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아무도 나를 쓰러트릴 수는 없어
월령안은 심씨 가문의 사건에 끼어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줄곧 신경을 쓰고는 있었다.
증인이 재판 전에 배신한 것은 심민의 실수가 분명했다. 하지만 육 대장군도 ‘공로가 없지는 않았다’.
만약 육장봉이 문관들과 서먹하거나, 사이가 나쁘지만 않았어도, 소 승상과 심씨 가문이 빈틈을 파고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원망해도 아픈 곳을 찌르면 안 되는 법.
육 대장군은 체면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일들은 속으로만 알고 있으면 됐다. 입으로 꺼낸다면 다들 난처해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황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누구의 책임인지를 따져 봐도 별 의미가 없었다.
차라리 곤경을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하는 편이 더 현명했다.
월령안은 사건에 대해 더 묻지 않고 말을 돌렸다.
“심씨 가문의 사건은 순천부가 심사하는 것이 맞나요?”
“유 대인이 친히 심사하시오.”
순천부윤 유칙은 대단히 원칙적이고 공정한 사람이었다. 유칙을 믿었기 때문에 육장봉도 나중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그 탓도 있었다.
증거가 확실했다. 심사하는 사람도 공정했다. 심씨 가문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판결을 내리기 직전, 증인이 배신하고 심민이 자신들을 매수하였다고 지목할 줄이야. 이로써 그들이 사전에 준비한 증인, 증거는 전부 쓸모가 없어졌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의 이번 행동에는, 그로서도 한 수 배운 셈이었다.
확실하게 빼도 박도 못할 사건을 뒤집었다. 문관들의 수는 역시 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유 대인은 줄곧 공정하셨죠. 심씨 가문이 그분 앞에서 사건을 뒤엎다니. 심씨 가문에서 내놓은 증거가 아주 충분했다는 말이에요. 이 사건은 황제 폐하께서 친히 다루셨어도 소용없었을 거예요.”
월령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음속으로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얼마나 좋은 기회였는데. 이걸 이렇게 날려 먹다니.’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이었다. 더는 말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월령안은 잠시 사색에 잠겼다가 떠보듯이 말했다.
“육 대장군, 장군의 병사들이 돌아온 지 오래되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그들더러 몸이나 풀라고 하면 어때요?”
“사사로이 병사를 출동하는 것은 죽을죄요.”
육장봉은 월령안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월령안이 무엇을 하려는지 대강 짐작이 갔다.
“그럼 도적 소탕은요? 그것도 사사로이 병사를 출동하는 건가요?”
월령안의 눈매가 휘어졌다. 교활해 보이는 얼굴에는 ‘사고를 치겠다’라고 쓰여 있는 듯했다.
육장봉은 서둘러 찻잔을 들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차를 마시는 척 입가에 드리운 웃음을 감추었다. 그러면서 엄숙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 병사는 강도 소탕에 쓸 수 없소.”
“제가 성 밖에서 습격당한 사건도 순천부윤이 담당한 거예요. 순천부는 여태까지 사건의 주모자를 밝혀내지 못했어요. 육 대장군께서 도와주신다면 유 대인께서 아주 고마워할걸요.”
심씨 가문에서는 증인이 말을 바꾸게 했다. 진짜 증거를 가짜라고 하며, 심민이 심씨 가문을 능멸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심씨 가문이 변명하지 못하도록, 가짜 증거를 만들어 주면 그만이다.
“도적들과 손을 잡아 당신을 죽이려 들었다. 그러면 동기는 무엇이오?”
육장봉은 월령안의 제의에 반감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로 실행한다면, 빈틈없이 완벽하게 해내야 했다.
“누가 도적들이 절 죽이려고 했대요? 그들은 절 납치한 거예요. 절 납치하고 월씨 가문에서 돈을 뜯어내려고 한 거죠.”
어차피 그 사람들은 다 죽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내가 납치라면 납치인 거야.’
“절 납치한 동기는 심씨 가문이 이미 대령했는데요? 그놈들은 가난해서 재산을 처분할 지경이라고요. 도적들과 손을 잡고 절 납치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죠?”
