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166)화 (166/1,004)

166화 꼭 잠한성의 목을 따오겠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얼굴이 온통 구레나룻으로 뒤덮여 두 눈만 드러나 있었다. 그 두 눈은 마치 맹수처럼 흉악한 살기를 가득 띠고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대략 쉰쯤 되어 보였다. 가늘고 마른 몸에 걸친 옷은 조금 낡아 보였다. 얼굴에서는 세월의 흔적을 감출 수 없었다. 시선도 침울한 것이 썩 순조롭지 않은 인생을 산 듯했다.

“저 여인이 바로 월령안인가? 난 또 사내같이 덩치가 산만하고 악귀처럼 생겼을 줄 알았지. 저렇게 나긋나긋한 어린 계집일 줄이야. 나 야율제가 한낱 계집아이의 손에 지다니. 정말 우습군!”

구레나룻은 월령안이 떠나간 방향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너는 육장봉의 손에 진 것이다. 월령안은 일개 여자 장사치에 불과해. 그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마른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아무 감정의 기복도 없었다. 단지 사실을 그대로 말할 뿐이었다.

하지만 야율제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전쟁이란 당신네 강호인들의 비무와는 다르오. 전투력이 강하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오. 후방의 지원과 보급이 없이는, 육장봉이 홀로 일만 명을 상대할 수 있다고 해도, 전쟁에서 날 이긴다는 보장이 없소.

또 능력으로나, 병력으로나, 나 야율제는 육장봉과 막상막하요. 정말로 일대일로 붙는다면 육장봉이든, 주나라의 장군이든, 우리 북요 용사들의 상대가 될 수 없소. 그러니 이번 전쟁에서 날 쓰러트린 건 육장봉이 아니라 월령안이오!”

월령안이 돈으로 그를 쓰러트린 셈이었다.

“월령안이 한 모든 일은 황제가 시켜서 한 거다.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널 쓰러트린 건 황제겠지.”

마른 남자가 재차 입을 열었다. 월령안을 감싸려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황제가 그러고 싶어도 할 사람이 없으면 소용없소. 주나라에 월령안이 있는 한, 승산이 일할 더 높아지는 거요.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월령안은 죽어야 해!”

야율제는 고개를 돌려 마른 남자를 보았다. 입을 벌려 잔인한 웃음을 드러냈다.

마른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야율제가 말을 가로챘다.

“수횡천이 있는 한, 나는 당분간 월령안에게 손을 쓸 수가 없소. 그렇다 하더라도 안심하시오. 당신 앞에서 당신 은인의 딸을 죽일 테니까.”

“나와 약속하지 않았느냐. 내가 널 도와 천목신교의 교주를 죽인다면, 너는 월령안을 살려 주기로 했다.”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마른 남자는 바로 전 무림맹주 잠한성이었다.

“안 됐군. 당신은 죽이지 못했소.”

야율제가 코웃음을 치며 경멸 어린 어조로 말했다.

“무슨 일이든 절반만 하면, 주나라에 떳떳할 수 있나?”

“난 주나라의 백성이다.”

잠한성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힘차고 강한 의지가 담긴 어조로 말했다.

“허!”

야율제가 비웃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소. 정도 못 떼고, 대의도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당신은 내가 본 중에…… 가장 실패한 사람이오.”

“나는 양심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잠한성은 눈을 감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라만큼은 아니었다.

이것이 그의 정이자, 대의였다.

그는 일개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였다.

“딱하군. 그 여자는 당신의 정을 받아 주지 않았소. 조씨 황제도 당신의 대의를 받아 주지 않았지.”

말을 마친 야율제는 몸을 돌려 훌쩍 뛰어내렸다. 홀로 남은 잠한성은 지붕 위에 서서 황궁의 방향을 바라보며 서글픔을 느꼈다.

* * *

월령안은 성으로 돌아가자마자 자신을 찾으러 나온 월씨 가문의 하인을 만났다.

“아가씨, 유 공자께서 신시(申時 - 오후 3시~5시) 일각(一刻)에 봉상다루(鳳祥茶樓)에서 기다리시겠답니다.

