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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157)화 (157/1,004)

157화 하늘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군

월령안이 갔을 때, 노인은 금방 자리에서 일어난 참이었다.

그는 나른해서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늙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억지로 기운을 차리려고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녀는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으나, 입으로는 귀찮은 듯이 말했다.

“영감님, 저 걱정 좀 안 하게 하시면 안 돼요? 몸 좀 잘 챙기시라고요. 하루가 멀다 하고 한 번씩 앓아누우시잖아요. 자기가 열일고여덟쯤 되는 소년이라고 착각해서, 병약미를 풍기면 아가씨들이 비단 꽃을 던져 줄 줄 아나 보죠?”

“이 못된 계집애. 너야말로 내가 걱정하지 않게 할 수 없느냐?”

노인은 눈을 들어 월령안의 오른손을 흘끔 바라보았다.

“손이 이 지경인데, 남을 돕자고 도박을 해. 그 손을 그냥 버리려고 그러는 거냐?”

“제가 남을 돕자고 도박을 했다고 누가 그래요? 저는 돈을 벌러 간 거예요. 저희 수중에 있던 재산을 모두 팔았잖아요. 당분간은 수입도 없고, 벌어 놓은 것만 까먹을 수는 없잖아요. 돈을 제 눈앞까지 가져다 바치는데, 그걸 왜 안 벌어요.”

월령안은 노인의 곁에 앉아, 한 손으로 그의 다리를 주물렀다. 하지만 두어 번이나 주물렀을까. 노인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밀쳐 버렸다.

“힘 조절도 못 하면서. 저기 물러나 있거라.”

“이렇게 저를 싫어하시면, 영감님을 황실 별장에 데려가지 않을 거예요.”

월령안도 화를 내는 것은 아니었다. 노인의 곁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노인은 월령안에게 귀찮다는 눈빛을 보냈다.

“꿈도 야무지구나. 황실 별장은 돈이 있다고 다 살 수 있는 게 아니야.”

“돈은 필요 없어요. 제가 어제 번 거예요. 명월산장을 십 년 동안 빌렸어요. 저 대단하죠?”

월령안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명월산장? 어째 귀에 익다만?”

‘내가 예전에 살던 성 밖의 처소 아닌가? 그걸 령안이한테 빌려주었다고? 조씨 가문의 어느 못난 놈이 잃은 거야?’

“올해 춘일연을 명월산장에서 열기로 했어요. 하인들에게서 들으셨겠죠.”

요즘 도처에서 명월산장에 대해 떠들어댔다. 노인이 명월산장을 안다고 해서, 월령안은 새삼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냐?”

노인은 대답했으나,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그가 자취를 감추고 숨어 있는 동안, 그의 것이었던 명월산장은 이미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다.

옛사람들 말로, 사람이 떠나면 인정도 사라진다 했다. 그러나 사람이 아직 떠나지도 않았는데 인정은 이미 사라졌다.

“명월산장에는 커다란 배꽃 밭이 있다더라고요. 영감님, 배꽃을 가장 좋아하시잖아요? 가 보시지 않을래요?”

월령안이 장군왕 세자를 자극해 명월산장을 판돈으로 걸게 한 것은 춘일연 때문에 무심코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사실 단지 춘일연을 대비하려 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언제 배꽃을 좋아했다고 그러냐? 난 배를 좋아해. 꽃이 무슨 상관이냐. 그리고 명월산장에는 배꽃뿐만 아니라 복숭아꽃도, 살구꽃도 가득하거든.”

그가 심게 한 것은 모두 열매를 맺는 꽃이었다.

“영감님, 정보가 너무 뒤처졌군요. 명월산장의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는 옮겨간 지 오래예요. 지금은 모두 배꽃이에요.”

월령안은 오히려 지금이 더 마음에 들었다.

특별히 좋아하는 꽃은 없었다. 그래도 꼭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배꽃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명월산장의 배꽃이 마음에 쏙 들었다.

월령안은 신이 나서 말했다.

“영감님이 얘기했었잖아요. 명월산장의 배나무들이 열매를 맺으면 달고 즙이 많다고요. 마침 올해는 명월산장을 우리가 차지하게 되었잖아요. 배가 무르익으면 제가 매일 두 광주리씩 따 오게 할게요. 우리 한 광주리는 먹고, 한 광주리는 버려요.”

“너 내가 명월산장의 배를 좋아한다고 해서, 육장봉을 도와 도박한 거냐?”

노인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위험한 빛이 번뜩였다.

월령안이 겁도 없이 그랬다고 하면, 이 망할 계집애를 흠씬 혼내 줄 셈이었다.