말을 마친 월령안은 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생각할수록 이 수가 괜찮은 것 같았다.
소 승상은 문관의 우두머리였다. 그러한 소 승상이 나서서 심씨 가문을 보호하고. 원래의 죄명을 씻어 주었다. 그들이 다른 증거를 찾아도 무용지물이었다.
심씨 가문과 그 사건에 매달려 시간을 끄느니, 다른 길을 찾는 편이 더 현명했다.
‘어디 두고 보자고. 심씨 가문에서 도대체 뭐로 날 매수해서 거짓 증언을 시키려나?’
“당신도 재산을 처분하지 않았소? 심씨 가문도 그걸 빌미로 당신을 공격할 수 있소.”
육장봉은 월령안이 육씨 저택에서 나오자마자, 소문이 나기 전에 수중의 재산을 깡그리 처분한 사실을 떠올렸다.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월령안은 정말 침착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결정을 신속히 해낼 수 있었다.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저와 심씨 가문은 다르다는 것을 알 거예요. 심씨 가문에서 재산을 처분하는 것은 돈이 없어서고, 저는…….”
순간, 월령안은 하던 말을 멈췄다. 얼굴의 미소도 점차 옅어졌다.
눈이 달린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그녀가 재산을 처분한 것은 육장봉에게 버림을 받은 뒤, 재산을 지킬 힘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왜 그랬소?”
육장봉은 내심 알고 있었다. 그래도 월령안이 직접 말하는 것을 듣고 싶었다.
월령안이 자신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알고 싶었다.
마치 자해라도 하듯, 월령안이 그를 질책하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맨 처음 성문 앞에서 만났을 때를 제외하면, 다시 월령안이 그를 원망하는 일은 없었다.
마치 지나간 그 삼 년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처럼.
하지만 월령안은 육장봉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거드름을 피우듯 웃더니, 오만하게 말했다.
“제가 집안을 말아먹고 싶었나 보죠. 안 되나요?”
“확실히 기둥뿌리를 뽑았더군. 집안 재산 말아먹은 거로는 변경 제일이겠지.”
육장봉의 평가는 틀리지 않았다. 월령안이 삼 년 동안 전선의 병마에 쓴 돈과 헐값에 처분한 재산을 떠올렸다.
그도 돌아온 뒤, 암위를 통해 조사했었다.
월령안은 하루 사이에 백만 냥에 달하는 재산을 처분해 버렸다. 하지만 이 재산들은 처분하고 나니, 겨우 은자 오만 냥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심씨 가문에서도 소식을 듣고. 뻔뻔스럽게 월령안을 찾아가 뭐라도 하나 건지려 했다.
그날, 월령안은 산재동자(散財童子)보다도 인기가 많았다. 그녀가 찾은 구매자들은 너무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제가 좋아서 한 거예요.”
월령안은 퉁명스럽게 육장봉의 말에 대꾸했다.
“그래, 당신이 좋으면 그만이지.”
육장봉은 원하던 말을 듣지 못하자, 속으로 은근히 실망했다.
월령안은 그의 앞에서 마음을 터놓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여인이 나를 연모한다는 감정도 고작 이 정도였나.’
순간, 월령안과 대화할 흥미가 사라졌다. 심지어 그녀를 더 보고 싶지도 않았다.
육장봉은 일어서더니 엄숙하게 말했다.
“강도를 소탕하는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오. 끼어들지 마시오.”
“대장군께 감사드립니다.”
월령안도 일어서서,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그럼.”
육장봉은 오만하게 대답했을 뿐이다. 월령안을 다시 돌아보지 않고 바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월령안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말했다.
“육 대장군, 살펴 가세요.”
하지만 육장봉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성큼성큼 사라졌다.
월령안은 매몰차게 떠나는 육장봉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으로는 알 수 없는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육장봉은 무슨 뜻인 걸까?
변덕도 심하지. 바로 가는 것 좀 봐. 얘기 잘하고 있다가 전조도 없이 저렇게 가? 내가 비위를 거슬렀나?
