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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161)화 (161/1,004)

161화 정신이 완전히 딴 데 가 있는데?

수횡천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자신이 들은 말을 차마 믿을 수 없었다.

‘이러면 잠 선배가 조정에 빌미를 준 꼴이 아닌가?’

육장봉이 말했다.

“야율제의 부친이 잠한성과 잘 아는 사이더군. 몰랐나?”

야율제의 부친도 과거 청희 장공주의 추종자였다.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엮이게 되어 있었다.

수횡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하지만 그 둘은 원수가 아니오?”

‘연적끼리 어떻게 평화롭게 지낼 수가 있지?’

육장봉이 냉소를 지었다.

“그때는 원수였겠지. 하지만 지금은 모두 패배자가 아닌가? 서로 통하는 무언가가 있겠지. 잠한성이 여인 하나를 위해 어리석을 짓을 한두 가지 저질렀어야지.”

거기에 야율제의 신분이 의심스럽다는 점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조계안은 절대로 이유 없이 일을 벌이지 않았다. 그가 야율제와 청희 장공주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 정말로 심상치 않을 것이다.

야율제의 나이로 추정해 보았을 때, 조계안은 야율제가 청희 장공주의 아들이라고 의심하는 게 분명했다.

그래야만 잠한성이 국가도 저버리고, 야율제와 왕래하는 것이 말이 되었다.

잠한성은 어리석지 않았다. 시비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도 아니었다. 마음속에 나라를 품고 있지 않은 것은 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청희 장공주와 엮여 있지 않아야만 가능했다.

일단 청희 장공주와 얽히기만 하면 잠한성은 세상에 둘도 없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말았다.

수횡천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물었다.

“육 대장군은 나더러 나서라는 말이오?”

육장봉이 말했다.

“강호의 일은 강호의 사람이 나서야지 않겠나? 조정에서는 일을 크게 만들고 싶어 하지 않네.”

잠한성이 수횡천의 손에 죽으면 강호의 문파들도 수횡천에게 따질 것이다. 그러면 조정도 연루되지 않을 것이다.

북요는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출병해서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조정과 무림의 알력이 심해지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조정은 내우외환의 상황에 부닥치게 된다.

“야율제는?”

수횡천은 잠한성과 겨룰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겨룰 의사도 있었다.

현재 무림의 제일 고수인 자신과 지난날 무림의 우두머리였던 잠한성 중 도대체 누가 더 강한지 겨루고 싶었다.

“조정이 알아서 처리할 걸세.”

육장봉이 대답했다.

수횡천은 잠시 생각하다가 승낙했다.

“좋소. 언제 손을 쓸 것인지는 그쪽에서 알려 주시오.”

그는 잠한성이 선한지, 악한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잠한성이 있는 한, 조정은 절대 무림의 문파들이 발전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육장봉이 말했다.

“오늘 밤 자시(子時 – 오후 11시 ~ 다음날 오전 1시)요!”

그는 수횡천에게 통보하러 왔을 뿐이다.

수횡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육 대장군은 내가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짐작한 거요?”

육장봉은 찻잔을 들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변경일세.”

황실의 땅이자, 조정의 땅이었다.

수횡천이든 잠한성이든 변경과 멀리 떨어진 강호에서는 무슨 일을 저질러도 괜찮았다.

하지만 변경에 온 이상, 반드시 조정의 규칙을 엄수해야만 했다.

육장봉은 차 한 모금을 마신 뒤 말했다.

“수 맹주, 난 월 가주와 또 할 얘기가 있네. 잘 가게.”

“령안아.”

수횡천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뜻을 물으려는 의도였다.

육장봉은 미간을 찌푸렸다. 눈 속에 불쾌함이 스쳐 지나갔다.

‘령안이라고? 수횡천이 월령안의 이름을 이토록 친근하게 부르다니. 고작 며칠 새에 이렇게 가까워졌나?’

“오라버니, 먼저 가셔서 준비하세요. 전 괜찮아요.”

월령안은 수횡천에게 고개를 저어 보이면서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는 월씨 저택이었다. 또 육장봉은 조금 전에 그녀와 협력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치로든 인정으로든, 육장봉도 그녀를 곤란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월령안의 확답을 듣고 나서야, 수횡천은 안심하고 나갔다.

“당신과 수 맹주는 사이가 제법 좋아 보이는군.”

육장봉은 그렇게 비꼬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를 깨달았다.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내가 왜 수횡천이 월령안을 부르는 호칭을 신경 쓰는 거지?’

“제 오라버니세요.”

월령안은 그렇게만 이야기하고 더는 이야기하기 싫은 듯 화제를 돌렸다.

“육 대장군, 저한테 따로 하실 말씀이 있는지요?”

‘할 말이 있으면 하면 되지 왜 또 시비야? 내가 누구와 사이좋게 지내든지 자기랑 무슨 상관이라고?’

“춘일연의 화신 도박판에 대해 알고 있소?”

육장봉도 자연스럽게 그 일을 넘겼다.

‘수횡천과 월령안이 무슨 사이든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월령안이 죽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저를 미끼로 삼는 거잖아요.”

월령안이 자조적으로 말했다.

감을 고르더라도 말랑한 것을 고르는 법. 육씨 가문의 보호막이 사라진 월령안이 바로 그 물러 터진 감이었다.

그녀가 육씨 가문에서 쫓겨날 때 이미 예상했던 부분이었다.

월령안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자, 육장봉은 무언가를 눈치챘다.

“그래서, 당신도 물주의 배후가 누군지 안다는 말이오?”

육장봉이 물었다.

“소씨 가문이잖아요.”