‘겁이 없어도 너무 없어!’

“영감님, 무슨 생각을 하세요?”

월령안이 언짢은 듯 눈을 치켜떴다.

“제가 그렇게까지 효성이 지극하지는 않거든요. 명월산장을 빌린 건 겸사겸사 한 거예요. 춘일연이 마침 거기서 열리지 않았으면, 명월산장을 요구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황실 별장을 손에 넣으면 뭐 해요. 돈을 갖다 부어야 하잖아요. 그 잘난 배 몇 개 때문에 거기에 그 많은 돈을 쏟아붓겠어요? 제가 바보예요?”

명월산장은 황실 별장이다 보니, 매해 그 풍경을 유지하도록 거금을 들여 관리해야 했다. 명월산장을 빌린다고 해서 돈벌이가 되지 않을 것은 뻔했다.

하지만 노인이 명월산장의 배를 좋아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돈을 벌기는커녕 돈을 발라야 한다고 해도 기쁘기만 했다.

“춘일연에 무슨 문제가 있느냐? 올해에도 판을 벌이게?”

노인이 심상치 않음을 예리하게 알아차렸다. 삽시간에 얼굴빛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춘일연에 아무 문제가 없다면, 월령안이 공을 들여 명월산장을 손에 넣을 필요가 없었다.

“아무 일도 없는데 제가 왜 판을 벌여요. 돈이 모자라는 것도 아닌데요. 저도 원래는 춘일연을 그냥 넘기려고 했어요. 그런데 유경장이 일부러 찾아와서, 춘일연 도박판에 대해 말해 주더라고요. 그래서 사람을 시켜 조사해 봤어요. 알고 보니 판의 물주가 일부러 저를 미끼로 삼아서, 사람들을 도박으로 끌어들이고 있더라고요.”

월령안은 여기까지 말하자, 화가 나서 견디기 어려웠다.

“영감님, 그놈들이 얼마나 못됐는지 모르시죠! 제가 화신이 될 수 있을지 말지만 내기하면 말도 안 해요. 제가 올해에는 속임수를 쓸지, 어느 기예에서 속임수를 쓸지를 내기한다니까요.

사람들이 돈을 걸게 하려고, 그날 제가 무슨 색깔 옷을 입을지에 대한 판도 열었어요. 일부 부잣집 한량들은 사적으로 도박판을 열어서, 그날 제가 무슨 색깔 속옷을 입을지, 몇 사람에게 무릎을 꿇을지, 춘일연에서 제가 육장봉에게 매달릴지까지 내기를 한대요. 심지어 그 중 몇몇은 춘일연을 핑계로 저를 낚겠다는 내기까지 했대요. 영감님, 제가 속이 좁아서 실랑이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놈들이 정말 너무하잖아요.”

월령안은 화가 나 눈마저 새빨갛게 되었다.

“그놈들이 귀족 아가씨들은 감히 건드리지 못하고, 저만 심심풀이 땅콩으로 삼잖아요.

저를 광대처럼 무대 앞에 세워 놓고, 자기들 마음대로 평가하겠다는 거예요. 심지어 제 사생활까지도 이야깃거리로 삼죠. 만약 제가 반격하지 않으면 다들 저를 맘대로 건드려도 되는 줄 알 거예요. 나중에는 보는 사람마다 저를 짓밟으려 들 거예요.”

“확실히 이번 일은 참아서는 안 되겠구나. 다만 어떻게, 어느 정도로 반격할지는 꼼꼼히 생각해 봐야 한다. 령안아, 물주의 배후는 조사해 봤느냐? 어떤 세력이더냐?”

노인은 엄숙한 표정으로 물었다.

판의 물주가 월령안을 미끼로 삼는다. 장사하는 자들이 이 정도 뻔뻔한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월령안에 비하면, 화신연에 참가하는 다른 아가씨들은 일반 백성들이 알지도 못했고, 낯설었다. 게다가 그 아가씨들은 신분이 고귀했다. 일반인들은 감히 들먹거릴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들에 관한 정보를 염탐할 수도 없었다.

오로지 장군 부인이라는 보호막이 없어진 월령안만이 만만했다. 그녀야말로 평범한 상인 집안 출신이었다. 백성들의 입에 오르내려도, 우스갯거리로 삼아도 아무 부담이 없었다.

물주가 월령안을 미끼로 삼아, 백성들을 끌어들여 돈을 걸게 하는 것은 좋은 수였다.

하지만 물주는 이렇게 하면서, 월령안에게 성안 백성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지, 백성들의 눈길을 한 몸에 받고 싶은지를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물주가 이득을 보도록 도와줄 수 있냐며 물어본 적도 없었다.