내가 재산을 처분하고, 집안을 말아먹은 게 불만이야?
내가 누구 때문에 집안을 말아먹었는데?
육장봉 당신이 아니었으면, 내가 기둥뿌리를 뽑아 먹었겠냐고!’
월령안은 손을 들고 아래로 꾹꾹 눌렀다.
‘안 돼! 더는 생각하지 말자.’
더 생각하다가는 한을 품은 여인이 될 것 같았다. 그랬다가는 하늘도, 땅도, 자기 자신까지도 원망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버림받은 여인이 되더라도, 한을 품은 여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의 모든 것은 그녀 스스로 한 선택이었다.
그녀가 선택했고, 노력했고, 최선을 다했다. 처참하게 패배해도, 영원히 돌이킬 수 없어도, 나락으로 떨어져도, 후회하지 않았다. 남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다짐은 다짐일 뿐이다.
육장봉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매몰차게 떠나는 모습을 보자, 마음은 여전히 괴로웠다.
아무리 최선을 다하고, 모든 것을 쏟아부어도 그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또 그의 마음에 낙인 하나조차 남기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을 한 번 뒤돌아보게 하지도 못했다.
정말이지 처참한 실패였다.
코가 시큰해졌다. 하마터면 눈시울을 적실 뻔했다.
의자에 주저앉은 채 육장봉이 떠나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눈시울은 붉게 달아올랐다. 표정은 웃는 듯, 우는 듯했다. 마치 넋이라도 나간 것처럼 초점이 없는 눈으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떨리는 손으로 눈가를 닦았다.
고개를 숙이고 전혀 젖지 않은 손끝을 바라보았다.
월령안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잘했어. 그래도 발전이 있었네.”
비록 여전히 육장봉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기는 했다. 그래도 이제는 툭하면 눈물을 쏟지 않게 되었다.
월령안은 의자에 기대앉았다. 고개를 들고 멍하니 천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여봐라!”
“네, 아가씨.”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마차를 준비해. 집사에게도 준비하라고 해라. 일각 뒤에 나와 함께 성 밖으로 나갈 거야.”
그녀는 바쁘게 일하는 것으로, 육장봉에 대한 감정을 지우고, 자신을 단단히 무장할 셈이었다.
‘아무도 나를 쓰러트릴 수는 없어.
절대로 육장봉 앞에서 무너지지 않을 거야.’
월령안은 두어 걸음 걷다가 또 말했다.
“유경장에게 배첩을 보내라. 오후에 같이 차를 마시려고 하는데, 시간이 괜찮은지 여쭈어라.”
삼 년이나 지난 뒤, 유경장이 그녀를 만나려고 했다. 이로 보건대 삼 년 전의 일을 내려놓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녀도 피할 필요가 없었다.
유경장은 문인 중에서도 지위가 제법 높았다. 그가 친분을 맺은 사람 중에도 권세 있고 지위가 높은 귀족 청년이 많았다. 춘일연 때문에라도 유경장의 도움이 필요했다.
“예, 아가씨.”
하인은 허리를 숙이며 명령을 받았다. 월령안이 다른 분부가 없자, 바로 물러가서 준비했다.
월령안도 방으로 돌아와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방을 나설 때는 모든 준비를 마친 뒤였다.
월씨 가문의 집사는 바깥뜰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월령안이 나오는 모습을 보자, 다가가서 물었다.
“아가씨, 성 밖 어디로 가시렵니까? 소인이 뭘 준비할까요?”
“명월산장으로 가세. 자네가 가서 인수인계하게. 앞으로 십 년 동안, 명월산장은 우리가 쓸 수 있네. 그 안의 모든 것도 우리의 뜻대로 움직일 거야. 춘일연 전까지, 나는 명월산장에서 절대적인 발언권을 차지해야 하네. 알겠나?”
일을 잘하려면 우선 좋은 도구가 필요했다. 명월산장의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면, 절반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집사는 허리를 곧게 펴고 대답했다. 말을 마친 그는 다시 허리를 숙이고 물었다.
“아가씨, 육 대장군께서 보내신 호위를 데리고 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