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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165)화 (165/1,004)

165화 명월산장의 배꽃

“오전에 있었던 일은……. 오라버니의 의견을 미처 묻지 못했네요. 죄송해요.”

월령안은 수횡천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다. 마침 시간을 내서 그에게 해명하고 싶었던 참이었다.

지금 수횡천이 물어보는 김에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사업은 사업이에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조정이 뭘 하려 하든, 이번 기회로 뭘 이루고 싶어 하든, 이번 협력을 그저 단순한 거래로만 생각하시면 돼요.”

“정말 그렇게 쉬울까?”

수횡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이죠.”

월령안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 우리는 조정과 여러 문파와 협력해야 해요. 하지만 전 조정이 너무 깊이 개입하지 못하게 할 거예요. 조정은 감독권만 가질 뿐이에요. 나머지는 모두 우리 뜻대로 될 거예요.

그때가 되면 오라버니는 조정에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주면 돼요. 다른 문파들도 다 돈을 벌기 위해 오는 거예요. 우리와는 협력 관계예요. 그들이 우리에게 협조한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죠. 다들 벌이가 있는 거니까요. 만약 협조하지 않는다면…….”

“협조하지 않으면 어쩔 거냐?”

수횡천은 그들이 협조는커녕 도리어 일을 망칠까 걱정이 되었다.

“그럼 제가 그들을 살려두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말아야죠.”

월령안은 찬란하게 웃으며 홀가분하게 말했다.

바람이 불어왔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하얀 꽃잎 여러 장이 날아와 월령안의 머리 위에 내려앉고, 뺨을 스쳤다. 마치 나비처럼 그녀 주위를 여러 번 돌고 나서야 하늘하늘 땅에 내려앉았다.

떨어지는 꽃잎과 미인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되었다.

수횡천은 잠시 멍해졌다. 약간 어색하게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네가 어떻게 그들을 살려두지 않을 건데?”

월령안은 생각도 하지 않고 말했다.

“당연히 그들의 돈줄을 막는 거죠. 명성에도 흠집을 내주고, 그들의 제자들도 빼앗고요.”

돈이 있다면 세상을 누빌 수 있지만, 돈이 없다면 한 걸음도 나서기 힘든 법.

강호의 문파라고 뭐가 다르겠는가.

그들이 돈 없이 어떻게 후기지수를 길러내고, 뛰어난 인재를 끌어들여, 문파를 발전시킬 수 있을지 궁금했다.

미풍이 스쳐 지나가며 월령안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고 치맛자락을 날렸다. 바람에 날린 작은 꽃잎들이 그녀의 몸에 내려앉았다가 또 바람에 불려갔다. 머리 위에 내려앉은 꽃잎 한 장만 머리카락에 걸려 있었다.

수횡천은 고개를 돌렸다가 월령안 머리 위의 꽃잎을 발견했다. 무의식중에 발걸음을 멈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그 꽃잎을 가볍게 떼어 냈다.

“어?”

월령안은 멍해졌다. 고개를 쳐들고 수횡천을 바라보았다. 입술을 달싹이며 뭐라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왜 이러시지?’

수횡천도 멍해졌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손에 든 꽃잎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어색하게 말했다.

“나는……. 네 머리 위에 뭔가 붙어 있길래…….”

그는 정말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신도 왜 그랬는지 몰랐다.

아까 그 순간은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꽃잎을 떼어 낸 후였다.

“수 오라버니, 고마워요.”

월령안은 수횡천의 손에 든 꽃잎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선뜻 고맙다고 말했다.

‘역시 내가 생각이 지나쳤겠지. 오라버니는 강호인답게 사소한 예절에는 신경 쓰지 않는 거였어.’

“아, 아니다.”

수횡천은 조금 어색했다. 뒷짐을 지고 옆으로 한 걸음 옮겼다. 월령안과 슬그머니 거리를 두었다.

월령안은 오해하지 않았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아까 결례를 범했다.