이제 한 시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미인방으로 가자.”

한 시진이면 장 상궁과 얘기할 시간은 충분했다.

월령안은 수횡천이 아직 그녀를 따라오고 있음을 떠올랐다. 마차 문을 열고, 몸을 내밀었다.

“오라버니, 성안에서는 소육자랑만 같이 다녀도 괜찮을 거예요. 먼저 돌아가셔서 쉬실래요?”

“그러지.”

수횡천은 거절하지 않았다.

명월산장을 떠날 때, 낯선 사람의 기운을 감지했다.

그 사람이 야율제가 맞는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곳에 숨어 있던 것을 보면, 절대 아군은 아니었다.

그는 육장봉을 찾아가 잘 얘기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월령안의 안전은 소홀할 수 없었다. 야율제가 만약 월령안을 해코지하려 든다면, 육장봉이 보내온 두 호위도 그저 아까운 목숨을 바치는 꼴이 되고 만다.

수횡천은 월령안과 헤어진 뒤, 바로 육장봉을 찾아가지는 않았다. 대신 특별한 방법으로 육장봉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자신은 월씨 저택으로 돌아갔다.

* * *

이 무렵, 육장봉은 야율제와 잠한성을 처단하기 위해 병력를 동원하도록, 황제에게 주청하고 있었다.

“야율제는 교활하고, 몸을 감추는 재주가 뛰어납니다. 도주의 우려가 있으니, 신은 병사를 동원해 산을 포위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려 합니다.”

그는 강도를 소탕하는 일은 맡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일부러 병사를 대동하고 심씨 가문과 강도 떼가 거래한 증거를 수색하는 것은 너무 뜬금없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은 바로 가짜임을 알아채리라.

그보다는 훨씬 자연스러운 명분이 있었다. 병사를 동원해 야율제를 포위하다가, 우연히 그와 관계가 있는 강도들을 소탕했다, 그 와중에 우연찮게 강도들과 심씨 가문이 거래한 증거를 찾아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게다가 심씨 가문에서는 줄곧 야율제의 사람과 접촉하고 있었다.

이러한 작전이 함정임을 알아차리는 눈치 빠른 사람이 있더라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할 것이다.

심씨 가문에서 적국과 사사로이 내통했다. 그런 심씨 가문과 누가 엮이려고 하겠는가?

“병력을 동원하는 구실은 뭐라 할 셈이냐? 조정 대신 모두가 너를 지켜보고 있다. 네 꼬투리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지. 야율제가 변경에 발을 디딘 걸 문관들이 알게 되면, 네게 감찰을 소홀히 한 죄를 물을 것이다. 이 죄는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신들이 이걸 물고 늘어진다면, 너는 한 달은 성 밖으로 나가 훈련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그들을 상대하기에도 벅찰 테니까.”

황제는 그 대신들의 ‘끈질긴 인내심’을 생각하자,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강도 소탕으로 하겠습니다.”

육장봉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황제가 말했다.

“변경 교외에 무슨 강도가 있단 말이냐?”

‘만약 강도들을 소탕하지 못한다면, 장봉이가 나중에 보고할 내용이 없을 텐데.’

“강도들이 없었다면, 월령안이 어떻게 습격을 당했겠습니까?”

육장봉이 되물었다.

“짐이 그 일은 잊었구나.”

황제는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다사다난한 시기였다. 조계안도 중상을 입었다는 사실이, 그의 머리를 더욱 아프게 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가 생각을 해 두었으면 됐다. 마음 놓고 하거라. 무슨 일이 벌어지든 짐이 대신 책임지마.”

만약 육장봉이 정말 문관들에게 약점이 잡힌다면, 그가 나서서 뒤집어쓰면 그만이었다. 문관들이 아무리 입이 근질거려도, 어쨌든 황제에게는 정말로 어쩌지 못할 것이다.

“폐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늘 밤…… 신이 꼭 잠한성의 목을 따오겠습니다.”

육장봉은 황제가 원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황제가 만족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러면 좋은 소식을 기다리마!”