당연히 월령안도 승낙할 리가 없었다.

특히 물주가 누구인지 안 다음에는 더욱 승낙할 수가 없었다.

‘물주가 나를 짓밟고 돈을 벌게 해 주라고? 내가 남 좋은 일을 왜 해 줘?’

월령안은 화신 도박판의 물주가 누구인지 조사해서 밝혀냈다.

변경이라는 곳에서 몽둥이를 한 번 휘두르면, 얻어맞는 사람 중 열에 일곱은 세도가였다. 춘일연 화신을 두고 도박판을 벌일 정도인 물주의 배후가 평범한 사람일 수가 없었다.

물주에게 보복하려면, 배후가 누구인지부터 알아내야 했다.

물론, 그게 누구든지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조사 결과를 본 순간, 저도 모르게 한마디 했다.

‘하늘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군.’

“화신 도박판은 하씨 가문에서 나선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배후에는 소 승상이 있어요.”

월령안은 소씨 가문이 또 어떤 세력과 협력했는지는 몰랐다. 또 알고 싶지도 않았다.

협력 세력이 누구든지 손을 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소씨 가문이 끼어 있는 한, 반드시 물주가 가산을 탕진하게 만들어 줄 셈이었다.

“소희 그 늙다리가? 그 노친네가 진짜 돈에 눈이 멀었나. 당당한 승상이 이런 돈까지 손을 대다니. 이게 탄로 나면 어쩌려고?”

노인이 소 승상을 언급하며 얼굴의 혐오감을 감추지 않았다.

지난 칠 년 동안 소씨 가문에서 월령안 모녀를 어떻게 대했는지는 그가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다.

“왜 손을 안 대겠어요? 세상에서 도박판만큼 물주가 돈을 빨리 벌 수 있는 장사가 어디 있다고요? 이런 도박판은 손해도 안 보고, 이익이 보장되잖아요. 또한 하씨 가문이 앞에 나서고, 소씨 가문은 뒤에 숨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깔끔하잖아요. 남들 앞에서 폭로될 걱정도 없죠. 그리고 도박판에서 번 돈도 소씨 가문에서 직접 받지 않아요. 몇 번의 장사를 거쳐 돈을 완전히 세탁할 거니까요.”

월령안은 비웃는 표정이었지만, 말하는 내용은 전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소 승상은 모르고 있을 거예요. 제 예상으로는 소여방이 나서서 한 걸 거예요.”

만약 소 승상이 한 일이라면, 그녀도 이렇게 빨리 조사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오로지 소여방, 소 대공자처럼 간덩이가 부은 응석받이 도련님만이 이렇게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

월령안은 냉소했다.

“소씨 가문이 막다른 골목에 내몰려, 도박판에까지 끼어든 건 분명 저 때문일 거예요. 저번에 제가 사람을 고용해서 소씨 가문의 밀수품들을 가로챘거든요. 그 물건값이 상당히 나가니까, 소씨 가문의 손실도 심각하겠죠. 그 뒤에도 출고한 물건을 몇 번이고 제가 모조리 가로챘어요. 소씨 가문에서 이제 밀수 거래는 엄두도 못 내거든요.

그리고 심씨 가문 쪽에서 또 일이 터졌잖아요. 이제 누구도 돈을 대주지 않아요. 소씨 가문에서 안달복달 하지 않고 배기겠어요? 소 승상은 체면을 중요시하잖아요. 또 고향의 가난한 친척들을 먹여 살리느라 매달 큰돈을 쓰거든요. 게다가 명성을 유지하느라 횡령하거나, 뒷돈을 받지도 않았어요. 장사로 돈을 벌지 못하면 어디 돈 나올 구멍이 있겠어요?”

월령안은 비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소씨 가문의 사업에 문제가 생겼으니 큰돈을 돌려막아야 해요. 그런데 소 승상은 돈이 나올 데가 없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도박보다 돈 문제를 빨리 해결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우리는 잘 알잖아요. 삼 년 전의 제가 가장 좋은 사례죠. 소씨 가문에서는 아마도 저들도 두 번째 월령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이번 화신 도박판으로 돈을 재빨리 긁어모으려는 거예요.”

‘그리고 겸사겸사 나를 골탕 먹이자는 거지. 일거양득, 얼마나 좋겠어?’

“그놈들이 삼 년 전에 네가 도박판을 벌여 큰돈을 번 것만 알고 그 뒤에 도사린 위험은 모르는구나. 돈 벌기가 그렇게 쉬웠으면, 황실에서 왜 너더러 청주 범씨 가문과 싸우게 강요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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