월령안은 원래 별일 아니라고 여겼었다. 그러나 수횡천이 어색하게 자리를 피하자,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해도 적절하지 않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묵묵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꽤 어색했다.

그때 앞쪽에서 갑자기 소육자의 감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월 누님, 빨리 오세요……. 여기 너무 예쁘네요!”

“우리도 가서 보자꾸나!”

수횡천이 다급히 말했다.

지금처럼 소육자의 ‘너무 예쁘다’라는 말이 아주 적절하고, 반가웠던 적이 없었다.

“좋아요. 가서 봐요.”

월령안도 긴장을 풀었다. 소육자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까의 분위기는 사람을 참 난감하게 만들었다. 임기응변에 강한 그녀조차도 당황했다. 분위기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다.

앞으로 다가간 두 사람의 눈앞에 새하얀 꽃바다가 펼쳐졌다. 나무 수천 그루에 배꽃이 가득 피었다. 소육자는 배나무 아래에 서서 한껏 웃음을 짓고 있었다.

“달빛을 머금은 듯 고요하고, 서늘함을 품은 향기는 바람을 좇지 않네(豔靜如籠月, 香寒未逐風). 배꽃이 너무 아름다워요.”

월령안은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배나무 숲 밖에 서서 새하얀 꽃바다를 바라보았다.

문득, 노인이 오매불망 되뇌던 것이 명월산장의 배가 아니라, 이 배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배꽃은 너무 아름다워서 눈을 깜빡이기조차 아쉬웠다.

“그렇죠, 그렇죠. 월 누님, 여기는 정말 너무너무 예뻐요. 제가 한참 걸어서야 이 배나무 숲을 발견했거든요. 만약 전망대에서 여기를 보면 아주 아름다울 거예요.”

소육자가 쓰는 형용사는 늘 그렇듯 아주 쉬웠다. 이 배나무 숲이 크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과장되게 크게 둘러싸는 듯한 몸짓을 했다.

“정말 크네요!”

월령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월 누님, 어서 오세요……. 오늘 입은 옷이 정말 예뻐요. 배나무 아래에 서 있으면 더 예쁠 거예요.”

소육자는 말하면서 월령안을 배나무 아래로 잡아끌었다.

월령안은 수횡천과의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 깰지 몰라 고민하던 중이었다. 소육자의 말을 듣자, 옳다구나 싶어 그를 따라 숲 안으로 뛰어갔다.

“제가 언제 안 예뻤어요?”

“월 누님은 항상 예뻤는걸요.”

소육자는 월령안을 잡아끈 채 배나무 아래를 빙글빙글 돌았다.

월령안은 원래 어색함을 피하려고 숲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소육자와 함께 놀다 보니 흥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옷소매를 걷고 바람에 떨어지는 배꽃을 붙잡았다.

“오늘 입은 치마폭이 그다지 크지 않네요. 수수(水袖 - 연기자나 무용수의 옷소매 끝에 다는 흰 명주)가 달린 옷을 입었으면 좋았을 뻔했어요. 바람이 세지 않아서 꽃잎도 많이 떨어지지는 않네요. 바람이 많이 불어 치맛자락이 휘날리고 꽃잎도 같이 흩날리면 더 아름다울 텐데.”

“월 누님, 여기서 기다리세요.”

월령안의 말을 들은 소육자는 바로 그녀의 손을 놓고 날쌔게 나무에 올라갔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나뭇가지를 잡고 계속해서 흔들었다.

쏴아아…….

월령안의 머리 위로 꽃비가 내렸다. 새하얀 배꽃 잎이 어지럽게 흩날리며 떨어졌다.

“와……. 꽃이 아주 많네요.”

월령안이 즐겁게 웃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잡으려고 했다.

왼손밖에 움직이지 못했지만, 좋은 기분에는 전혀 영향이 없었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떨어진 꽃잎을 모아서 그녀가 목욕할 때 뿌려 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전생에 꽃 선녀였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자신이 정말로 선녀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보자,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의 그녀는 월씨 가문이 금지옥엽이었고, 부모님의 꼬마 선녀였다.