조계안이 다친 뒤로, 황제가 처음으로 웃음을 지었다.

“신은 먼저 물러가 준비하겠습니다.”

육장봉은 황제에게 포권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난각에서 나오자, 육이가 다가왔다.

“대장군, 수 맹주께서 소식을 보내오셨습니다. 급한 일로 찾아뵙기를 원한답니다.”

“그럴 여유가 없다. 자시에 시간을 맞춰 성 밖에서 기다리라고 해라.”

육장봉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재빨리 황궁 밖으로 나갔다.

지금, 반나절밖에 시간이 없었다. 무슨 일이든 나중으로 미뤄야 했다.

게다가 수횡천이 급하다고 해서, 그도 급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수횡천이 급한 것이 그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 * *

장 상궁은 미인방을 관리하느라, 황궁에서의 품급을 잃었다. 그러나 여전히 태후의 심복이었으니, 언제든 입궁할 수 있었다. 궁에서의 체면은 결코 상궁 시절보다 못하지 않았다.

월령안이 궁에서 나온 늙은 궁녀가 아니라 궁중의 궁녀를 원한다고 해도, 장 상궁은 충분히 구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월령안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장 상궁도 그래서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월령안의 신분은 남달랐다. 그녀의 옆에 사람을 보내는 게 빈틈을 보여 주는 꼴일 수도 있었다.

만약 누군가 장 상궁의 손을 빌려 월령안에게 첩자를 보낸다면, 둘의 사이를 틀어지게 할 수도 있었다.

월령안은 장 상궁에게 고맙다고 한 뒤, 다른 일을 꺼냈다.

“장 상궁 마마님, 제가 은양당에 맡길 만한 일거리를 찾았습니다. 어르신들이 이 일을 하실 수 있을지 한번 보시겠어요?”

“어떤 일인가?”

장 상궁은 이제는 은양당을 책임지지 않았지만, 여전히 관심을 쏟고 있었다.

태후 마마는 은양당의 일을 즐겨 들었다. 그녀가 책임지지 않더라도, 수시로 은양당의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태후가 물었을 때, 바로 대답하면 무척 기뻐했다.

“비단으로 조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어르신들이 조화를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길거리의 흔한 꽃 말고, 특별하고 화려하고 커다란 꽃이요.”

월령안은 탁자 위의 종이를 집어 꽃 두 송이를 간단히 그렸다. 하나는 납작했고, 다른 하나는 활짝 핀 모양새였다.

“제 요구는 조금 특별합니다. 이 꽃들은 꽃봉오리였다가 꽃송이가 되어야 해요. 바로 이렇게요……. 살짝 건드리면, 평범한 꽃봉오리가 압력을 받아 활짝 피어나는 거죠.”

“아주 어려운 것은 아닐세. 내가 공부(工部)의 사람들과 얘기해서, 견본을 만들어 달라고 하겠네.”

장 상궁은 한 번 보더니 바로 일을 받았다.

겨울에도 꽃구경하려는 귀인들이 있어, 황궁에서는 종종 비단으로 만든 조화를 나무에 걸어 두고는 했다. 월령안의 요구 사항이 조금 복잡하기는 했지만, 못 해낼 것은 아니었다.

“이 꽃들이 무게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해요. 제가 밟을 수도 있거든요. 꽃봉오리 상태일 때, 하얀색인 조화가 서른 송이 필요합니다. 배꽃 색깔과 비슷할수록 좋아요. 배꽃과 함께 두었을 때 튀지 않게요. 또 기왓장과 같은 색깔, 풀밭과 비슷한 색깔의 조화도 서른 송이씩 필요합니다. 물론, 어르신들이 만든 것을 위주로 하죠. 조금 많거나 조금 적은 것은 괜찮습니다.”

장 상궁이 공부의 사람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자, 월령안은 참지 못하고 더 많은 요구를 내놓았다.

“색깔은 그나마 쉬운데 무게를 감당하는 건 조금 무리가 있네. 지금 답하지는 못하겠고, 공부의 사람과 이야기해 보고 다시 답을 주겠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적인 일일세. 알겠는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