게 살며시 건네주었다. 그리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미안하오. 너무 오랜만이라 조금 감정이 격해졌소. 령안, 개의치 마시오.”
아까 그의 모습은 확실히 추태였다. 월령안뿐만 아니라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여인들 사이를 누비고, 기루를 집으로 여기며, 홍안지기가 넘쳐났다. 그런 그가 언제 이렇게까지 추태를 보인 적이 있던가.
늘 여인들이 그의 앞에서 긴장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항상 자유분방하면서도 운치가 흘러넘쳤다. 그러한 기세는 황실 공주 앞에서도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전, 그의 행동은 정말 너무 한심했다.
월령안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뭘요, 저도 기뻐요.”
드디어 유경장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