“월 누님, 지금 한 바퀴 돌아보세요. 분명 예쁠 거예요.”

소육자는 혼자 신나게 놀던 중에 월령안도 즐겁게 놀자, 더욱 흥이 나서 힘껏 흔들었다.

월령안도 그의 말에 따라 제자리에서 한 바퀴, 또 한 바퀴 돌았다.

무수한 꽃잎이 쏟아지며 월령안의 옷에, 머리 위에, 머릿결 사이사이에 내려앉았다.

옆에 서 있던 수횡천도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손을 펼쳐 보았다. 그 안에는 찬란하게 핀 꽃송이 하나가 있었다.

수횡천은 배나무에 기댄 채, 선녀 같은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렸다. 손을 들어 꽃송이를 바람에 날려 보냈다.

곧 떨어지는 배꽃이 점점 줄어들었다. 소육자는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

“월 누님, 이 나무에는 이제 꽃이 얼마 안 남았어요. 꽃을 좀 남겨 둘까요? 대신 제가 다른 나무에 올라갈게요. 좀 기다리세요.”

“아니에요.”

월령안이 소육자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

“전 됐어요. 우리 이제 나무들을 그만 괴롭혀요.”

월령안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눈 안의 웃음도 사라지지 않았다. 숨을 가볍게 헐떡이면서도 온몸에서는 즐거운 기운이 넘쳐흘렀다.

조금 어린애처럼 놀기는 했지만, 아까는 아주 즐거웠다.

“알았어요. 꽃이 절반은 남았잖아요. 열매 맺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을 거예요.”

소육자는 손을 뻗어 급히 해명했다.

“열매가 문제가 아니에요. 춘일연이 명월산장에서 열리는데 우리가 이 배꽃들을 다 떨구면 남들은 뭘 구경하겠어요. 그리고 꽃잎이 떨어지는 게 보고 싶다면 제가…….”

월령안은 거기까지 이야기하자 갑자기 말을 멈췄다. 곧 기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아! 생각났어요!”

“월 누님, 무슨 생각이 났는데요?”

소육자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우린 방금 논 것뿐인데?’

“춘일연에서 어떻게 놀아야 할지 생각났어요! 또 은양당의 노인분들께 어떤 일거리를 드려야 할지도요.”

월령안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두 눈에서는 빛이 뿜어져 나왔다. 활기찬 그 모습에, 사람이 반짝반짝 빛이 나는 듯했다.

“춘일연은 노는 거예요? 월 누님, 재미있어요? 저도 함께하면 안 되나요?”

소육자의 눈은 월령안보다 더욱 반짝거렸다.

월령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되죠! 소육자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어요. 그날 절 도와줄 수 있어요?”

“좋아요!”

소육자는 물어보지도 않고 바로 승낙했다.

“어떤 일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그렇게 승낙해요? 제가 소육자를 팔아먹을까 걱정도 안 되나요?”

월령안이 농담조로 말했다.

소육자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하며 말했다.

“하나도 걱정 안 되는데요. 월 누님한테 돈이 그렇게 많은데, 저 하나 팔아서 몇 푼이나 번다고요? 어쩌면 절 팔았다가 손해를 볼 수도 있어요.”

월령안이 너무 웃어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맞는 말 같진 않지만, 또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네요.”

그녀는 소육자의 가식 없이 순수한 칭찬이 좋았다.

하기야 그녀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었다. 특히 돈이라면 남아돌았으니까.

월령안의 이번 외출은 명월산장을 인수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산장도 인수하고 정원도 둘러보았다. 심지어 좋은 방법까지 다 떠올렸다. 더는 명월산장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세 사람은 산장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월령안은 성안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라고 하인에게 분부했다.

명월산장을 나설 때, 수횡천은 고개를 돌려 동남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순간, 그의 시선이 날카로워지더니 오래도록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소육자가 재촉해서야, 수횡천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 돌아서서 떠나갔다.

그리고 월령안 일행이 떠난 뒤, 동남쪽 지붕에서 갑자기 두 사람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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