말을 마친 월령안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상대가 소씨 가문(중국어로는 蘇家, 내기나 싸움에서 진 쪽을 뜻하는 ‘輸家’와 발음이 비슷함)이라서 별로네요. 내기해서 이겨도 별로 성취감이 없을 것 같은데요.”

“소씨 가문이라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육장봉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당신도 참…….”

‘정말 조금도 지려 들지 않는군.’

“제 말이 틀렸어요?”

월령안은 육장봉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장군도 분명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아닌 척하지 마세요.’

“나는…….”

둘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육장봉은 갑자기 멍해졌다. 월령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월령안이…….’

그녀의 주변으로 몽환적인 빛이 한 겹 덮였다. 그 순간 온몸이 환상적인 빛에 둘러싸인 듯 보였다.

주변의 모든 것은 흐릿한 배경이 되었다.

그 빛은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눈을 따스하게 빛내 주었다. 그녀는 구름 속에서 걸어 내려온 선녀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와 동시에 월령안과 그를 보이지 않는 벽으로 가로막고 있었다.

월령안이 그에게 웃음을 짓는 모습도, 뭐라고 말하는 모습도 보았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는 가물가물하고 희미하여 잡히지 않는 연기 같았다. 그녀가 말을 걸었지만,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그와 월령안은 지척에 있었다. 또 한없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분명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그러나 잡을 수 없었다.

육장봉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는 이렇게 멍하니 월령안을 바라보며,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육 대장군, 제 말을 듣고 계시나요?”

월령안은 한참 동안 말했지만, 육장봉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녀를 바라보는 육장봉의 두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녀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정신이 완전히 딴 데 가 있는데? 나와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으면 될 거 아냐. 육장봉은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날 상대하는 게 그렇게 따분한가?’

월령안은 퉁명스럽게 코웃음을 치고 웃음을 거두었다. 허리를 곧게 펴고, 낯선 사람을 대할 때의 자세로 돌아왔다.

“대장군, 괜찮으세요?”

“흠흠…….”

순간, 그 몽환적인 장면이 사라졌다.

육장봉은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월령안의 싸늘한 눈과 마주하자, 이상하게 입안이 마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가볍게 목을 가다듬고 아닌 척 말했다.

“난 소 승상이 이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소.”

말을 마친 뒤, 옆에 있던 찻잔을 들고 덮개를 열었다. 안에는 차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육장봉은 잠시 멈칫했다. 그래도 대충 한 모금 마시려고 했다.

바로 그때, 월령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장군께 차를 따라 드리거라.”

‘월령안은 내 일거수일투족을 수시로 신경 쓰고 있는 걸까?’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입안도 마르지 않았다.

그는 찻잔을 옆에 내려놓고, 하인이 차를 따르게 했다.

차가 따라졌는데도, 육장봉은 서둘러 마시지 않았다. 대신 한담하듯 말했다.

“도박판에 대해서는 대책이 있소?”

“무슨 대책까지 필요하겠어요? 고작 돈 내기인데요. 물주가 연 판에, 저는 가서 돈만 걸면 그만이죠.”

월령안의 얼굴에는 또 특유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하지만 지금 육장봉의 기분은 대단히 좋은 상태였다. 굳이 그녀와 따지지 않았다.

“지금, 당신이 화신 칭호를 따낸다는 데 걸린 배당률이 가장 높소. 꼼수를 쓰지 않고도 화신 칭호를 따낼 자신이 있소?”

“대장군,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월령안은 뾰로통해서 말했다.

“춘일연에서 뽑힌 화신은 모두가 투표해서 뽑는 거잖아요. 사람들이 인정한 것이라고요. 어떻게 꼼수를 쓸 수가 있겠어요?”

삼 년 전에 꼼수를 부려서 화신 칭호를 따냈다는 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춘일연에서는 남의 도움을 받으면 안 된다는 규칙이 없었으니까.

“꼼수가 없었기는 했지.”

육장봉은 우스운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온 변경에서, 월령안만이 자기가 꼼수를 부리지 않았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보다도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하지만 지금 춘일연의 규칙이 바뀌었소. 그래도 화신 칭호를 따낼 자신이 있소?”

올해 월령안은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게다가 춘일연에 참여할 수 있고, 화신을 투표할 자격을 갖춘 사람은 다들 신분이나 지위가 높고, 재주가 뛰어난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절대로 돈에 허리를 굽히지 않을 것이다.

월령안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되물었다.

“왜 없죠?”

원래는 잠깐 얼굴만 내밀 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소씨 가문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서라도, 화신 칭호를 반드시 따내고 싶었다.

어차피 춘일연을 마치면 청주로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그래서 변경 귀족 여인들에게 욕을 먹더라도 두렵지 않았다.

육장봉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럼 당신은 금, 바둑, 서예, 그림 같은 것에 정통하시오?”

‘암위가 또 잘못 알아봤나? 월령안이 알고 보면 숨겨진 재원(才媛)이었나?’

월령안은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춘일연에서 반드시 금을 타고 바둑을 두라고 정한 사람이 있나요?”

그녀가 어떻게 그런 것에 정통하겠는가. 바둑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조금 할 줄 아는 정도였다. 춘일연은커녕 어디에도 내놓지 못할 수준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러한 교양을 익힌 귀족 여인들에 비하면, 스스로 즐기는 정도라고 우기기도 민망했다.

그리고 정통하다 해도 소용이 없었다.

바둑 말고는 금, 서예, 그림은 모두 승부를 가리기 어려웠다.

사람마다 각자 취향이 다르다. 두 사람의 실력이 현저한 차이가 없는 한, 승부를 가리기는 정말 힘들었다.

“금도 안 타고, 바둑도 안 두면, 뭘 할 거요?”

육장봉의 직감이 말해 주었다. 월령안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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